귀환자의 모든 것 97화
파천 길드에서 공지사항을 업로드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벤자민에 대한 정보. 그리고 그 벤자민을 쓰러트린 것에 대한 공식 입장문이었다.
그렇게 파천 길드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간 글 아래로는 드론 카메라로 녹화된 영상 링크가 첨부되어 있었다.
링크 된 영상에는 청룡이 벤자민을 쓰러트리는 모습. 그리고 죽은 벤자민에서 던전에서 유출된 마수를 준혁이 죽인 장면이 들어 있었다.
본래 공개 없이 기밀 자료로 보관하는 게 원칙이지만 선우는 과감하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지극히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
더 엄밀히 말해 귀환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도 했고, 시민들의 불안을 하루빨리 해소시켜 줄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파천 길드의 공식 홈페이지에 공지사항이 업데이트 된 지 10분.
전 세계의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각성자 커뮤니티)
- 유출된 마수 한국으로 갔네, 와.
- 귀환자님 잡으려고 한국 간 건가?
- 와, 저 사람. 엄청 어려 보이는데 전투력 봐라;;;
- 귀환자님 대신 싸운 거 누구지? 아직 어린 것 같은데.
- 엄청 꽃미남이네.
- 잘생겼다. 퇴폐미 지림ㅋㅋ
- 눈빛 봐라 어우.
- 대체 누구지…… 설마 귀환자님 제자인가?
청룡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쏟아졌고.
- 미국에서 그렇게 못 잡던 유출 마수 잡는 거 봐. 갓준혁 진짜 미쳤다.
- 한 칼에 찢어 죽임 ;;;
- 마법으로 속박한 다음에 바로! 크……!
- 갓준혁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감사해야 함.
- 갓준혁 없었으면 벤자민한테 무슨 꼴을 당했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와.
- 지금 찌라시 돌고 있는데, 미국에서 벤자민한테 당한 테러가 상당하다고 하네요.
- 증시 폭락 이유가 이거였나? 지금은 회복 중.
- 갓준혁 덕분에 한국은 무사했네. 휴우, 정말 다행입니다. ㅠㅠㅠㅠ
커뮤니티의 뜨거운 반응에 이어 또 다시 충격적인 소식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미국 협회장 로건의 사망 소식.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 협회장 로건이 벤자민에게 암살당했다는 뉴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먹었지만 준혁이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 터진 뉴스라 시민들은 그나마 혼란이 덜했다.
의도적으로 공개를 늦춘 것이었고 벤자민과 유출 마수를 처리한 이후였기에 시민들은 큰 흔들림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고 현재는 로건의 장례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미국 내에서는 차기 협회장을 선출하는 것에 대해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그럼에도 로건의 장례식은 진중하게 치러졌다.
준혁과 선우 역시,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
차량 유리에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빗물이었다.
“꼭 장례식을 치를 때면 날씨가 흐렸어.”
선우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준혁은 별다른 감흥 없이 날씨를 보았다.
우중충한 날씨에 대한 특별한 생각은 없었다.
“마치 슬퍼하기라도 하듯이 말이야.”
흔히 지푸라기도 싶을 만큼 힘든 상황이 오면 하늘을 원망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하지만 준혁은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의지 때문이라고 준혁은 늘 생각했다
마음이 꺾이는 순간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저급한 놈들에게 통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지금에 이르렀다.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강해질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식이었다.
준혁은 그 방향을 걸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우에게도 그런 길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누구에게나 자유가 있다.
어떤 세상을 살아갈지에 대한 선택.
가치관은 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뜻을 이뤄야 할 준혁에게는 확고한 의식이었다.
“곧 도착이야.”
선우가 검은 넥타이를 고쳐 매면서 말했다.
야외 장례식장에는 검은 우산을 쓰고 검은 수트를 쓴 사람들이 묘비 앞에 모여 있었다.
미국의 협회장으로서 건실한 길을 걸어왔던 만큼 추모를 위한 발길은 적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묘비 주변에 있었다.
“지금 나가면 꽤 시끄러울 것 같은데.”
“기다리자.”
“그게 좋겠어.”
준혁의 등장은 곧 파급력을 만들어 낼 것이고 엄숙해야 할 장례식장을 떠들썩하게 만들 여지가 있었다.
차량을 세우고 시동을 껐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파천 길드의 마스터이자 선우의 오른팔 백인호가 차량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둘이서 편하게 얘기를 나누라는 의미로 빠진 것이기도 했고, 사람들이 얼마나 빠지고 있는 체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으며, 주변으로부터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블랙 던전은 앞으로 추가적으로 확장되겠지?”
선우가 느슨하게 시트에 기대며 말했다.
이번 벤자민 사건을 해결하긴 했지만 앞으로 역사가 그래 왔든 블랙 던전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확장을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그렇겠지.”
준혁이 짤막하게 답했다.
이런 일들.
혹은, 지금보다 더한 사태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러기 위해선 대응을 해야 했지만 언제나 던전은 예측을 빗나가는 위험을 갖고 등장하기 마련이었다.
“형이 데려온 신수 말이야, 굉장하더라. 그렇게 강할 줄이야. 상대는 무려 리더보드 10위, 심지어 세계수의 힘을 훔쳐 온 놈이었어.”
“육 할이다.”
“……?”
“나도 몰랐는데, 다친 몸이었더라고. 힘을 쓰면 몸이 망가질 정도로.”
“……그 상태로 싸운 거라고?”
선우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 전투력이 고작 육 할의 힘이라니.
전력으로 싸우면 어느 정도의 실력을 발휘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어쩌면 준혁 다음으로, 가장 강한 존재는 신수 청룡일지도 몰랐다.
“맙소사.”
선우가 감탄한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은 대한민국과 귀환자의 전력이 훨씬 더 크게 상승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런 선우와 준혁은 생각이 달랐다.
청룡의 완성도는 훌륭했지만 백호의 성장 속도는 장담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어서였다.
준혁은 짧게 한숨 쉬었다.
“웬 한숨이야?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는 거 아니야?”
“백호.”
“백호……?”
“천방지축으로 까부는 걸 보면 솔직히 별로 기대가 안 되거든. 제대로 따라와 줄지도 모르겠고.”
“괜히 신수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럼 좋을 텐데.”
“꼭 아버지 같다니까, 진짜.”
준혁이 작게 웃었다.
“긴장될 수밖에.”
똑똑-
백인호가 유리창을 노크했다.
창문을 살짝 내리자 창틈 사이로 백인호의 눈이 보였다.
“이제 나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일 때, 준혁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백인호가 뒤늦게 준혁에게 뛰어가 우산을 건넸다.
“필요 없어.”
준혁이 우산을 거부하고 앞서 걸어갔다.
빗줄기가 꽤 강했지만 준혁은 털끝도 젖지 않았다.
마력이 전신을 감싸고 있어서였다.
반면 선우는 우산을 받아 백인호와 함께 준혁을 뒤따라갔다.
“우산을 안 써도 젖지 않는다니. 우리 형이지만 정말.”
선우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둣 웃었다.
백인호는 그저 말없이, 묵묵히 선우의 옆에서 걸었다.
그사이, 준혁은 묘비 앞으로 이르렀다.
협회장 로건의 가족과 일부 관계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준혁이 나타나자 화들짝 놀랐다.
인사를 건네왔고, 준혁은 간단히 목례로 답을 했다.
벤자민이 시킨 범죄자들에 의해 납치되었던 가족들은 모두 무사했다.
범죄자들이 놓아 준 것이다.
현재 협회에서는 그 범죄자들을 쫓고 있는 중이었다.
준혁이 로건의 관을 향해 헌화 한 송이를 던졌다.
헌화는 두둥실 아주 느릿하게 떨어지며, 사뿐히 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물 자국이 패인 얼굴로, 가족들이 감사 인사를 전해 왔다.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던전에 의한 로건의 죽음이 가슴을 묵직하게 눌러 왔다.
로건의 관을 보며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협회장으로서 책무를 다 하고 싶어 했던 그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던전의 성장과 확장은 이미 예견 된 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를 답답함과 분노가 준혁의 가슴에 어렸다.
당장이라도 마수들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일었으나 차분히 가라앉혔다.
하지만 던전은 각국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
아무리 어두운 분위기에 치닫는다 하더라도 아마 그들은 자신들이 재산이라 생각하는 던전을 쉽게 내어 놓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욕망으로 인한 죽음이 또다시 이어질 것이었다.
마음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추모를 마치고 로건의 가족들과 인사를 한 뒤 차량으로 다시 돌아갔다.
“인터뷰 요청이 꽤 많은데 안 하는 게 좋겠지?”
선우의 물음에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백호를 키우는 데 집중하고 싶다.”
선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을 촬영하기 위해 숨어 있던 기자들이 빗속에서 셔터를 눌렀다.
찰칵. 찰칵.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미 기자들이 숨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들을 물릴 필요까진 없었다.
무례하게 취재 요청을 위해 다가온다면 어차피 백인호 군단장이 막을 것이었지만 애초에 기자들도 매너를 지켰다.
차량을 타고 빗물을 뚫으며 공항으로 향했다.
오직 로건의 장례식을 위해 찾은 미국이었다.
장례식 방문이었고 다른 일정은 없었다.
준혁의 일행은 곧바로 귀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 * *
캐슬로 돌아오자 백호의 언어 실력은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다.
평범한 10살 정도의 말솜씨 정도는 갖춘 것이, 확실히 신수라 그런지 습득 속도는 빨랐다.
“주인니이이이이임!”
백호가 전력질주로 달려와 준혁에게 점프했다.
날다람쥐처럼 옆구리에 붙은 백호를 달고 준혁은 한숨 쉬었다.
이 어린애나 다름없는 녀석을 훈련 시키고 던전에 보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서였다.
“제가 책임지고 가르치겠습니다.”
청룡의 눈이 냉정하게 빛났고 이에 백호는 무서운 듯 호다닥 달려가 지우의 등 뒤로 숨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지우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준혁은 백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백호가 “히이!”웃으면서 준혁에게 쫑쫑 뛰어왔다.
준혁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듯 백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강해져야 한다.”
준혁이 말하자 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악을 위해, 그리고 세상의 균형을 위해.”
백호는 이해하기 어려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걸까.
“청룡.”
“네, 주인님.”
청룡이 준혁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많이 힘들어할 거다. 왜 싸워야 하는지, 왜 강해져야 하는지도 모르겠지. 그 상태로 검술을 배우고, 능력을 깨우치기 위한 과정을 밟기란 어려울 거야.”
준혁이 백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른다면. 검을 드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다.”
단순히 백호를 교육하는 것이 아닌, 백호의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청룡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깊이 생각에 잠겼다.
자연스럽게, 그 길을 따라와야 하는 거겠지.
그만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연무장으로 가자. 네 몸 상태도 확인해 볼 겸.”
“예.”
청룡이 고개를 끄덕였고, 백호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그저 보석 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