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94화
우뚝 멈춰 선 벤자민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전신을 찌르르 울리는 감각이 뇌를 자극했다.
어째서일까?
벤자민은 가슴 깊은 곳 안에서 귀환자에 대한 분노가 들끓는 걸 느꼈다.
의도한 감정이 아니었으나 검은 감정은 의도와 관계없이 파도치듯 넘실거렸다.
“귀환자, 귀환자……!”
벤자민이 마치 주문처럼 읊조렸다.
한동안 귀환자에 대한 생각에 지배당해 있던 벤자민은 점차 마나의 공급이 느려지는 걸 느끼고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피부색이 녹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내가 세계수 그 자체로군.”
끊임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마르지 않을 듯한 마나를 느끼며 연구진들의 죽음 속에서 벤자민의 광소가 터져 나왔다.
“귀환자! 귀환자!”
웃음을 뚝 그친 벤자민의 눈이 검게 일렁였다.
-귀환자의 모든 것을 빼앗아라.
벤자민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 * *
새로운 식구를 맞이한 다음 날.
“잘 부탁드려요.”
지우의 인사에 강사로 오게 된 여자가 생긋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이쪽 계통으로는 탑이랍니다.”
새로 온 강사를 보고 지우는 마음이 든든했다.
청룡과 달리 백호는 언어 습득 능력에 있어 상당히 힘겨워했다.
아무래도 전문성이 없다고 판단한 지우는 교육 분야에서 유명한 전문 강사를 불러, 그녀를 백호에게 붙여 주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제가 같이 있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라서요.”
“아, 괜찮아요.”
지우는 양해를 구하고 전문 강사가 백호를 가르치는 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같이 있으니 학습 진도 상황을 바로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교육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우는 감탄했다.
확실히 전문 강사라 그런지 백호의 언어 습득 효율이 놀라울 만큼 빨라진 게 보여서였다.
‘역시 전문가를 부르길 잘했어!’
지우는 언어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전문 강사를 초빙하기로 했다.
이렇게만 나가면 백호의 성장 속도는 청룡만큼은 아니더라도 눈부시게 빛이 날 듯했다.
‘우리 백호도 엄청 똑똑하구나.’
전문 강사가 언어를 가르치는 동안 지우는 새로운 강사들을 찾아 나섰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던 때.
“꺄악!”
갑작스레 비명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지우가 깜짝 놀라 옆을 보자 백호가 전문 강사의 팔을 깨물고 있었다.
“헉! 배, 백호야! 그러면 안 돼!”
지우가 벌떡 일어나서 백호의 등을 토닥였다.
“놔! 얼른 놔, 백호야.”
지우의 채근에 백호가 물었던 팔을 놓았다.
전문 강사는 팔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지우는 백호를 밖에 두고 약과 반창고를 들고 돌아왔다.
“괜찮으세요?”
강사는 이빨 자국과 상처가 남은 팔을 붙잡고 울음을 참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어떡해. 우선 약 좀 바를게요.”
치료를 하고, 지우는 문밖에서 벽에 머리를 콩콩 박고 있는 백호에게 다가갔다.
“백호야! 왜 그랬어? 선생님을 깨물면 안 되지.”
백호가 인상을 쓰며 지우를 돌아봤다.
“배고파.”
백호가 똑바른 억양으로 말했다.
지우는 멍하니 백호를 보았다.
“너 배고파서 그랬던 거야?”
“배고프면 화나.”
지우는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배고파도 앞으로는 그렇게 깨물면 안 돼. 알았지? 배고프다고 하면 앞으로 내가 바로 밥 줄게, 응?”
“알았어.”
백호가 벽에 머리를 콩콩 박으며 대답했다.
“벽에 머리 박지 말고.”
지우는 백호의 등을 토닥인 뒤, 전문 강사에게 뛰어갔다.
“백호가 배고파서 그랬대요.”
강사가 황당하다는 듯 눈물 젖은 얼굴로 백호를 쏘아보았지만, 이곳은 캐슬.
무려 귀환자의 성전이었다.
어렵게 들어왔는데 하기 싫다고 때려치울 수도 없는 곳이었다.
“매니저님.”
“네?”
“보호 장비 같은 게 있을까요?”
“보호 장비요?”
“혹시 또 모르니까요.”
겁에 질린 강사를 보고 지우는 한숨 쉬었다.
그녀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가서였다.
“제가 준비해 드릴게요. 죄송해요.”
“흑흑, 매니저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죠.”
지우는 겁에 질린 강사를 한참이나 다독여야 했다.
* * *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던 준혁이 얼굴을 들었다.
서재로 청룡이 들어오고 있었다.
중원에서 입던 옷이 아닌 현대형의 던전 의복을 입고 있자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청룡은 서재를 두리번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천마궁과 비견해도 지지 않을 만큼 많은 서적들이군요.”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지. 중요한 건 내용이니까.”
“주인님의 한마디 한마디는 늘, 저를 일깨웁니다.”
청룡이 아부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며 아무 책을 꺼내 읽었다.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준혁이 책을 탁 덮으며 말했다.
청룡이 훑어보던 책을 책장에 꽂았다.
“궁금한 거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나가자. 나도 말해 줄 것들이 있어.”
준혁은 청룡과 함께 캐슬 본관 밖으로 나왔다.
“처음 우리가 도착했던 곳을 기억하지?”
“예.”
“그곳이 연무장이다. 마법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네 무공을 전력으로 펼쳐도 벽이나 바닥은 깨지지 않을 거야.”
청룡이 신기한 듯 실소했다.
“주인님의 말이 아니라면 믿지 않았을 겁니다.”
“앞으로 거기서 네 수련도 하게 되겠지만,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무엇입니까?”
“백호를 가르쳐.”
“예, 그리하겠습니다.”
청룡이 담담하게 답했다.
준혁은 청룡을 힐끔 보았다.
군말 없이 수긍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했다.
“던전에 대해서도 들었지?”
“마물이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사냥하면, 실력이 오를 거야.”
청룡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물을 잡는다고 해서 실력이 오른다는 건 상식적으로…….”
“애초에 여긴 네가 알던 세계가 아니야.”
청룡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강한 놈들을 쓰러트릴수록 경험치가 되어 너를 성장시킬 거다.”
“마물이란 것들은 던전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언제 갈 수 있습니까? 주인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선, 저 역시 강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룡의 강함을 추구하는 눈동자가 준혁에게 향했다.
“서두를 필요 없어.”
청룡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선우였다.
- 형, 급하게 들어온 정보가 있어.
“무슨 정보?”
준혁이 걸음을 멈추었고, 청룡은 호수로 다가가 정원의 풍경을 감상했다.
- 미국 협회장 로건을 죽였던 리더보드 10위 벤자민 레인. 그의 위치가 확인됐어.
“어차피 미국 내에 있는 거 아니야?”
- 벤자민이 가져간 정보를 기반으로, 매복을 통해 전투를 했지만 모두 전멸. 그리고 그 시점부터 위성으로 추적 중인데…….
선우가 말끝을 흐렸다.
“추적 중인데? 왜?”
- 벤자민의 행선지가 한국이야.
선우가 침음했다.
잠시간 불편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현재 사상자는?”
- 헌터들과, 민간인을 포함해 약 20여 명.
벤자민은 이미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연쇄살인마였다.
재판을 할 필요도 없는 즉결처분감의 상대.
준혁은 스마트폰을 귀에 붙인 채로 청룡을 보았다.
그 시선에 청룡이 준혁을 곁눈질로 돌아봤다.
“이동 경로는?”
- 비행기에 숨어든 모양이야. 위치로 봤을 때 확실해.
“왜 못 잡았지?”
- 순간이동주문서로 항공기를 탈취한 것으로 보고 있어.
“일단 공항부터 통제해야겠네.”
- 그렇지 않아도 이미 정리 중이야. 민간인들은 대피시켰고, 바리케이드까지. 경비 헌터들을 두긴 했는데. 문제는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들과 조종사들이야.
“우선 내가 바로 공항으로 갈 거야. 최소 인력만 남기고 모두 빼. 리더보드 10위라면 헌터라고 해도 사상자가 생길 수 있으니까.”
- 예상 도착 시간은 지금부터 6시간 후쯤. 만약, 그대로 비행을 이어 온다고 가정했을 때야.
“계속 위치 추적하고, 상황이 변하면 바로 전화 줘.”
- 알았어.
준혁이 전화를 끊고 짧게 한숨 쉬었다.
“무슨 일입니까?”
준혁의 표정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한 청룡이 다가와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시작되겠네.”
“……?”
준혁이 불쾌감이 번진 얼굴로 혀를 찼다.
“사냥의 시간이다.”
온순하고 평온했던 청룡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변화했다.
끓어오르는 내공이 피의 갈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우선 공항으로.”
앞서가는 준혁을 따라 이동하면서 청룡이 가볍게 손목 관절을 꺾었다.
* * *
“크히히!”
항공기의 조종실에서 벤자민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의 등 뒤로 좁은 바닥에는 부기장이 쓰러져 있었다.
수석기장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벤자민의 눈치를 살폈다.
현재 항공기는 대한민국으로 향하고 있다.
“으음, 이렇게 조종실로 오니 풍경이 예술이군. 어릴 때부터 어떤 풍경일지 아주 궁금해하곤 했었어.”
“…….”
“왜 이렇게 말이 없어?”
“…….”
“긴장하지 마, 친구.”
벤자민이 웃으며 기장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이건 그냥 어렸을 때부터 궁금한 건데 말이야. 위험한 구름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지?”
기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레이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파를 쏴서 수분에 반사된 양을 보여 주는데, 그 감지를 통해 위험 가능성을 유추합니다. 물론 지금은 던전 물질을 통해 더 미세한 정보까지 읽을 수 있고요.”
벤자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명의 발전이란 역설적으로 인간의 뇌를 퇴화시키지. 발전 가능성이 없게 만들거든.”
쾅!
벤자민이 주먹으로 레이더 화면을 깨부쉈다.
기장이 화들짝 놀라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파지직 하고 전기가 튀는 소리가 났다.
벤자민이 낄낄 웃으며 기장의 어깨를 토닥였다.
“본인의 능력을 믿어, 응?”
벤자민이 풍경을 보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곧 귀환자의 땅에 도착하겠군. 아주 고민이야. 이 비행기를 폭파시켜 버릴지. 위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빠져나가 날 기다리고 있을 놈을 엿 먹일지.”
벤자민이 기장을 향해 씨익 웃었다.
“어느 쪽이 좋을까?”
기장이 입술을 달싹였다.
“벼, 변장을 하는 편이 좋을 듯싶습니다.”
“으음, 그래?”
웃고 있던 벤자민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너야 당연히 그렇겠지. 살고 싶을 테니까.”
기장이 손을 벌벌 떨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릴 것 같아?”
“제, 제발…… 제 아이가 아직 어립니다.”
“행복한 가정을 가졌군.”
벤자민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기장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벤자민 님, 제발……!”
“그러고 보니 내가 유명해졌네? 마치 귀환자처럼 말이야. 아마 점점 더 유명해지게 되겠지.”
벤자민이 자신의 깡마른 밀랍 같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죽었다가 살아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산다고 하더군. 정말일까?”
기장의 얼굴에 일말의 희망이 걸렸다.
“…….”
“글쎄, 난 아니라고 봐.”
고개를 갸웃한 벤자민의 손에 불꽃이 튀더니, 불덩어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볼링공만큼 커졌다.
그 이글거리는 열기에 기장의 얼굴은 혼이 쫙 빠졌다.
“내 인생은 어렸을 때부터 늘 비극이었어. 그러니 네가 죽어야 균형이 맞지 않겠어?”
기장의 눈에 불덩어리의 붉은빛이 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