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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의 모든 것-90화 (90/175)

귀환자의 모든 것 90화

“어째서 나를 다시 찾은 거지?”

천마가 물었다.

해월은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다는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답해라, 해월.”

해월은 지금 보고 있는 천마의 얼굴을 죽을 때까지 잊고 싶지 않은 듯 눈을 떼지 못했다.

“부디 행복하셔야 해요.”

천마의 눈이 침체되듯 가라앉았다.

“오래전 그날, 왜 날 버린 것이냐.”

“제가 뭐라고. 그리도 마음에 걸리셨습니까?”

“…….”

“제가 짐이 되어, 항상 위협에 빠지곤 하셨지요.”

“끝까지 지켜 준다고.”

천마가 이를 깨질 듯이 깨물었다.

“끝까지 지켜 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신령이 한 분 계셨어요.”

천마는 어린 시절 마을에서 만났던 할멈을 떠올렸다.

신분과 어울리지 않게 늘 고운 옷을 입고 다녔던 특이한 할멈이었다.

“그분은 스스로를 신령이라 하여, 불행한 훗날을 예견하곤 하셨죠. 그분이 말씀하시길. 비극적이게도 꽃길은 볼 수 없으나, 불운한 불길만은 보인다며.”

해월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천마 곁을 떠나라. 그를 위해서라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깟 미신을 믿은 것이냐?”

“그 미신으로 인해 서로의 불행은 빗겨 갔을 줄 모르나 그 마저도 너무나 아픈 길을 걸으셨지요.”

“같이 갈 테냐. 해월.”

해월이 고개를 저었다.

“늘 교주님의 앞길에 꽃길이 있기를 기도하고 바라 왔습니다.”

“그러니…….”

“부디 뜻을 이루시길 간절히 기도하겠나이다. 저 또한, 저의 일을 마무리 짓고 있을 테니.”

“넌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해월.”

해월이 소리 없이 아이처럼 울었다.

천마는 그런 해월을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울지 마라. 너를 탓한 것은, 그저 그리움이었을 뿐이니.”

해월은 눈가를 짚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깨의 흔들림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격정적인 슬픔에 빠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못나서 늘 너를 울리지 밖에 못하는구나. 앞으로는 웃는 일만 있을 것이다. 내가 사라지는 것이니, 신령의 미신이 사실이라면 너의 운명 또한 변할 것이 아니겠느냐.’

“해월.”

천마의 부름에 해월이 얼굴을 들었다.

천마는 미소 짓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다시 너에게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때 못다 한 이야기를 하자.”

해월이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뜻을 이루소서.”

천마가 준혁을 돌아봤다.

“떠나기 전에, 해월을 안전한 곳까지 바래다줄 수 있겠습니까?”

준혁은 천마와 해월을 보며 짧게 한숨 쉬었다.

어비스의 문을 넘은 이상 시간의 흐름은 한 시가 촉박했다.

하지만.

저 둘을 보고 어떻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어서 가자.”

준혁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천마궁에 대한 정리는?”

천마가 천마궁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기운으로 가득한, 마치 악마가 품은 듯한 자신의 성전.

“결국 누군가 대를 잇게 되겠지요.”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하산했다.

천마는 해월의 하얗고 작은 손을 잡았다.

“너와 하는 마지막 산책이 되겠구나.”

천마가 말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와의 이별이 가까워지는 것이었으니.

“놀랍지 않나요?”

해월의 말에 힘없이 땅을 보던 천마가 그녀를 보았다.

“천마궁으로 가는 이 길. 모든 사람들이 무섭고 두려워하는 곳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꽃이 피어 있지 않습니까?”

해월은 미소 지은 얼굴로 빗물에 젖은 꽃 한 송이를 보고 있었다.

마치 절벽에 핀 꽃처럼, 혼자서 빛을 내는 단 한 송이의 꽃이었다.

- 교주님. 저자를 그냥 보내는 것입니까?

천마궁의 고수들이 눈에 불을 켠 채 앞서가는 준혁을 지켜보고 있었다.

- 그의 길을 막지마라. 화경을 넘어선 현경의 고수이니. 우리는 적수가 되지 못한다. 흔적조차 쫓지 말아라.

현경이라는 말에, 천마곡의 고수들이 침음했다.

오래전, 천하제일인이라 불리었던 금의위 중 한 명만이 현경의 고수라 불리었다.

그런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자가 현 중원에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추적은 무의미했으며 싸움 또한 무의미했다.

현경의 고수는 존재 자체가 재앙이었으니.

- 교주님의 뜻을 받듭니다.

고수들이 부근에서 기척을 지우고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지는 나를 용서해라.’

어린 시절부터 천마궁의 자리에 앉기까지의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돌이켜 보니 모두 분노로 점철된 한 편의 긴 악몽이었다.

천마는 앞서가는 준혁을 보았다.

그와 함께라면, 이 악몽이 정말로 끝이 날지도 몰랐다.

그는 어둠이 아닌 빛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이제 정말 인사를 해야 할 때가 왔네요.”

해월의 차분한 목소리에 천마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벌써?

천마궁에서 안전한 지역까지 오려면 상당히 먼 거리였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천마는 걸어온 뒤를 돌아보았다.

한 걸음이 소중하여 속도를 늦추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천마궁과는 멀어져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안전하니 너무 걱정 마시고, 편히 떠나십시오.”

해월이 말했다.

천마가 해월의 손을 놓았다.

“부디 강녕하소서.”

해월이 생긋 미소 지었다.

슬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밝은 미소였다.

그에 반해 천마는 좀처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이후로 영원히 못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너는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로.’

천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잘 있어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해월이 달려와 품에 안겼다.

“……기억하려고요. 당신의 따뜻함을.”

곧 품에서 떨어진 해월은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마도 해월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순수한 진심을 담아.

* * *

‘이걸로 해후로는 충분했겠지.’

천마, 아니 이제부터 청룡이라 불릴 신수와 해월을 보던 준혁이 엑시트 게이트를 열었다.

찬란한 어비스의 문이 생성되었다.

그 눈부신 빛의 게이트가 열리자 청룡과 해월 둘 모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이제 그만 가야 한다.”

천마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해월을 보았다.

“잘 살아라. 어느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큼.”

“천마님, 아니 청룡의 신수님도요.”

마지막 인사를 끝내고, 청룡이 준혁의 옆에 섰다.

“우린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간다. 네가 살아왔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까?”

청룡이 눈부신 어비스를 보며 물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뜻을 이루면 도와주지. 네가 원하는 곳에 너로써 다시 설 수 있게.”

청룡이 미소 지었다.

“대신 주인님의 뜻은 제가 이뤄드리겠습니다.”

준혁이 피식 웃었다.

“가자.”

준혁이 게이트 속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잠시 멈칫한 천마는 고민했다.

그녀를 돌아볼지에 대해서.

하지만 더 이상의 후회는 없다는 듯 천마가 미소를 지으며 화려한 어비스의 문을 넘었다.

두 사람이 어비스 게이트 속으로 사라진 후, 곧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언제 두 사람이 존재했냐는 듯 공허한 정적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홀로 남은 해월은 텅 빈 눈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걸음이 비틀린다.

턱 끝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점점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내 터트릴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좋은 기억을 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눈물로 범벅이 된 해월이 나무를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참았던 울음이 쉬지 않고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좋은 모습으로 남기 위해 참고 참았던 만큼 도저히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울음이었다.

* * *

게이트를 통해 처음 어비스의 문을 넘었던 연무장으로 돌아왔다.

청룡이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무장엔 여전히 최설화의 보호 프로텍트가 남아 있었다.

돌아올 날을 대비해 꾸준히 마력을 써서 유지시킨 듯했다.

“건물 내부에 어떻게 이런 힘이…….”

청룡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야. 조금씩 알아가면 될 거다.”

준혁이 청룡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청룡이 숨을 크게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이 앞장서서 연무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청룡이 준혁을 따라 연무장을 나오면서 캐슬의 정원을 시야에 담았다.

“멋진 곳이군요.”

잘 정돈된 캐슬의 정원을 본 청룡의 순수한 첫 감상이었다.

현대적인 미술 감각으로 지어진 건물과 정원의 풍경은 청룡으로 하여금 신선한 충격을 전해 주고 있는 듯했다.

“네가 살던 세상보다는 훨씬 발전된 문명이니까.”

중원무림은 사실 문명이라고 할 것도 없이 아주 오래 된 과거의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이니 청룡에게 현 시대의 모습은 신세계일 수밖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귀환자님!”

가위를 들고 정원을 손질하던 관리사가 꾸벅 인사했다.

준혁도 목례로 인사하며 오가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았다.

“어째서 하인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받아 주시는 겁니까?”

청룡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

“어디에든 높고 낮음은 없다. 너도 분명히 기억해 둬.”

청룡은 미간을 찌푸리며 깊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준혁의 말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높고 낮음이 없다니?

그 당연한 것을 거부하라는 건 청룡의 입장에선 상식의 파괴였다. 하지만 뭔가 그 말에 큰 깨달음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노력하겠습니다.”

청룡의 답을 듣고 준혁은 웃었다.

“당분간은 배워야 할 게 많을 거야.”

준혁이 청룡을 데리고, 캐슬 본관으로 들어갔다.

“백호야, 밥 좀 먹자. 응? 제발.”

위아래로 쭉쭉이를 하듯이 바닥에 양다리를 벌린 채 엎어져 있는 백호는 마치 축 늘어진 젤리 같았다.

기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데다 우울감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백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다시피 하고 있는 건 매니저 이지우였다.

“한 입만 먹자. 한 입만. 한 입마아안.”

온갖 재롱을 떨다가 현타가 온 듯 하얗게 식은 지우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앗! 귀환자님!”

귀환자라는 말에 백호가 벌떡 일어났다.

“크-옹!”

백호가 준혁에게 돌진해 10바퀴를 돌더니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와, 그동안 그렇게 힘이 없더니 귀환자님 오시니까 저렇게 팔팔해지네요.”

황당함과 서운함. 그리고 허망함까지 밀려드는 얼굴로 지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비스로 간 지 얼마나 지났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이번엔 전에 비해 금방 오셨네요.”

다행히 어비스로 간다고 해도 지구와 큰 차이까지는 없는 듯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다행이네.”

“네. 저,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구예요?”

지우가 캐슬의 거실을 휘휘 훑어보고 있는 청룡을 보며 물었다.

준혁이 다리에 매달려 떨어질 생각이 없는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이랑 같은 신수다.”

준혁의 말에 지우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청룡 역시 충격 먹은 듯 바위처럼 굳어진 얼굴로 백호를 응시했다.

“……저 녀석이 저와 같은 신수란 말입니까?”

청룡이 믿기 싫다는 듯 백호를 보며 물었다.

백호가 준혁의 다리에서 뚝 떨어져 내리더니 청룡을 향해 짖었다.

“크옹! 크옹!”

고개를 젖히며 거세게 짖는 백호를 본 청룡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이런 강아지 같은 게 신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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