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89화
천마의 웃음이 짙어졌다.
“재밌는 자구나 싶었더니 그저 광인이었군.”
“너도 퍽이나 신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닌가?”
천마의 눈에 살기가 일렁였다.
그저 죽이고자 하는 살기가 아닌 자연스레 누적되듯 켜켜이 쌓인 살기였다.
그때 새하얀 빛이 준혁과 천마와의 공간을 가득 메웠다.
마치 도화지처럼 흰 공간.
그곳엔 준혁과 천마가 서 있었다.
갑작스레 배경이 변했지만 천마는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술이군.”
천마의 눈앞으로 허공에 글자가 새겨졌다.
[신수 계약을 요청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질문이 나타남과 동시에 천마의 머릿속으로 엄청난 정보가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 천사가 균열을 만들어, 어비스의 통로를 통해 신수를 탄생시킨 것에 대한 풍경이었다.
알에서 껍질을 깨고 태어난 아이.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과거의 기억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과대한 정보량과 더불어 충격적인 진실에 의해 천마는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했다.
그사이, 빛이 사라지고 천마궁의 풍경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천마는 여전히 숨겨진 과거의 정보에 의해 당장이라도 머리가 박살 날 것만 같은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으, 으윽! 으아아아아아악!”
천마는 땅에 창을 박으며 비명을 질렀다.
내공에 의한 힘에 원형으로 바닥이 깨져 나가고 태풍처럼 거센 바람이 불었다.
준혁이 멀리서 구경 중이던, 해월의 앞을 가로막았다.
두꺼운 나무가 부러져 나갈 만큼 강한 바람이었다.
준혁이 아니었다면 해월은 그 힘에 떠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만큼의 거센 사자후였다.
“크으윽……!”
천마가 핏발 선 눈을 떴다.
이내 그에게,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언젠가 너의 주인이 너를 찾는다면.]
[너는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라.]
[그는 빛이니.]
[너 또한 빛나게 될 것이다.]
[너 역시 빛이 근원이었으니.]
천사의 목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천마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창을 쥐고 있는 손이 벌벌 떨렸다.
“……개소리하고 있네.”
천마로부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내공의 힘이 시한폭탄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천마궁 아래로 내려가 그곳에서 기다리세요. 이곳은 위험합니다.”
해월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켜볼 거예요. 그의 모습을 끝까지.”
준혁은 못 말린다는 듯 해월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가 짧은 한숨을 뱉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지키며 싸워야 했다.
그 순간 준혁의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신수가 계약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천마에게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를 거대한 분노가 솟구치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알아주기라도 한 듯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내 빗물이 떨어졌다.
굵은 물줄기는 점차 그 속도를 더하여 소나기가 되었다.
천마의 얼굴은 빗물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인지 웃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입은 웃고 있는 것에 반해 눈이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신을 죽이겠다고 했었지? 허풍은 아니었나 보구나. 단순한 사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천마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비에 젖은 천마의 축 늘어진 자세에서 그의 지난 슬픔이 묻어나 있는 듯했다.
천마가 말을 이었다.
“그래. 나 또한 그랬다. 신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할 수만 있다면 언제고 죽여 버리고 이 세상과 함께 나를 지우고 싶었다.”
천마가 비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그런 내게, 주인이 필요할 성 싶으냐?”
“내가 죽이고자 하는 신은 인간의 마음을 원했지. 놈들에겐 그 마음이라는 게 영양분으로 가득한 음식이자 장난감이었다.”
준혁이 말을 이었다.
“그 마음은, 지금의 너처럼 좌절하고, 스스로를 망가트리고자 절망하는 마음이다.”
천마의 시선이 갈 길을 잃고 헤맸다.
“그래서 억울해?”
준혁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든다.
천마가 심장에 그 화살을 맞은 듯이 몸을 떨었다.
준혁이 말을 이었다.
“너만 억울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 누구나 억울함 하나쯤은 가슴 안에 품고 산다. 중요한 건 꺾이느냐. 꺾이지 않느냐. 그뿐이다.”
준혁이 헬바인의 장검을 땅에 꽂았다.
“아무런 힘이 없었단 이유로, 가족을 잃고, 소중한 것을 빼앗긴 사람들과. 신수라는 이유로 그 힘을 등에 업고 그 자리에 올라, …스스로를 망가트리는 너와 그들이 다를 게 뭐지?”
천마의 목에 굵은 핏줄이 솟았다.
“꺾이지 말았어야지!”
준혁의 목소리가 빗물을 뚫고 천마를 후려쳤다.
천마는 분노와 당혹감, 그리고 충격과 후회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외로움에 기대, 악마에게 그 마음을 갖다 바친 너를, 내가 가르칠 생각이다. 분노는 올바른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걸.”
축축한 땅을 보며 웃던 천마가 이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땅을 깨트리며 움직인 천마가 준혁을 향해 선명한 검강으로 가득한 창날을 휘둘렀다.
화경의 경지.
그 초입에 이른, 검강의 빛줄기가 빗물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준혁이 오른발을 내디디며 허리를 비틀고 팔을 뻗었다.
맨손으로 검강을 잡아 움켜쥐었다.
준혁의 손끝에서 폭발하는 검강의 파장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손바닥이 찢어지고 오른팔의 피부와 근육이 찢겨 나갔으나 준혁의 얼굴은 고요했다.
천마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준혁을 응시했다.
“미쳐 날뛰는 힘 따위를, 누가 두려워하지?”
준혁의 나직한 목소리가 천마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혼이 나간 듯 준혁을 보던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준혁이 천마에게 다가가자, 천마는 울면서 뒷걸음질 쳤다.
“아니야!”
아직은 어린애.
신수였기에 폭주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한, 미성숙한 존재.
그것이 제 27대 마교라는 간판이자 천마라는 명성에 가려진, 청룡의 진짜 모습이었다.
천마는 악몽을 꾸는 듯 뒤틀린 얼굴로 울었다.
인정하기 싫다는 듯 천마의 창에서 청룡의 힘이 쏟아져나왔다.
단순한 내공이 아니었다.
내공의 힘에 신수의 힘이 덧씌워진 공격력이 준혁에게 향했다.
검강과 신수 청룡의 영력이 합쳐진 힘이 휩쓸듯이 준혁에게 날아들기 직전.
그 힘이 발출되기 전에 준혁이 휘둘러지는 칼날에 주먹을 내질렀다.
천마의 창날과 준혁의 주먹이 충돌했다.
서로를 밀어내려는 마력과 내공의 힘겨루기에 의해 둘을 중심으로 원형의 파괴가 일어났다.
바닥이 지진처럼 흔들리고 깨져 나갔으며, 충돌로 인한 강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 힘에 의해 해월이 천마궁 쪽으로 날아갔다.
허공을 날았던 해월은 몸을 비틀며 천마궁의 벽면 앞에 착지했다.
그녀 역시 무공을 수련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해월에게 둘의 싸움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어지간한 무림인은 저 격전지 사이 부근으로 가는 것조차 힘든 일.
그 정도의 힘이 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쿨럭-!”
천마가 한 움큼의 피를 뿜으며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애초에 부상을 입고 있던 몸이었다.
그런 몸으로 최대 절기 중 하나로 정면충돌을 감행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천마는 극심한 체력 손실과 내공 손실로 이어졌다.
천마는 헉헉대는 숨을 뱉으며 준혁을 노려보았다.
준혁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서 있었다.
만약 추가 공격이 이루어졌고 이를 방어하려 했다면 기의 역행으로 주화입마에 걸렸을 것이다.
“나는 천마가 되었고, 천마로 살아갈 것이다. 절대로 너를 주인으로 삼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마치 죽음 앞에 몰린 늑대처럼, 천마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야생성을 표출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강해질 수 있다.”
“…….”
“나와 함께 가면 넌 훨씬 강해질 수 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것이며,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어.”
천마가 이를 악물며 창을 휘둘렀다.
준혁은 왼팔을 들어 창대를 막으며 천마의 몸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준혁의 주먹에 푸른 기류가 마치 폭포를 거스르듯 천마에게 향했다.
쿵.
준혁의 주먹이 천마의 복부를 강타했다.
“커-헉!”
눈을 찢어질 듯이 크게 뜨며 울컥 피를 토한 천마가 창을 놓치고 무릎을 꿇었다.
천마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준혁의 발치를 잡았다.
준혁이 다리를 굽혀 앉아 천마와 눈을 맞추었다.
“넌 혼자가 아니야. 신수는 너 하나만이 아니란 말이다.”
천마가 충격에 물든 눈으로 준혁을 보았다.
“……뭐?”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너를 데리러 왔다는 얘기다.”
천마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정말 나의 자리가 있긴 했었나?”
“처음부터. 너를 위한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천마가 힘없이 웃었다.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그런 비참한 인생 따위.”
텅 빈 눈으로 중얼 거리던 천마가 진흙을 움켜쥐며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런 비참한 인생 따윈 살지 않았을 것을.”
천마가 엎드린 채 울었다.
그는 마치 그동안의 한을 모두 풀겠다는 듯 울고 있었다.
준혁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빗줄기가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나는 너의 주인이자, 너의 부모가 될 것이며, 너의 친구가 될 것이다.”
천마가 지친 얼굴을 들었다.
진이 빠지고 힘이 하나도 없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눈 안엔 작은 불씨가 있었다.
그것은 천마가 그동안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희망이라는 단어였다.
“너의 자리로 돌아와라. 천마, ……아니 청룡.”
[신수 계약을 요청했습니다.]
천마가 한층 감정이 가라앉은 얼굴로 시스템 문구를 보았다.
“그대를 따라가면, 진정 빛이 있는가?”
“물론.”
천마의 가슴에 큰 울림이 파문처럼 번졌다.
마치 과거의 스스로를 죽이듯이 천마, 아니 청룡이 음성을 뱉었다.
“그대가 나의 주인이 되는 걸 허락하지.”
눈부신 빛이 강렬하게 생성되어 그 빛은 준혁과 청룡을 연결했다.
[신수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청룡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대폭 상승합니다.]
[친밀도가 올랐습니다.]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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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
이름 : 청룡
호칭 : 천마
레벨 : 90
계열 : 내공.
힘 : 1200 체력 : 1500
민첩 : 2000 지능 : 500
지혜 : 800 카리스마 : 900
스킬 : 천마신공 7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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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에게 감화 효과가 적용됩니다.]
[귀환자 한준혁 님의 신성력이 100퍼센트 증가합니다.]
[백호령과 청룡의 컬렉션 효과의 적용으로 신성력이 +20퍼센트가 올랐습니다.]
[청룡의 신화가 주인의 몸에 깃듭니다.]
[암흑내성이 100퍼센트 강화되었습니다.]
멸마의 서에서 빛의 문자가 새로운 보상을 만들어 냈다.
[멸마의 서가 신물을 지급합니다.]
[협천의 팔찌를 획득했습니다.]
[협천의 팔찌]
: 청룡의 맹세가 깃든 물건이다.
착용 시 손상된 필멸자의 육체를 초당 5퍼센트 재생시킨다.
[멸마의 서를 통해 새로운 권능을 획득했습니다.]
[고유 권능 천사의 문장이 멸마의 서에 기록됩니다.]
멸마의 서, 빈 페이지에 새로운 그림이 불꽃처럼 새겨졌다.
[천사의 문장]
: 천사의 봉인이 풀렸으나 새로운 신화의 주인을 인정한다는 증표.
[멸마의 서 악마 소환 레벨이 3단계로 올랐습니다.]
[이제부터 총 150마리의 악마 소환이 가능해집니다.]
[현재까지 누적 신성력의 총합은 3천입니다.]
끝도 없이 나타나는 보상에 의해 준혁에게선 오색찬란한 빛이 쉴 틈 없이 번쩍였다.
천마가 놀란 얼굴로 그런 준혁을 보고 있자 그 시선에 준혁이 옅게 웃었다.
“천사들이 너와 나의 계약을 축하해 주는 거다.”
준혁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해월을 보았다.
“아직 못다 한 얘기가 있겠지.”
준혁의 시선을 따라, 천마의 시선이 해월에게 향했다.
“끝인사를 맺고 나면 넌 이제부터 천마가 아니야. 그러니 확실하게 매듭짓고 와라.”
해월을 통해 과거를 털어 내란 뜻이었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는바, 천마는 해월에게 걸어갔다.
천마가 해월에게 향하는 동안 빗줄기는 사라졌다.
소나기가 끝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천마는 묘한 기분이었다.
어째서인지 준혁과 계약을 마치고 나자 늘 화마로 가득했던 가슴이 편안했다.
꽉 막혀 있던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숨쉬기가 편했고 자유로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일까?
해월을 마주한 지금.
천마는 처음과는 전혀 다른 편안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