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88화
“마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더군요.”
해월이 흔들리는 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본디 무림인이라면 마교를 모를 리 없을 텐데. 당신은…….”
준혁은 답하지 않고 해월처럼 불을 보았다.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차라리 해월이 알아서 생각하도록 두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일 테니.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단지, 모른다면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준혁이 해월을 보았다.
그녀는 마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마교를 설명하기 위해 한 이름을 말했다.
“천마.”
해월의 설명에 의하면 마교의 주인이 바로 천마이자 청룡이었고 신화 속의 신수였다.
“처음 신수를 모시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하나둘 늘어감에 따라 마교가 생겨났고, 그 세력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갔죠.”
해월이 지나간 시절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흔히 명문 정파라 불리우던 무림인들은, 범죄자들이 마교로 들어가 힘을 키우는 걸 탐탁지 않아 했어요. 결국 정파와 사파 간의 정사대전이라는 피바람이 불었답니다.”
“그럼 지금은?”
“두 집단 모두, 큰 피해를 입었어요. 승부는 나지 않았으니 언젠가 다시 그 끔찍한 전쟁이 다시 시작될지도 몰라요.”
해월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단 한 존재를 걱정하는 듯했다.
“비록 전쟁에 의해 약해진 상태라 할지라도 그들은 무려 마교. 혼자서 그들을 상대로 천마에게 이르기까지. 그건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 하더라도 불가능해요.”
준혁은 불빛의 그림자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이유를 부여하다 보면 해야 할 일은 못 하는 법이죠. 그러는 해월 당신은 애초에 불가능한 이 길을, 왜 함께 가고자 한 겁니까?”
“단 한 번만이라도.”
해월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해월이 고개를 들어 준혁을 보았다.
“전 그걸로 충분해요.”
“그럼 왜 그동안 찾아가지 않았죠?”
해월이 쓰게 웃었다.
“용기가 없었으니까요. 어쩌면 지금은 자포자기한 걸지도.”
침묵 사이로 타닥타닥 나무가 타는 소리가 났다.
신수라고 해서 백호령처럼 잠들어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로부터 신성히 보호받았던 백호와는 다르게 청룡은 지독한 과거를 보내왔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청룡의 과거는 달랐을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라, 어차피 의미 없는 생각이었으나. 그럼에도 작은 아쉬움이 가슴에 머물러 떠나질 않았다.
“과거는 바꿀 수 없더라도 미래는 바꿀 수가 있으니까.”
준혁의 말에 해월이 얼굴을 들었다.
“슬슬 출발하죠. 충분히 쉬었습니다.”
준혁이 해월을 휙 안아 들었다.
“예, 예고 좀 하고 안으라고요!”
해월이 당황하여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지만 준혁은 무시하고 신형을 날렸다.
바람을 찢고 가르는 움직임으로 준혁은 해월과 함께 험난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천리안의 지도에 의하면, 천마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 * *
천마는 나른한 표정으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상처와 내공의 회복에 좋은 약재들이 물속에 녹아 있었다.
이제 약 열일곱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천마의 몸에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그는 찢겨져 나간 흉터로 가득한, 물기 어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정파 놈들을 쓸어버리기까지 코앞이었는데.”
천마의 두 눈이 서릿발처럼 변했고, 근처에서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던 여인들은 그 기운을 느끼고 온몸을 벌벌 떨었다.
천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시비(侍婢)들이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자들은, 망설임 없이 도륙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체가 태워졌으니 그 소문은 자연히 시비들의 귀에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흐흐흑!”
누군가 우는 소리를 냈다.
오늘 처음 시중을 들게 된 어린 시비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그럼에도 손 밖으로 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물 안에서 몸을 회복 중이던 천마가 몸을 일으켰다.
시비 중 하나가 빈틈없는 상처로 가득한 천마의 상체에 옷을 걸쳐 주었다.
천마는 우는 소리를 찾아 천천히 움직였다.
물 밖으로 나와 물기를 떨어트리며 이동하는 동안 우는 소리는 점차 커졌고 시비들은 두려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윽고 천마가 젊은 시비 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몸은 더 심하게 떨릴 뿐이었다.
천마가 고개를 젖혀 시비를 보며 작게 웃었다.
“무서우냐?”
나직한 목소리에 시비가 손을 벌벌 떨었다.
“내가 무서우냐 물었다.”
“흐, 흐흑! 아, 아닙니다. 흐흑! 죄송합니다, 교주님.”
주변의 동료 시비들이 눈치를 살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천마는 축축하게 젖은 듯한 눈으로 시비를 보았다.
“사람을 죽이거나 관군에 쫓기는 자들이 마교를 찾는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살기 위해 들어온 자들을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일을 주고.”
천마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씩 커졌다.
“누울 자리를 만들어 주었지.”
울음소리는 멎었으나 여전히 새로 온 시비는 격하게 몸을 떨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두려워하느냐? 너는 은혜 따윈 모르는 채.”
천마의 눈이 검게 가라앉았다.
“오직 스스로의 안위만을 위하여 사지로 들어온 여우와 다를 바가 무엇이냐?”
천마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나 있었다.
“너는 나의 마음을 오직 광기의 권위로만 보고 있었나 보구나.”
천마가 다른 시비들을 훑어보았다.
“너희들도 그러하냐.”
천마의 그 말이 떨어지자 시비가 쿵 소리 나게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교주님. 교주님에게 죽을 수 있다면, 이는 천명일 것이옵니다. 죽을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교주님.”
시비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천마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시비를 내려다볼 때, 문 앞으로 그림자가 생겼다.
- 교주님. 정체 모를 외부인이 마교의 교단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신원을 파악하진 못했으나 최소 절정 고수 이상으로 보입니다. 마교의 무인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부하의 전음에 천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기운을 회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무려 마교의 고수들이었다.
그런 고수들이 단 한 명에게 뚫렸다는 건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천마는 차가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준혁은 되도록 칼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강한 고수들이 만연한 탓에, 해월을 지키며 그들을 쓰러트리기엔 어쩔 수 없이 칼을 들어야 했다.
준혁은 피를 흘리며 어떻게든 뒤쫓아 오려는 고수들을 등에 단 채, 천마가 머무르는 천마궁 앞에 도착했다.
헬바인의 장검.
그 칼날에는, 무수한 고수들의 피가 묻어 있었고 핏물은 여전히 온기를 가진 채 땅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천마교주를 만하고 싶다고 분명히 뜻을 전하였으나, 그들은 신수의 주인이란 말에 하나같이 무력행사부터 시전했다.
그런 탓에 마교 고수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크하아압!”
뒤에서 덮쳐 온 고수의 명치를 팔꿈치로 치고, 팔을 꺾었다.
우드득!
이미 진행되었던 출혈량에 의해 체력이 소진되어 있던 고수가 의식을 잃으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때, 천마궁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은 앳된 외모의 사내였다.
질끈 묶은 푸른빛의 긴 머리.
검은 용포를 입고 긴 창을 오른손에 쥔 채, 맨발로 천마궁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신수이자 청룡이었고, 천마이기도 한 자.
그였다.
“한 번을 쉽게 만나는 일이 없군.”
준혁이 천마를 보고 짧게 한숨 쉬었다.
처음 백호를 만나러 갈 때도 그랬지만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 때문에 참 쉽지가 않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천마가 준혁에게 걸어가며 턱을 들고 말했다.
아직은 다 자라지 않은 체구를 가진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마의 눈빛은, 수 없는 죽음을 지나온 준혁보다도 탁하고 어두웠다.
“영웅이 되고자 은둔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인가?”
비웃음을 입가에 걸며 준혁을 향해 걷던 천마의 걸음이 멈춘 건 그의 시선이 해월에게 향했을 때였다.
“……해월.”
걸음을 멈춘 천마가 다소 놀란 눈으로 해월을 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린 해월은 슬픈 눈동자에 천마를 담아, 작게 미소 짓고 있었다.
“네가 왜?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지?”
천마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네가 어떻게 나를 만나러 올 수 있느냐 물었다.”
아직 둘 사이의 과거를 몰랐던 준혁은 검지로 뒷목을 긁적였다.
“저자가 너의 낭군이라도 되는 것이냐?”
천마의 서슬 퍼런 눈빛이 준혁에게로 향했다.
어쩐지 사랑싸움 사이에 낀 것만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
신수의 사랑이라니.
“해월, 저자를 죽인 다음. 너 역시 내 손으로 죽여 주마.”
준혁이 우선은 물러나 있으라고 눈짓했다.
해월은 죄지은 사람처럼 처연하게 준혁과 천마 사이로부터 멀어졌다.
그 사이 천마의 시선은 오직 준혁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찢어 버릴 듯이 천마에게서는 엄청난 힘이 휘몰아쳤다.
천마가 준혁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을 때 다시금 천마의 걸음이 멈췄다.
준혁의 등 뒤로, 마교의 고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엄청난 수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준혁을 잡기 위해,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천마궁으로 향한 것이다.
마교의 고수들이 준혁을 둘러싸자 천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준혁을 응시했다.
“그대는…… 단 한 명도 해치지 않고, 천마궁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죽이지 않고 쓰러트리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무려 마교의 고수들을 상대로 단신으로 그들을 통제했다는 말이니 이는 훨씬 더 고강한 무공을 가졌음을 의미했다.
이에 준혁을 보는 천마의 눈빛이 달라졌다.
순수한 감탄이 천마의 두 눈에 새겨지고 있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 화경의 고수로군.”
천마의 이채를 띤 눈으로 준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 자리를 비워라.”
천마의 명령에 마교의 무림인들은 곧장 천마궁 앞에서 사라졌다.
천마궁의 마당.
그곳엔 준혁과 천마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둘 사이를 설명이라도 하듯이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마교에 발을 붙여 놓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면 순전히 날 만나러 왔다는 건데. 너 정도 고수라면 궁금하긴 하네. 왜 나를 찾았는지.”
“내가 너의 주인이 될 생각이거든.”
천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인?”
준혁이 확신을 가진 얼굴로, 천마를 향해 뜻을 밝혔다.
“그래. 네 주인.”
“하하하하하하!”
천마가 고개를 젖혀 웃었다.
하늘을 향해 그의 웃음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크크크큭…….”
천마는 눈물마저 흘리며 웃었다.
“천마의 주인이라. 내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봐서 말이야. 대체 얼마 만에 웃는 건지 모르겠군. 기억도 나질 않는군.”
천마는 준혁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 점차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만약 내 주인이 된다면, 그대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건가? 이 자리가 탐이 나나?”
천마가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채로 물었다.
“신을 죽일 생각이다.”
준혁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