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87화
“참으로 아름다운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마치 동화를 읽는 듯 말했지만 실존하는 과거를 말하듯 슬픔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그 아이는 새외에서 태어났으나 부모가 없었다. 정처 없이 떠돌던 아이는 남만에 이르러 위험에 처한 한 부부를 발견했고. 그 부부를 도와주었다. 놀랍고 신비로운 힘이었다. 아이에게 도움을 받은 부부는 사는 곳으로 돌아가 포정사에 고하니. 괴물이 나타났다 하였다.”
해월이 담담히 고전 이야기를 읊듯 말을 이었다.
“포정사 도지휘사가 조사에 나섰고 아이를 잡아 왔다. 하여 한 관료가 아이에게 말했다. 그 괴물 같은 힘을 보여다오.”
해월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아이는 순수하게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냈다. 한 마리의 아주 작은 용이 되어, 뇌전을 뿌리니.”
이윽고 해월의 눈에서 허망함이 묻어났다.
“관료들이 아연실색하여 괴물을 처치하라 명하니. 아이가 놀라 달아났다. 그들은 끝까지 아이를 쫓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해월의 눈에는 점차 작은 분노까지 어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아이를 잊은 듯하였으나. 아이의 존재를 눈치챈 한 여인의 고발에 의해 다시 지독한 추적에 이르니. 아이는 원대로 죽어 줄 테니 자기 사람들만은 살려 달라 애원했다.”
준혁은 해월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 관료들은 불씨를 살려 두지 않겠노라 외치니. 아이는 눈물을 멈추었고. 모든 남만지대 생명의 씨가 남지 않았다. 아이가 사라진 후 남만은 지옥처럼 변하였다. 독충들이 득실대고, 하늘이 굳어 기근이 끊이지 않았으며 풍토병이 만연하여 영원한 죽음으로 가득하였다.”
해월의 눈은 어느새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인간의 죄악이라 일컬으며 괴물이라 불렀던 아이를 신수 ‘청룡’이라 칭하였다.”
해월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준혁을 응시했다.
“이것이, 남만의 신화입니다.”
“만난 적이 있나 보군요.”
해월이 깜짝 놀랐다.
“나는 신수의 주인이니, 그 아이가 있는 곳을 알려 주십시오.”
“……신수의 주인? 감히 그대가 스스로를 신수의 주인이라 칭했나요?”
해월에게서 스산한 기운이 올라왔으나 준혁은 굴하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준혁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 온 해월은 그 눈빛만으로도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해월이 혼란으로 뒤섞인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곤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당신이 신수의 주인이라면, 그분은 어찌 되는 걸까요?”
“나와 함께 갈 겁니다. 어둠이 아닌 빛이 있는 세상으로.”
“당신에게 정말 그럴 자격이 있는 걸까요?”
“물론.”
“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는데. 잘됐네요.”
“……?”
해월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함께 가겠어요.”
“그럼 하오문은…….”
“하오문의 문주는 하나가 아니랍니다.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 온 이유이지요.”
준혁으로썬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 *
신수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혁은 해월과 함께 기루를 나섰다.
“마차를 부르는 동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거리가 어느 정도입니까?”
“마차로 사흘 정도 되는 거리이니 그리 멀지는…….”
“마차는 너무 느립니다.”
해월이 준혁의 의도를 눈치챘다.
“절정 고수이시니, 괜히 저 때문에 지체되시겠군요.”
“안고 갑시다.”
“……?”
준혁이 양팔로 해월을 안아 들었다.
해월의 얼굴이 붉어졌고 지나가던 기루 사람들이 기겁했다.
그동안 해월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쪽도 반드시 만나고 싶은 거 아닙니까? 청룡을.”
해월이 빨개진 얼굴로 말을 삼켰다.
“마차는 너무 느리니 속도를 올리는 수밖에.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해월이 품 안에서 두루마리 지도를 꺼냈다.
준혁은 해월을 안아 든 채로, 섭물의 힘으로 지도를 허공에 띄웠다.
두루마리가 휙 펴지며 지도가 드러났다.
[천리안이 지도를 저장했습니다.]
[천리안으로 지도를 펼치겠습니까?]
‘이런 것도 되는군.’
준혁이 천리안의 힘을 사용하자 곧바로 반투명한 지도창이 나타났다.
준혁은 지도를 돌려주고 자세를 낮추었다.
“꽉 잡으세요.”
해월이 침을 꼴깍 삼키며 준혁의 옷깃을 힘주어 잡았다.
쾅-!
바닥이 깨지면서, 준혁이 신형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구름에 닿을 듯이 솟아오른 준혁이 마력의 장막을 만들어 그것을 지면 삼아 밟았다.
천리안의 지도가 보여 주는 방향을 향해, 준혁이 질풍처럼 쇄도했다.
* * *
‘맙소사.’
해월은 경악했다.
절정 고수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신기에 가까운 신법을 쓸 줄은 몰라서였다.
그 어떤 무림인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 하늘에서 신법을 펼친단 말인가?
처음 그가 신수의 주인이라 했을 때, 해월은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신법을 쓰는 자라면, 정말 신수 청룡과 뭔가가 이어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탓!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내려와 지면을 밟았다.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
마치 바람을 깨부수고, 공간을 찢을 것만 같은 질주였다.
순식간에 목적지의 절반가량에 이르렀을 무렵.
“하하하하하하하!”
숲길을 뒤흔드는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준혁은 살기를 감지하고 속도를 줄였다.
파르륵!
긴 백발의 사내가 마치 팽이처럼 회전하더니 가부좌를 틀며 앉았다.
긴 백발과 지나칠 정도로 말라 보이는 체형이 인상적인 사내가 이죽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 준혁을 응시했다.
그런 그의 등 뒤로 두 명의 사내가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한 명은 마치 울버린처럼 손등 쪽에 세 개의 칼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은 무식할 정도로 넓고 커다란 칼을 든 장한의 사내였다.
무기를 들고 있는 무인들에 비해 백발의 마른 사내는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여인을 안고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지 모르겠으나 길을 잘못 들었으니 이를 어쩌면 좋아?”
부채로 입을 가린 긴 백발의 사내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준혁은 그들을 보며 품에 안고 있던 해월을 내려놓았다.
“뭐냐, 너희들은?”
준혁이 묻자.
“하하하하하하하!”
세 명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나무가 흔들리고, 땅이 흔들리는 웃음.
마력, 아니 이곳에서는 내공이라 부르는 힘이 그 웃음소리에 담겨 있었다.
해월은 그 웃음에 잠시 비틀거렸으나 준혁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대단한 신법이긴 했지만, 그 신법만으로 여기 우리 삼강난추를 지날 수는 없을 것이다. 네놈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감히 허락도 없이 이 땅을 밟아? 죽음이 두렵지 않나 보구나.”
삼강난추라는 말에 해월이 얼굴이 굳어졌다.
“삼강난추…… 마교의 문지기들로서 상당한 고수예요.”
“하하하하! 감히 우리를 겨우 상당한 고수 정도로 치부하다니. 누가 보면 너희들이 절정 고수라도 되는 줄 알겠구나.”
“마교라는 교단과 신수가 연결되어 있는 겁니까?”
준혁이 묻자, 해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라는 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긴 백발 사내가 380도로 몸을 회전시키며 일어섰다.
“신수를 입에 담아? 정녕 너희들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산 채로 껍질을 벗겨 불에 익혀 주지.”
백발 사내의 눈에 분노가 들끓었다.
“우선 그 입부터 도려내 주마!”
손등에 세 개의 칼을 달고 있는 사내가 먼저 준혁에게 뛰어들었다.
신법을 밟아 이동한 삼강난추 중 하나가 갈고리를 닮은 세 개의 칼날을 내질렀다.
준혁은 마력으로 그를 둔화시켜, 신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손등에 칼을 찬 그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콰드득!
뼈마디가 어긋나더니 뼈가 부러짐과 함께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준혁은 그의 팔을 잡은 채로 남은 두 명을 보았다.
그들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더니, 동시에 준혁에게 공격에 들어갔다.
“네놈! 사술을 부리는구나!”
팔을 잡고 있던 녀석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킨 후, 준혁은 신법을 밟고 허공을 날아오는 두 명에게 섭물의 힘을 사용했다.
신법이 뒤엉키면서, 두 무림인이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며 날아왔다.
준혁은 그대로 마력을 제어했다.
콰직-! 콰드득!
두 사내가 팔다리가 뒤틀리며 준혁과 해월을 지나 바닥과 나무에 곤두박질쳤다.
“대, 대체 어떻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긴 백발의 사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준혁을 돌아보며 입 밖으로 피를 뿜었다.
만약 저들이 말하는 절정 고수가 마나의 길을 볼 수 있다면 통하지 않을 기술이다.
신체가 아닌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 마력으로 그들의 뼈마디를 부수는 것이니까.
하지만 마나의 길을 볼 수 있는 자라면, 이 공격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나.
마나의 길을 볼 수 없는 평범한 무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힘이었다.
그래서일까?
해월도 얼굴에서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절정 고수…… 아니, 화경의 고수라도 된단 말인가?”
준혁은 시끄럽다는 듯 그들의 뒷목을 탁탁 때려서 기절시켰다.
“다시 출발하죠.”
준혁이 손을 털면서 해월에게 돌아갔다.
“왜 죽이지 않는 것이죠?”
해월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준혁을 빤히 보았다.
준혁은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 삼강난추를 보며 허리에 손을 짚었다.
“말했다시피 난 신수의 주인. 저들은 신수를 지키는 사람들 같던데.”
준혁이 해월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닙니까?”
해월이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길로 준혁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맞아요.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얼굴이 안 좋은데. 걸으면서 머리 좀 식히세요.”
해월이 앞서 걸어가는 준혁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대체 어떻게 손을 쓰지도 않고, 삼강난추를 제압할 수 있었던 거죠?”
“마력, 아마 여기선 내공이라고 부르겠죠?”
“…….”
“그런 것들을 몸 안이 아니라. 외부로 통제할 수 있게 되면 가능해집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니 상대하는 자들로써는 꽤 까다롭겠죠.”
“그런 무공의 비밀을 저에게 그렇게 쉽게 알려 주셔도 되는 건가요?”
“묻지 않았습니까?”
“무, 묻긴 했지만 그 정도의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어요. 보통 무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이니까요.”
준혁이 픽 웃었다.
“상관없어요. 진짜 힘은 그런 게 아니니까.”
해월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방금 전에 보여 준 힘만 해도 초절정 고수 같았건만, 그조차 진짜 힘이 아니라니?
한계가 상상조차 되지 않는 남자였다.
* * *
목적지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해월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길을 세웠다.
지도상 이제 곧 코앞에 이르렀으니 들어가기 전 잠시 쉬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해가 지고 어두운 밤.
나무 몇 개를 꺾어 오자 해월이 직접 불을 피웠다.
회색 가루를 뿌리고 부싯돌을 치자 불은 쉽게 잘 붙었다.
능숙한 솜씨였다.
준혁과 해월은 의자로 쓸 만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활활 피어오르는 불이 준혁과 해월의 얼굴을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