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82화
검은 연기의, 얼굴 형태 쪽에서 유령처럼 새파란 눈이 빛났다.
로건은 검을 쥔 채 마수를 응시했다.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추며 각오를 굳혔다.
헌터들의 공격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상대.
죽음을 각오하고, 검에 마력을 주입했다.
비록 현장에서 은퇴한 헌터라고는 해도 협회장의 자리까지 오른 만큼 리더보더에 거의 준하는 실력을 가진 로건이었다.
결사 항전을 가슴에 새기며 곧 시작될 격돌을 준비하던 로건의 눈이 커졌다.
검은 연기의 마수가 하늘로 솟구친 것이다.
로건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구름을 뚫을 듯이 솟아오르는 마수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현장을 벗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보좌관. 리더보더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긴급 재난 상황을 선포하라고 해.”
“예, 협회장님.”
보좌관이 스마트폰을 들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일 때, 로건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하늘을 보았다.
하늘 위로 검은 구름처럼 변해 버린 마수가 뇌전을 뿌리고 있었다.
언제 시민들을 공격할지 알 수 없는 상황.
로건을 이를 갈며 칼자루를 꽉 쥐었다.
반드시 놈을, 미국의 위기로부터 막아 내야 했다.
* * *
검은 연기의 마수는 구름 속에서 지상을 내려다봤다.
안광에서 흉흉한 푸른빛이 지상을 샅샅이 훑었다.
마수의 눈은 사냥감을 찾듯이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강한 자아…… 강인한 육체.”
마치 레이더를 보듯이 지상을 훑던 마수가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수가 이동하여 지나가는 자리마다, 꽃이나 풀들이 시들었다.
* * *
[균열의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균열의 틈에 칼을 꽂아 넣자 어비스의 문을 넘을 수 있는 조각을 얻을 수 있었다.
이로써 새로운 신수를 만나러 갈 수 있는 준비가 완성되었다.
준혁은 즉시 엑시트 게이트를 찾아 던전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던전 밖으로 나오자 게이트 입구 부근엔 마수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왕혼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던전 밖으로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준혁의 물음에 현장을 수습하고 있던 헌터 한 명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미국의 협회장 로건은 긴급 재난 상황의 대책 마련을 위해 이미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현장을 빠르게 벗어났어.’
준혁은 던전 게이트 주변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지?’
던전 부근을 지켰던 헌터들의 수준을 고려하면 마수에게 있어 그들은 손쉬운 사냥감이었을 것이다.
현장을 지킨 건, 협회장과 간부들을 제외하면 높은 전력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마수는 그들을 공격하기보단 현장을 벗어나는 걸 선택했다.
마왕혼도 그렇고, 이래서야 분명한 목적이 있어 보인다.
아직 그 이유와 마수의 위치는 찾아내지 못한 듯 보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작정 놈을 찾아다니는 것도 조금 그렇고.’
준혁은 걸음을 옮기며 큐브에 저장해 놓은 균열의 조각과 균열의 열쇠를 융합했다.
[어비스에 진입할 자격을 확인합니다.]
[아직 어비스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어비스의 문이 완성될 때까지 약 100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비스의 문이 완성되면 창조의 파편이 추가 생성됩니다.]
[균열의 열쇠로 어비스의 문을 열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
이번에도 역시 같은 문구가 나타난다.
준혁은 수락을 터치하면서 창조의 파편이라는 글자를 응시했다.
어비스의 문을 통해 수호성으로 갔을 때, 창조의 파편에 대한 힌트나 흔적에 대해선 얻은 것이 없었다.
“귀환자님.”
옆을 보자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협회 간부 브라운입니다.”
준혁이 짧은 목례로 인사에 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던전에서 유출된 마수 문제로 협회장님께서 협조 요청을 해서요. 가능하시면 지금 협회로 이동을.”
“마수의 위치. 찾았습니까?”
“네? 그건 아직입니다.”
‘이상하다. 왜 종적을 감춘 거지?’
준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협회 간부를 보았다.
“미국 협회장, 아니 미국은 유출된 마수를 처치할 능력이 없는 겁니까?”
“네? 아…… 그건 저로서는 답변해 드리기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협회장님이 얘기해 주실 겁니다.”
“우선은 미국 쪽에서 최선을 다해 유출된 마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세요. 한국의 한선우 협회장과 협의는 그 다음의 문제라고 전하시고.”
“귀, 귀환자님.”
“그 유출된 마수 때문에 시일을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은 그 정도의 치안 능력도 없는 겁니까?”
준혁이 무책임한 수준에, 실망감을 드러내고 자리를 떠났다.
협회 간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일단 보고를 위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 준혁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량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마수라면 그건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된다.
우선은 어비스의 문이 열릴 순간을 준비해야 했다.
일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중 전화가 걸려 왔다.
간부가 소식을 전한 건지 미국 협회장 로건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마트폰을 귀에 붙였다.
- 로건입니다. 너무 급박한 상황이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귀환자님.
미국의 우두머리 격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쉽게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
하긴 모두 유럽연합 대표인 지오반니처럼 한심할 리는 없었다.
- 말씀하신 대로 우선 저희 미국 측에서 대응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만약 돌발 변수가 생긴다면, 그때, 한선우 협회장에게 연락을 넣겠습니다. 이번 던전 레이드 요청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귀환자님.
“연기 형태의 마수는 인간의 육체를 빼앗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알고 계시죠?”
- 네 물론입니다. 사례가 많으니까요. 그에 맞춰 최선을 대응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번 블랙 던전의 레이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귀환자님.
“블랙 던전은 완전히 클리어되었으니 유출된 마수를 제외하면 문제는 없을 겁니다. 수고하십시오.”
전화를 끊고 준혁은 짧은 한숨을 입 밖으로 뱉었다.
마왕혼의 육체에서 만들어진 마수가,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는 시간을 두고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 * *
“백호야~”
매니저 지우가 손을 동그랗게 말아 입에 대면서 신수를 불렀다.
캐슬 곳곳을 찾아다녔지만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백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메이드 직원들도 백호를 보지 못했다며 하나같이 얼굴을 가로저었다.
“설마 캐슬 정원 밖으로 나간 건 아니겠지?”
그건 대형사고였다.
넓은 캐슬의 정원도 정원이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 캐슬 밖 도심으로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큰일 났네.”
지우는 눈물을 글썽이며 거실을 가로질러 통유리문 앞에 바짝 붙었다.
만약 백호가 길을 잃고 캐슬 정원에서 헤매고 있거나 캐슬을 빠져나갔다면? 그건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은 엄청난 공포였다.
통유리 창문 너머 캐슬 정원을 훑어보던 지우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어?’
지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한쪽 방향을 응시했다.
그곳엔 캐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특이한 뭔가가 있었다.
지우는 문을 열고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웬 아이가 바로 앞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하얀 한복 같은 풍성한 옷을 입고 있다.
“……저기, 안녕?”
지우가 의아하게 쳐다보며 인사를 건네자 아이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지우는 그렇게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귀여워!’
아이의 얼굴을 보고 지우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그 어떠한 인형도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오디션장에 내어놓으면 어떠한 누구라도 재능과 관계없이 얼굴 자체가 재능이라며 납치할 것만 같은 인형 그 자체였다.
“……넌 누구니?”
지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커다란 눈망울로 지우를 올려다보던 아이가 “헤헤.” 하고 웃었다.
그저 천사처럼 웃기만 하는 걸 보고 지우는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어떻게 여기 있어? 부모님은?”
지우가 묻자 아이는 웃는 얼굴로 지우의 뺨을 손으로 슥슥 문질렀다.
‘말을 못 하나?’
지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는 장난을 치듯 지우의 뺨을 조물딱거렸다.
“참 예쁘기도 하지.”
지우가 말 없는 아이를 볼 때.
“매니저님.”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메아리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집사가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집사가 이 아이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헉! 헉……!”
무릎을 붙잡고 숨을 내쉬는 집사를 보며 지우는 작게 웃었다.
“체력 관리 좀 하셔야겠어요, 집사님.”
“헉! 헉!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왜 그렇게 급하게 뛰어오셨어요?”
“백호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전해 들어서요. 너무 놀랐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 백호를 찾았어요?!”
지우가 소리치듯 물었다.
“예?”
집사가 황당하다는 듯 지우를 보았다.
“다행이라고 하셨잖아요. 백호를 찾았다는 얘기 아니세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지금 매니저님 뒤에 있잖아요.”
지우는 집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방금 전 아이를 만났던 기억이 지우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지우는 소름이 돋았다.
‘그 아이가 백호라고?’
지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홱 돌아봤다.
그곳엔 백호가 있었다.
“크옹.”
백호가 지우의 다리에 가분수의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지우는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형 같은 외모의 어린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매니저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집사가 걱정이 담긴 눈길로 지우를 보며 물었다.
“아, 아니에요.”
지우는 여전히 정신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크오옹.”
백호는 따사로운 햇빛이 기분 좋은 듯 잔디밭에 발랑 누워 있었다.
지우는 넋이 나간 듯 백호를 보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헛것을 본 걸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는데?’
지우는 머릿속에 천둥이 치는 듯했다.
믿을 수 없는 미스터리한 백호의 변화 때문이었다.
“그리고 매니저님, 지금 귀환자님께서 귀국 중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밤쯤이면 도착하시겠네요.”
집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습니다.”
지우는 백호를 품에 안아 들고, 집사와 함께 캐슬 본관을 향해 걸었다.
“제가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백호를 잃어버려서요. 아무래도 집사님까지 같이 집중 케어를 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문을 열고 어떻게 나간 건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도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 불찰인걸요.”
지우는 다시금 머릿속에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백호가 떠올랐다.
사람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게 맞다면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말이 됐다.
지우는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얌전히 품에 안겨 있는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넌 대체 정체가 뭐니?”
지우가 등을 쓰다듬자 백호가 기분 좋은 듯 갸르릉거렸다.
지우는 픽 웃었다.
‘귀환자님이 돌아오시면 한번 말씀을 드려 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