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77화
클리어 막바지에 가까워진 시점 그들은 체력이 빠졌고 이제 곧 만나게 될 보스몹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으로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미국이 저 정도라면 다른 나라들은 훨씬 더 힘든 상황을 마주하게 될 거야.”
선우가 굳은 얼굴로 더 월드 화면을 보며 말했다.
팔짱을 끼고서 화면을 지켜보던 준혁은 메이드가 가져다준 커피를 받고 인사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준혁은 커피를 마시면서 더 월드 라이브를 감상했다. 이번 라이브는 준혁이 했던 것처럼 한 개인이 스트리밍을 하는 것이 아닌 집단 체제의 라이브였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다.
이번 레이드 팀에 대해 중계하는 방송 프로그램도 없었다.
오직 그들의 승리를 기원하며 역사를 기록하고자 진행되는 라이브였다.
준혁의 더 월드와는 전혀 결이 다른 진지함이 묻어나 있었다.
“이제 거의 레이드 막바지야. 형은 어떻게 봐? 미국 팀이 레이드에 성공할까?”
준혁은 바로 답하지 않고, 더 월드를 통해 보이는 헌터들을 보았다.
그리고 조금 뒤늦게 준혁의 입이 열렸다.
“잘 모르겠어. 하지만…….”
더 월드 라이브의 화면 속 헌터들의 비장한 얼굴들을 보며 준혁이 말을 이었다.
“그들이 이겼으면 좋겠다.”
준혁이 순수한 바람으로 말했다.
선우는 동의한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나도 그래.”
준혁과 선우의 마음은 같았으나 더 월드를 통해 비춰지는 헌터들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사상자는 늘었고 부상자들은 팀과 함께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했다.
벌써 힐러들도 마력이 소진된 듯, 치유 능력이 힘을 쓰지 못했다.
시간이 더 필요 했지만 마수들이 헌터들의 사정 같은 걸 봐줄 리 없었다.
오직 본능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게 던전의 마수들이었다.
“이대로 블랙 던전이 추가로 생겨나기 시작한다면 리더보더를 보유한 나라에서도 헬퍼 요청이 들어올 거야.”
선우가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블랙 던전으로부터 가장 안전해질 수 있는 방법. 그건 곧 귀환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자국 내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재앙을 극복하는 것이 헌터의 시대에서 최선의 국익이겠지만 미국조차 고전할 정도라면 상황이 달랐다.
국격과 국가의 발전을 논하기 이전에 안전과 헌터의 숫자를 지키고 미래를 도모할 수밖에.
“만약 형에게 헬퍼를 요청한다면 형은 받아들이겠지?”
“당연히.”
준혁이 일언지하로 답했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였다.
“블랙 던전까지 솔플을 할 생각이야?”
선우의 얼굴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상위 순위의 리더보더조차 고전하는 던전이라면,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했다.
“나 혼자면 충분해.”
상위 순위의 리더보더가 이끄는 레이드 팀이 고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월드 라이브를 보는 준혁의 표정은 마치 그저 늘 일상적으로 보는 TV 채널을 보는 듯이 평온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언제든 블랙 던전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 * *
제임스와 마크는 거대한 바위에 기대어 있었다.
그들은 상처투성이였고 얼굴은 지쳐 있었다.
둘은 저마다 빈 허공을 보고 있었다.
멍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땅은 물기가 있어 질척거리는 진흙이었다.
동료의 피 냄새가 은은히 났고 마수들의 썩은 악취가 코를 찔렀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마크가 힘없이 물었다.
“……괜찮겠냐?”
“…….”
짤막한 대화 후, 다시 침묵이 내려 앉았다.
멀리서 마수가 우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마크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마치 지옥을 연상하게 한다.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했다.
그 구름은 붉은 조명을 몸에 입고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곧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꺼림칙한 모양새였다.
“던전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리더보더 순위에 오르고 나서부터는 꽤 낯설어졌어. 그리고 지금은 잊고 있었던 감각이 깨어나네.”
제임스가 웃었다.
“무섭냐?”
“무섭다기보단 뭐랄까? 맞아, 참 개 같은 곳이었지 하고…… 현실을 깨닫게 되는 그런 느낌이라면 이해 가? 제임스?”
“지랄.”
마크가 낄낄 웃었다.
“다 죽었어, 우리 둘 빼고 모두.”
제임스의 말에 웃던 마크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말했잖아. 원래 여긴 엿 같은 곳이라고. 잊고 있었을 뿐이지. 언젠가부턴 던전은 돈이 되는 사업이 됐잖아. 리스크가 큰 만큼 수익도 큰 사업.”
마크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헌터의 사체를 보았다.
“저 친구는 상상도 못 했을 거야.”
마크의 말에 제임스의 시선이 마크를 따라갔다.
헌터 한 명이 팔 하나를 잃은 채 엎어져 있었다.
“오늘 이렇게 비극을 맞이할 거라곤 몰랐겠지. 젠장.”
“누구의 책임도 아니야.”
“귀환자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랐을까?”
마크가 죽은 헌터를 보며 말했다.
“마크, 여긴 여전히 던전 안이고. 우린 나갈 거야. 재수 없게 다 포기한 사람처럼 굴지 마.”
“역시 철혈의 대검답구만.”
“입 다물고 준비해, 온다.”
땅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크도 제임스의 말을 듣고 즉각 긴장 상태로 바위에 바짝 붙었다.
진동이 조금씩 강해졌다.
“마력 상태는 어때?”
제임스가 바위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며 물었다.
“나쁘지 않아.”
“이제 진짜 거의 다 왔다. 끝이 보여, 마크.”
“그 말만 30번째야.”
제임스가 마수가 있다고 의심되는 방향을 보며 웃었다.
마크가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웃고 있는 제임스를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미친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냐?”
“리더보더도 별거 없군. 안 그래?”
마크는 성호를 긋고선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귀환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단했지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황제처럼 지냈으니 말이야.”
“그러니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았어야지.”
“오, 이 와중에 훈계라니.”
“그러니 살아서 나가. 남은 여생을 가치 있게 살 수 있도록.”
“젠장.”
“머더퍼커가 왔다. 셋 세면 뛰어.”
제임스가 바위에 뒤통수를 붙이며 말했다.
마크가 제임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셋, 둘…… 하나!”
신호를 받은 즉시 마크가 전력질주로 뛰었다.
마크가 약 10여 미터를 달렸을 때, 제임스가 등지고 있던 커다란 바위의 윗부분이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마수의 괴성이 고막을 터트릴 듯 커다랗게 울렸다.
제임스가 바위 밖으로 뛰자 바위 뒤에 있던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 개의 머리가 달린 키메라였다.
키메라 중에서도 보스임을 광고하기라도 하듯이 그 무게감이 그동안의 던전 속 마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공룡과도 같은 크기여서 어디서부터 베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젠장. 이 던전은 대체 왜 마수 따위가 갑옷 같은 걸 입고 있는 거냐고.”
머리는 뱀처럼 휘어지며 제임스를 노렸다. 몸통에는 맘모스처럼 긴 털이 치렁치렁하게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 몸통에는 갑옷처럼 보이는 단단한 뭔가가 입혀져 있었다.
때문에 목이나 머리를 노려야 했는데 키가 너무 높았다.
제임스가 손가락으로 사인을 던졌다.
즉시 마법부터 선제적으로 날리라는 신호였다.
제임스가 그 신호를 주기 전부터 마크는 이미 마법을 캐스팅 중이었다.
그의 입에서 마법의 언어가 흘러나오자 양 손바닥 사이로 마치 고압 전류처럼 스파크가 튀었다.
마크가 양팔을 치켜들자 키메라에게 전격을 품은 마력 에너지가 마치 벼락처럼 뿌려졌다.
그 공격에 키메라는 괴로운 듯이 뱀처럼 긴 세 개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사이 제임스는 대검을 들고 키메라를 향해 뛰어올랐다.
제 몸보다 무거워 보이는 대검을 휘둘러 키메라의 세 개의 머리 중 하나를 잘라 냈다.
쿠웅.
키메라의 머리가 마크의 바로 옆으로 날아와 떨어졌다.
“뭐야! 깜짝 놀랐네.”
마크가 한쪽 다리를 들며 화들짝 놀란 듯 소리 질렀다.
“집중해라 마크! 기회다!”
세 개 중 중앙 머리 하나가 잘려 나가자 키메라의 나머지 머리들이 분노한 듯 눈을 빛내며 마법을 일으켰다.
태풍 같은 바람이 불었는데, 그 바람에 의해 제임스와 마크의 갑옷에 금이 가고 살갗이 군데군데 찢어져 나갔다.
마치 수십 명이 칼을 휘두르는 듯했다.
뒤이어 땅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강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일반적인 불이 아닌 마력을 품은 불길이었다.
찢어지는 상처와 화상의 고통 속에서 제임스와 마크가 동시에 공격에 들어갔다.
마크가 마법을 일으키자 땅을 뭉개며 돌진한 마력이 한순간에 폭발을 터트리며, 빛의 창처럼 변해 키메라를 찔렀다.
몸통을 관통당한 키메라가 비틀거리다 중심을 잃고 쓰러졌을 때 제임스가 이를 악물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굵직한 검기를 품은 대검이 두 번의 칼질로 키메라의 남은 두 개의 머리를 잘라 냈다.
쿵. 쿵.
머리 세 개를 모두 잃었음에도 키메라는 죽지 않고 꿈틀거렸다.
“머더퍼커.”
제임스가 키메라의 몸통 쪽으로 가서 대검을 휘둘렀다.
까앙!
대체 뭘 붙여 놓은 건지 고출력의 마력이 담긴 검기조차 마수의 갑옷을 뚫지 못했다.
만약 처음부터 키가 높다는 이유로 몸통 쪽을 노렸다면 치명상을 입었을 게 틀림없었다.
까앙! 까앙! 까앙!
제임스가 마치 대장장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대검을 내리쳤다.
수십 번의 칼질 끝에 결국 갑옷을 깨트렸다.
제임스가 깨진 갑옷의 틈새로 대검을 밀어 넣었다.
이어 칼을 뽑자 뱃가죽이 찢어지면서 대량 출혈이 쏟아져 나왔다.
그 상태에도 불구하고 키메라는 꽤 오랫동안 꿈틀거리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키메라를 처치했습니다.]
[엑시트 게이트가 열립니다.]
제임스가 상체를 숙이며 숨을 몰아쉴 때.
“제임스! 엑시트 게이트가 열렸다!”
마크가 웃으며 소리쳤다.
기적 같은 소식이었지만 제임스는 눈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고선 입안에 고인 피를 뱉었다.
“퉤, 이상하지 않아?”
“뭐가?”
“엑시트 게이트가 열렸는데 어째서 던전이 클리어됐다는 메시지가 안 보이는 거지? 심지어 던전핵 파괴도 아직 못 했잖아.”
마크도 이상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남은 마수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는 이상 엑시트 게이트는 열리지 않아.”
“그게 수상하다는 거다.”
마크가 제임스의 손을 보았다.
지나친 체력 손실로 손이 미세하지만 떨리고 있었다.
힘이 빠졌다는 거다.
“우선 입구에서 포지션 잡고 지원 요청 하자. 이대로 더 돌긴 힘들어.”
제임스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육안으로 확연히 보일 만큼 손이 떨렸다.
마치 마비된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제임스, 내 말 들어.”
마크가 독촉했다.
큐브가 비추는 빛의 반경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크는 그 빛 너머에 점철된 어둠을 보았다.
분명 엑시트 게이트는 열렸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저 어둠 속에서 마수가 나타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마크의 가슴속을 불쾌하게 긁어 냈다.
“마크.”
“걱정 마. 이 몸뚱이로 고집부릴 생각 없으니까.”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자.”
엑시트 게이트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오래 걸리지 않아 엑시트 게이트가 하늘을 향해 빛을 뿜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빠르게 뛰던 제임스가 속도를 냈다.
살짝 뒤처지던 마크는 뒤를 돌아봤다.
이미 어둠 속에 잠겨 버린 땅.
그곳에 함께 레이드를 하기 위해 들어온 헌터들의 죽음이 있었다.
마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제임스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속도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