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66화
서큐버스가 암호어를 말하자 서재의 문이 열렸다.
안을 보자 단순히 그저 넓은 서재인가 싶었지만, 서큐버스는 서재 안에 숨겨져 있는 벽장을 열어 숨겨 둔 또 다른 문을 찾아냈다.
서큐버스가 마법 암호가 걸려 있는 장치를 손쉽게 해제하고 문 아래로 연결된 지하로 가는 계단을 앞장서서 내려갔다.
준혁의 큐브가 준혁의 앞으로 빛을 비추자 서큐버스가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먼저 더 빨리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서큐버스를 따라 지하에 도착하자 석관으로 된 통로가 나타났다.
한 명이 서서 걸을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작은 통로였다.
그 통로를 걸어가면서 준혁은 벽을 보았다.
벽에는 수호 기사들의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벽화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그것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서큐버스가 날갯짓으로 문 앞으로 날아들어 손을 내밀었다.
서큐버스의 손이 벽에 닿자 벽에는 푸른빛의 마법진이 나타나 빛을 확 비추었다.
신수를 만나기 위해 인간계로 내려와 블루 던전부터, 레드를 지나 골든 던전까지. 그 과정을 거쳐 마침내 수호성에 당도했다.
그리고 지금, 준혁은 그동안 마치 죽어 있었던 것만 같던 심장이 거세게 고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열겠습니다. 지옥의 재앙이시여.”
서큐버스가 미소를 지으며 암호어를 말했다.
그러자 벽이 마치 잔상처럼 흔들리더니 석관의 문이 개방되었다.
돌이 긁히는 소리가 나면서 벽이 문이 되어 활짝 열린 것이다.
“재앙의 앞길에 화려한 낭만이 가득하기를.”
서큐버스가 웃음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석관에 혼자 남게 된 준혁.
문 너머의 홀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신비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랜턴이 꺼지지 않은 불꽃으로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벽에는 천사의 문자가 마치 도배되어 있다시피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
단상 위로는 마치 관짝처럼 커다란 얼음이 있었다.
‘신수.’
얼음 안에는 12세 정도로 보이는 청초한 외모의 소년이 눈을 감고 있었다.
소년이 입고 있는 한복 같은 옷에는 천사를 연상하게 하는 구름 같은 느낌이 디자인되어 있었다.
머리는 흑발이었고 눈은 붉은 적안이다.
인형 같은 외모라는 것만 빼면 그저 평범하게 어린 소년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준혁은 뒤늦게, 서큐버스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엉덩이 아래로 인간은 가질 수 없는, 꼬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신수는 백호구나.’
준혁이 꼬리의 줄무늬를 보며 천천히 얼음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바닥을 통해 흘러나온 마력은 소년을 감싸고 있는 얼음에 전해졌고 그 마력의 파문이 펼쳐졌다.
그 순간 촤악! 하고 단숨에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 사방으로 쭉 흘러내렸다.
얼음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수 백호에게는 물기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이는 준혁이 얼음을 녹인 것이 아니라 애초에 평범한 얼음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준혁이 신수 백호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때.
[신수와 계약하시겠습니까?]
시스템 문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계약한다.”
준혁이 곧바로 대답했다.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계약이 진행됩니다.]
백호로부터 금빛 기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금빛 기류는 점차 준혁에게 향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 금빛 기류가 모두 스며들어 갔다.
뒤이어 백호의 이마에 천사의 문장이 새겨지더니 강대한 빛을 터트렸다.
석관의 홀을 가득 메울 만큼 눈부신 빛이 몇 초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단상 위에는 인간의 외모를 하고 있었던 백호가 아닌 고양이를 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놀랍도록 작아진 짐승 외형의 아기 백호가 동그랗게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숨 쉬고 있어.’
[240시간 동안 수면 상태가 지속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백호의 수면 상태를 알려 왔다.
백호는 몸을 돌돌 만 채로 잠들어 있었는데 그 자그마한 몸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기라도 한 듯 등과 배가 규칙적인 호흡으로 움직였다.
준혁은 자신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작은 새끼 고양이만 한 크기의 백호를 손으로 살며시 말아 쥐어 들어 올렸다.
손끝으로 백호가 숨을 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녀석은 계약이 성사된지도 모르고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준혁이 백호를 얼굴 쪽으로 살짝 당겨 와 자세히 보고 있던 중.
쿠르르……!
천장에서 가루가 떨어지며 석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보아선 오래 걸리지 않아 무너질 것 같았다.
더욱이 그 가능성을 높이는 건, 천장과 바닥을 포함한 육면의 벽면에 새겨진 천사의 언어가 마치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하나씩 지워지고 있었다.
준혁은 석관을 빠져나가기 위해, 들어왔던 통로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콰르르!
준혁의 등 뒤로 마치 도미노처럼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석관을 나와 서재로 돌아오자 서재의 천장에 금이 갈라지며 균열이 일었다.
성 전체가 무너질 모양새였다.
준혁은 손에 들고 있는 백호를 가슴 쪽에 잘 품고서 고민 없이 유리창을 향해 뛰었다.
준혁이 창문을 깨고 성 아래로 낙하했다.
유리 파편을 흩날리며, 추락하는 준혁의 뒤로 성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백호의 안전을 위해, 성과 거리를 둘 만큼 단 한 호흡에 이동했다.
왕성의 입구쯤에 이르러 준혁을 뒤를 돌아보았다.
무너진 성에 의해 뿌연 회색 연기가 마치 구름처럼 퍼지고 있었다.
준혁은 가슴 쪽에 품고 있는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굉음을 내며 성이 무너진 와중에도 녀석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준혁이 픽 웃으며 돌아가기 위해 왕성 바깥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녀로 내몰아 추방했던 예언가의 말대로, 예언은 현실이 되어, 왕 실칸을 포함해 수호 기사단은 전멸이었다.
오직 천계인으로만 이루어진 수호성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철컥!
노크도 없이 협회장실의 문이 열렸다.
“협회장님!”
비서가 긴장과 열기로 합쳐진 표정으로 선우를 응시했다.
선우가 비서를 보았다.
“귀환자님이 돌아왔습니다.”
비서의 말에 선우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얼마나 형이 돌아오기를 고대했던가?
고작 한 달이었지만 형의 빈 자리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컸다.
“지금 바로 캐슬로 간다.”
선우가 손으로 강하게 테이블을 찍고 일어나며 말했다.
* * *
준혁이 연무장에서 나와 캐슬 본관으로 향했다.
“귀환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귀환자님!”
정원관리사들이 준혁을 보고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
준혁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하고 그들을 지나쳤다.
“애완동물인가?”
정원관리사 중 한 명이 말했다.
캐슬 본관으로 향하는 준혁은 가슴팍 쪽에 작디작은 백호를 가슴 쪽에 품듯이 들고 있었다.
정원관리사는 오랜만에 준혁을 본 것도 놀라웠지만 동물을 데리고 있다는 점이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준혁은 일꾼들의 인사와 백호를 향한 시선을 받으면서 캐슬 본관 앞에 이르렀다.
본관 안으로 들어가자 집사가 깜짝 놀라며 우뚝 멈춰 섰다.
준혁을 빤히 보던 집사가 손을 동그랗게 말면서 입으로 가져갔다.
“귀환자님이 오셨습니다!”
집사의 외침에 일을 하고 있던 메이드와 매니저 지우가 달려 나왔다.
“귀환자님!”
“귀환자님을 뵙습니다.”
집사를 시작으로 메이드들이 모두 준혁에게 머리를 숙였다.
뒤이어 지우가 메이드들 틈 사이로 나타났다.
“귀환자님!”
“별일 없었지?”
지우가 뭐라 답하기 전에, 캐슬 안의 식구들이 모두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방향은 준혁이 품에 안고 있다시피 들고 있는 백호였다.
“귀환자님. ……안고 계신 게 새끼 호랑이인가요?”
지우가 모두가 궁금해하는 질문을 대신해서 던졌다.
준혁이 소파 쪽으로 가서 깊은 수면 상태에 빠져 있는 백호를 푹신한 곳에 내려놓았다.
시스템에 의하면 백호는 약 10일 정도 동안 이렇듯 곤히 잠들어 있을 예정이었다.
지우와 집사, 그리고 메이드들이 쪼르르 따라와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신수 백호령이다. 이름은 대충 줄여서 백호. 앞으로 캐슬에서 지내게 될 거야.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수면 중이겠지만 깨어나게 되면 잘 챙겨 줘.”
준혁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캐슬 식구 모두 백호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들은 신기한 생명체인 백호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와아, 귀엽다.”
지우가 감탄한 듯이 말했다.
그러자 지우 주변에 있던 메이드들이 일제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하, 하하. 집사님, 왜 눈물을.”
이상한 인기척에 옆을 봤더니 백호를 보고 있는 캐슬의 집사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생명체입니다. 단순한 백호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비범한 아우라를 보십시오!”
집사의 말대로 준혁이 데려온 아기 백호는 털 주변으로 파란 마력의 막이 있어 은은하게 영롱한 빛을 냈다.
신비로움 속에 잠들어 있는 아기 백호였다.
“백호가 깨어나게 되면 앞으로 집사님과 메이드님들이 바빠지겠네요.”
지우가 웃으며 말했다.
“바빠도 됩니다. 최고로 집중해서 아기 백호님을 모시겠습니다, 귀환자님!”
정신없이 백호를 보고 있던 지우가 아차 하며 서둘러 직원들 틈 사이로 빠져나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협회장이 얼마나 준혁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협회장의 스마트폰이 꺼져 있어 지우는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귀환자님이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전하고 전화를 끊자 얼마되지 않아 협회장이 캐슬로 온다는 문자를 받았다.
“내가 돌아온 게 얼마 만이지?”
“정확히 한 달만입니다.”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어비스의 문을 지나 수호 행성에 머무른 건 별달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계에서는 훨씬 빠르게 시일이 지나 있었다.
차원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듯했다.
생각한 것보다 더 차이가 났다. 만약 다음에 시간 흐름이 잘못된 차원으로 가게 된다면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지도 몰랐다.
“그럼 이제 봄인가?”
“네, 벌써 완연한 봄이네요.”
준혁이 거실에서 통유리 문을 지나 창밖의 마당으로 나갔다.
어느새 녹색의 잔디가 올라왔고 캐슬의 정원에는 여기저기서 벚꽃들이 활짝 만개해 있었다.
실로 장관이라 천국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준혁이 순수한 마음으로 감상하고 있을 때 인기척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지우가 카메라를 들고 준혁을 비추고 있었다.
“아…… 이거 동영상인데. 올려도 될까요? 귀환자님을 기다리는 팬들이 많아서요.”
준혁이 상관없다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띠링!
녹화가 종료되었다.
만족스러운 듯 카메라를 보던 지우가 얼굴을 들었다.
“협회장님이 캐슬로 오고 계세요. 식사부터 준비할까요?”
“그러자.”
지우가 생긋 미소 지었다.
“네.”
준혁은 다시 캐슬의 정원을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신수를 찾고 돌아왔다는 게 조금씩 실감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