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65화
준혁은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버린 수호성의 땅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뿌연 연기 속에서 준혁의 걸음 주변에는 수호 기사들의 시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단 한 번조차 칼을 휘두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 있었다.
수많은 시체가 발아래에 깔려 있었으나 준혁은 스스로가 아직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은 여전히 오만하게 아득한 높이에서 스스로의 건재함을 즐기고 있을 테니까.
최고의 수준이 아닌, 신의 수준의 이르는 것.
그것이 준혁이 추구하는 강함이었다.
“신수를 찾으러 왔다.”
준혁이 팔 하나를 잃어버린 채, 비틀거리며 서 있는 붉은 수호 기사를 향해 말했다.
“수호성은 신수와 신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너희들은 천사들의 명령을 수행할 자격이 없어.”
붉은색의 수호 기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투구 속에서 푸른 안광이 빛났다.
“수호 기사를 모욕하지……!”
헬바인의 장검이 붉은 기사의 복부를 관통했다.
“너희들의 왕은 어디 있지?”
준혁이 상체를 기울이며 귓속말을 전하듯 말했다.
투구의 호흡 구멍 수십 개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붉은 기사는 새우처럼 등을 말면서 무릎을 꿇었다.
“수호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너도 그냥 천계인일 뿐이야.”
준혁이 장검을 빼냈다.
붉은 기사가 이미 죽은 듯 미동 없이 고꾸라졌다.
자욱한 회색 연기로 뒤로하며, 준혁의 걸음이 왕성으로 향했다.
* * *
“한낱 정신 나간 마녀인 줄 알았더니. 정말 미래를 보는 예언가였단 말인가?”
아주 넓은 침대 위에 걸터앉은 사내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천계인들의 왕이자 수호 기사들의 지배자 ‘실칸’은 안방을 나와 자신의 장비를 찾기 위해 이동했다.
아름다운 외모의 천계인들이 시중을 들기 위해 다가오자 실칸이 손짓으로 그들을 물렸다.
신성한 장비들을 모아 놓아 오직 수호성의 왕 실칸만이 들어갈 수 있는 쇼룸 앞에 도착했다.
마치 피를 바른듯한 새빨간 문에는 실칸만이 풀 수 있는 암호가 마법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실칸이 작은 목소리로 암호어를 말하자 핏빛의 문이 열렸다.
쇼룸 안으로 들어간 실칸은 넓은 홀의 중앙에 전시되어 있는 자신의 금빛 갑옷을 착용했다.
빠르게 위아래로 장비를 장착하고 자신의 창 ‘에이브람’을 거머쥐었다.
쇼 룸을 나와 그랜드 홀의 입구쯤에 이르렀을 때.
“수호기사 본대가 전멸하였습니다.”
실칸은 놀란 눈으로 비극을 전한 신하를 응시했다.
예언가의 말이 마음에 걸려, 본대를 투입했다. 설령 그 마녀의 말이 진실이라 전멸을 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격전을 펼치리라 예상했다.
실칸 자신 역시도 수호성의 군대와 함께 싸울 마음이었다.
“뭐라? 전멸?”
실칸은 여전히 믿기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같았다.
“마녀의 예언이 당도하였나이다.”
신하가 울면서 말했다.
실칸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수호성에 겁쟁이는 필요 없다.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수호성을 지키는 것이 천계로부터 받은 명!”
실칸이 오른손에 쥔 에이브람으로 무릎 꿇고 울고 있는 신하를 두 동강으로 베어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신하를 죽인 실칸이 불같은 기세로 그랜드 홀의 입구를 발로 차서 박살 냈다.
“……전멸이라니. 전멸이라니!”
얼마나 오랜 세월을 통해 완성시킨 수호 기사들이란 말인가?
실칸은 그 수호 기사들의 죽음이 아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순혈의 천계인 중, 천사에게 선택받은 자들은 극소수였다.
그들을 교배시켜 그 수량을 늘리기까지 얼마나 역한 시간을 보내왔는지,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실칸이었다.
“죽인다. 죽여버릴 것이다.”
실칸의 눈 흰자에 실핏줄이 터졌다.
얼굴은 터질 듯이 붉어졌으며, 마력의 파장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왕좌가 부서지고 마치 태풍이 분 것처럼 온갖 잡기들이 깨지거나 사방으로 날아들었다.
성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더니 천장에서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극도의 분노가 실칸으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거기서 혼자 뭐하냐?”
실칸이 그랜드 홀의 입구를 돌아봤다.
그곳에 준혁이 헬바인의 장검을 든 채 들어오고 있었다.
실칸이 준혁을 씹어 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네놈이냐? 나의 군대를 전멸시킨 것이.”
“까불지 말고 신수가 어디 있는지나 말해.”
극한의 분노를 넘어선 듯, 실칸이 준혁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신수? 감히 너 같이 근본 없는 놈이 천사의 명이 새겨진 신수를 원한단 말이냐?”
“난 자격이 있거든. 근본이 없는 건 너 같은 놈들이고.”
“신수를 찾을 자격 따윈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낮은 소리로 말한, 실칸이 마력을 품은 창을 휘둘렀다.
빛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 준혁은 가볍게 상체를 숙였다.
준혁을 지난 빛줄기가 그랜드 홀의 벽을 길게 베었다. 평범한 마수들은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 찢을만한 파괴력이었다.
“……제법이야.”
준혁이 평온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실칸에게 신형을 날렸다. 마치 끊긴 화면처럼 눈앞에 나타난 준혁이 헬바인의 장검을 휘둘렀다.
눈으로 반응할 수 없는 진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칸은 반사적으로 창을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헬바인의 장검과 에이브람의 창이 격돌하자 불꽃이 튀었다.
서로 검과 창을 맞댄 채, 실칸이 준혁의 두 눈을 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대체 그런 오만불손한 말투는 어디서 배운 것이냐? 더욱이 천계인도 아닌 이방인 따위가 어떻게 천계어를 알고 있지?”
“시스템이라는 건데. 말해도 모르겠지.”
실칸의 두 눈에 의문이 뜰 때 준혁이 장검에 힘을 실어 밀어냈다.
힘에 밀린 실칸이 뒷걸음질 치다 다시 자세를 잡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에이브람의 창이 준혁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준혁은 실칸의 창을 손으로 쥐고 그의 얼굴을 이마로 들이박았다.
투구를 쓰고 있지 않았던 실칸의 머리가 뒤로 크게 젖혀졌다.
“신수의 위치를 말해. 고문하고 싶지 않다.”
에이브람의 창을 붙들고 넘어지지 않은 실칸이 준혁을 보며 광기에 찬 얼굴로 웃었다.
그의 오른쪽 눈가엔 눈꺼풀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죽어서 유령이 된다 하여도 네놈을 따를 성싶으냐?”
실칸의 육신에서 새빨간 에너지가 솟구쳐 올랐다.
그 에너지가 성의 지붕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뻥 뚫린 파란 하늘 아래 최대 에너지를 간직한 실칸의 창이 준혁에게 내질러졌다.
마치 불꽃 같은 기류를 품은 에너지가 준혁을 향해 발출되었다.
준혁은 가벼운 스탭으로 피해냈고, 붉은 에너지는 그대로 성의 벽을 커다랗게 원형으로 뚫어냈다.
실칸은 마법 공격의 실패 즉시 회피한 준혁에게 따라붙었다.
에이브람의 창이 준혁의 목을 노리고, 붉은 기류를 품으며 휘둘러졌다.
강대한 기세였으나 준혁은 겁먹지 않고 맨손으로 에이브람의 창대를 붙잡았다.
준혁의 손이 마치 타들어 가는 듯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네 미치광이 짓은 여기까지다.”
준혁의 눈동자가 권위를 품고서 실칸을 굽어보았다. 실칸의 얼굴에 힘이 들어간 순간 준혁이 헬바인의 장검을 큐브 속으로 돌려보냈다.
신물의 무기가 사라지자마자 준혁이 실칸의 목을 움켜잡았다.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따위 힘으로 우욱……!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전에 네 팔이 먼저 날아가게…… 될 것이다!”
준혁은 타들어 가는 왼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목표는 신수였다.
빛의 검으로 어둠을 베어 온, 마계에서조차 전설이라 불리었던 사내.
한준혁.
단순히 어둠을 베어온 것뿐만이 아니라 악마를 부릴 수 있는 권능을 가져왔다.
바로 이것을 통해.
□
멸마의 서.
악마 소환.
수백 종의 악마 중, 대상의 머릿속으로 침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소악마 서큐버스가 공간을 찢으며 나타났다.
악마왕 데칸의 혓바닥으로 은밀한 부위를 가린 서큐버스가 웃는 얼굴로 실칸에게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실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대체 어찌하여 이 자리에 악마가 나타난 건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준혁의 손에 목이 잡힌 터라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호흡이 힘든 상태였다.
상당한 무력을 가진 실칸이었지만 준혁의 마력을 품은 손아귀에 의해 호흡이 가빠지며 체력이 빠진 그는 서큐버스의 유혹에 손쉽게 넘어가고 말았다.
서큐버스에 의해 의식을 잃은 실칸이 준혁의 손아귀에 목이 붙들린 채로 축 늘어졌다.
그는 죽은 듯이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치이익!
에이브람의 창은 힘을 잃어 더 이상 준혁의 손을 태우지 못했다.
준혁이 목을 놓자 실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서큐버스와 실칸 사이에는 마치 거미줄처럼 이어진 보랏빛의 실줄이 있었다.
이 실줄이 연결되었다는 것은 곧 서큐버스가 실칸의 기억과 꿈을 탐닉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황홀한 표정으로 실칸의 머릿속을 헤집던 서큐버스가 마침내 목적을 이룬 듯 부르르 몸을 떨면서 고개를 젖혔다.
“권속의 주인이시여. 신수를 찾고 계십니까?”
서큐버스가 준혁을 보며 물었다.
“찾았나?”
서큐버스가 만개한 웃음을 지었다.
“예, 주인님. 영광스럽게 안내하겠…….”
빛의 검을 만들어 실칸의 심장을 찔렀다.
실칸이 입은 갑옷은 단단하여 빛의 칼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헬바인의 장검을 꺼냈어야 했나?’
단순히 마력으로 만든 빛의 검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 신물까지 꺼내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좀 더 힘을 주었다.
빛의 검이 실칸이 입은 화려한 갑옷에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깨졌다.
빛의 검은 애초에 목표로 했던 실칸의 심장을 꿰뚫었다.
[수호성의 주인을 처치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달성했습니다.]
[멸마의 서에 새로운 권능이 부여됩니다.]
[권능 : 소화]
적을 처치하면 대상의 잔여 마력을 강제 흡수합니다. 이 권능은 마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모든 경우에 적용됩니다.
[소화의 권능이 멸마의 서에 기록됩니다.]
천계인도 우주 인간종의 하나로 심장의 위치가 인간과 같음은 이미 수호성으로 오는 길에 확인한 바였다.
“안내해라.”
음험한 눈길로 준혁을 지켜보던 서큐버스가 작은 악마의 날개를 팔락거리며 두둥실 떠오른 채 앞장섰다.
수호 기사가 전멸하고 왕이었던 실칸의 죽음 이후로 왕성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준혁이 큐브 안에서 엘릭서를 꺼내 상처입은 왼손에 부었다.
엘릭서를 붓자 화상을 입은 것처럼 부어 있던 왼손의 상처는 마치 새살처럼 깨끗이 치유되었다.
“제가 도움이 되는 날이 오다니. 꿈만 같은 순간…….”
준혁이 서큐버스를 노려보았다.
닥치고 일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흡!”
서큐버스가 오들오들 떨면서 홀쭉해진 얼굴로 날갯짓의 속도를 올렸다.
서큐버스는 이미 실칸의 꿈속으로 들어가 그의 기억을 하나하나 헤집은 상태였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왕성의 지리를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칸만이 알고 있는 암호어도 꿈속에서 훔쳐 올 수 있었다.
서큐버스의 능력은 대상의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이다.
이미 꿈속을 다녀간 서큐버스였기에 실칸의 왕성은 손바닥 보듯 훤했다.
“이곳이 실칸의 서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