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63화
“심판자에게 악을 단죄할 힘을 내려 주시길.”
마호르가 준혁이 떠난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고 이마 위로 성호를 그렸다.
이는 천계인들만의 신을 찾는 방식이었다.
마호르는 그렇게 마지막 예법을 다하고 마을 중앙 광장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타락한 천계인들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마을을 찾은 감시관들이 죽었으니 누구의 죄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대가는 오직 죽음. 혹은 연구소로 끌려가는 일뿐이었으니까.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감시관들이 죽다니요?”
“그자입니까? 그 외부인이 이들을 죽이고 떠난 겁니까?!”
죽음의 절망을 드리운 얼굴로 천계인들이 소리치며 묻고 있었다.
마호르는 천계인들을 단호한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우리 마을을 찾아온 그는 단순한 외부인이 아닙니다.”
천계인들이 여전히 불안이 가시질 않은 표정으로 마호르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일말의 기대와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예언가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잠시 천계인들이 술렁였다가 목소리가 그쳤다.
“예언가가 말했던 수호성을 심판할 전설. 그가 바로 오늘 마을을 찾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천계인들이 깜짝 놀라며 감탄을 흘리거나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예언가의 말이 맞았다는 사실보다 두려움이 앞서고 있었다.
“예언가의 말을 믿으십시오. 예언가의 말대로 심판자가 나타났습니다. 예언대로 수호성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 이방인으로 인해 우리의 세계가 무너진다면 어찌 된단 말입니까?”
그들의 두려움 앞에 마호르는 단호했다.
“이미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습니다. 세금을 지금처럼 올린다는 건 우리를 연구소로 데려가 괴물로 만들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일. 우리에게 이미 죽음이 드리웠고, 그 죽음의 그늘 속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언가가 말했던 지금의 심판자입니다.”
천계인들이 할 말을 잃고 침울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고개를 드세요. 우리에겐 오히려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잃어버린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기회.”
마호르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몇몇 천계인들의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초라하게, 지독한 노동으로만 살다가 죽어야 할 운명을 배정받은 삶.
“심판자가 나타남으로 인해 수호성의 독재 시대는 격변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마호르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천계인들을 보며 이어 소리쳤다.
“우리가 무너진 수호성의 재건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또다시 비극이 펼쳐질지도 모르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천계인들이 달라진 눈빛으로 마호르를 보았다.
비루했던 그들의 얼굴에 힘이 담긴 눈빛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마호르가 준혁이 떠난 북쪽 방향을 돌아보았다.
“분명 새로운 수호성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천계인들 모두 북쪽 방향을 보았다.
마을에 모인 그들의 억압되고 짓눌려 있던, 뜨거운 감정이 휘몰아쳤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이들의 눈빛은 영롱하게 빛나며 준혁의 등 뒤를 쫓고 있었다.
* * *
준혁은 한 줄기의 빛이었다.
단 한 번 땅을 차고 뛸 때마다 광활한 대지를 가로질렀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전력으로 질주하는 것은.
일반적인 던전에서는 자제해야 했다.
어느 정도 감각을 눌러 둘 필요가 있었다.
마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본능을 미쳐 날뛰도록 만들었다간 혼란이 인간계의 세계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직 준혁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더욱이 이미 천사의 뜻을 거스르고, 독재 세계를 만드러나가고 있는 수호성이었다.
준혁이 자신의 본능을 일깨우는 데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공기와 바람을 찢으며 나아간 준혁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천리안의 지도에 새로운 건물들이 나타난 게 보여서였다.
준혁이 멈춰 섰을 때, 눈앞에는 공장처럼 보이는 거대한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의 굴뚝 위로, 초록 연기가 뭉게뭉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마호르가 말했던 수호 기사들의 연구소인 듯했다.
마치 성처럼 견고하고 거대한 회색의 건물.
나무로 만들어진 문으로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열리더니 수호 기사 수십 명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준혁을 원형으로 둘러싸며 검을 들이밀었다.
그중 대장 하나가 준혁의 앞으로 걸어왔다.
대장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헬바인의 장검이 수호 기사 대장의 심장을 찔렀다.
검을 뽑아내자 피를 뿜으며 대장이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수십 명의 수호 기사들이 준혁을 향해 검을 찌르거나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준혁은 하늘을 향해 뛰어오른 후였다.
수호 기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젖혀 위를 올려다보았다.
준혁이 칼자루를 역수로 잡아 땅으로 떨어져 바닥을 찍었다.
바닥이 갈라졌다.
수호 기사들이 준혁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사이 하늘에서 수십 개의 환영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검기를 분할하여 통제하는 극에 이른 검술.
환영검에 관통당한 수호 기사들이 동시에 쓰러져 나갔다.
준혁은 땅을 박고 들어간 헬바인의 장검을 뽑았다.
이 명검은 가히 신물이라 불리우기에 충분했다.
평소에 쓰던 마력의 반도 쓰지 않았음에도 동일한 파괴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준혁은 신물 헬바인의 장검의 예리한 칼날을 보며 연구소 안으로 진입했다.
복도가 깊어질수록 멀리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이는 아마도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괴물들의 소리 같았다.
야광석에 의해 어두운 분위기로 가득한 복도를 돌아보던 중 준혁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준혁은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큐브 형태의 감옥 안에 일정 간격을 두고, 괴물들이 갇혀 있었다.
인간의 몸에 악마의 세포를 주입한 탓에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외양이었다.
그런 감옥이 수백 개가 지하에 마치 바둑판처럼 나열되어 있었다.
“침입자다! 침입자를 막아라!”
1층 쪽에서 말소리가 들림과 함께 계단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준혁은 칼자루를 고쳐 잡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오는 수호 기사들이 보였다.
데스 나이트와 비슷한 정도의 실력인 듯했다. 하지만 헬바인의 장검은 그들의 검을 자르고, 갑옷을 베면서 가볍게 숨통을 끊어 냈다.
계단 아래로 밀려드는 수호 기사들은 준혁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사지가 절단되거나 목이 잘려 나갔다.
준혁이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계단에는 시체가 쌓여 나갔다.
마침내 준혁이 지상 1층으로 다시 올라왔을 때 계단에는 발을 디디기도 어려울 만큼의 수호 기사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얼추 정리가 된 듯 더 이상의 수호 기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놈들이 직접 괴물을 만들지는 않았겠지.’
연구소에서 연구를 맡고 있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 한 명이 쥬레타라고 했었지.’
준혁은 수호 기사들의 시체를 밟으며 다시 지하 아래로 내려갔다.
감옥에 갇힌 수많은 괴물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 댔다.
준혁은 괴물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감옥 사이를 걸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듯한 큐브 감옥 사이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하얀 가운을 입은 천계인이었다.
누가 봐도 괴물을 만드는 연구자처럼 보였다.
그는 투구도 없었고 갑옷도 입지 않았으니까.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땀을 흘린 채 자신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준혁이 그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남자는 곧장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다지 빠르지 않아서 준혁은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준혁은 걷고 있었지만 마치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신은 것처럼 쭉쭉 나아갔다.
그 속도 때문에 도망가는 사내의 등 뒤를 바짝 추적하게 되었을 때.
철컥!
하얀 가운의 사내가 문을 열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준혁이 그 문고리를 잡아 뒤쫓아 들어갔다.
거대한 홀 공간에는 방금 전까지 보아왔던 큐브 감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철창 감옥이 두 개 있었다.
하얀 가운의 천계인이 버튼을 누르자 감옥의 문이 열렸다.
두 개의 감옥에서 본래의 악마라고 해도 믿을 만큼 괴이하고 거대한 덩치들이 걸어 나왔다.
몸체는 서 있는 곰 같았고 대가리는 파충류를 닮아 있었다.
그런 두 마리의 괴물이 준혁을 향해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마치 활짝 피어나는 꽃처럼 입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면서 열렸다.
불쾌한 저주파가 쩌렁쩌렁 울렸다.
늘 보고 살았던 것이라 새로울 것도 없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누런 이빨이 보였고, 분홍색의 긴 혓바닥이 새하얀 침액을 바닥에 뚝뚝 떨어트렸다.
시커먼 몸체에는 상처가 많았는데 그 찢어진 상처에서 녹색 가스가 숨 쉬듯이 뿜어지고 있었다.
두 마리 모두 비슷한 외양이었지만 한 놈은 꼬리가 있고 다른 한 놈은 꼬리가 없었다.
연구 과정이 서로 조금씩은 달랐던 괴물이란 소리였다.
준혁은 두 괴물 등 뒤로 숨어 있는 천계인을 보고 혀를 찼다.
악마를 죽이는 게 일이었던 자신에게 이런 괴물들을 들이밀고 있는 천계인이 가소로워서였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괴물이 팔을 뻗었다. 손이 찢어지듯 갈라지더니 날카로운 생체 조직이 준혁을 향해 여러 방향으로 날아들었다.
준혁이 움직이자 괴물의 찢어진 다섯 개의 날카로운 공격은 준혁을 놓친 후, 땅을 뚫고 들어갔다.
그 사이 준혁이 헬바인의 장검을 휘둘렀다.
검기의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거대한 괴물의 허리가 싹뚝 잘려 나갔다.
벽에 피 분수가 쫙 뿌려졌다.
이어 준혁이 두 번째 괴물에게 바닥을 차고 뛰어들며 헬바인의 장검을 세로로 휘둘렀다.
칼날은 정수리부터 내리그었다.
내장을 훑고 사타구니까지 지나 정확히 반쪽으로 갈라 냈다.
좌우로 기괴하게 갈라지며 무력하게 쓰러진 괴물.
“아아아……! 나의 아이들이 어떻게 이토록 간단히.”
연구소의 사내는 절망한 듯 희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다 벽에 등을 기대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쭈르륵 주저앉았다.
준혁은 끔찍한 사체가 되어 버린 괴물들 사이를 걸어 주저앉아 혼이 빠진 듯한 천계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준혁의 검은 뼈와 내장을 갈라 냈음에도 핏방울 하나 없이 깨끗했다.
“넌 저 괴물들처럼 곱게 죽지 못 해.”
준혁이 헬바인의 장검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말했다.
천계인이 공포에 질려 이가 딱딱 부딪쳤다. 눈알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네 행동에 따라 살 수도 있다.”
“……무,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방인이시여. 말씀만 하소서.”
“수호성으로 직행하는 포탈로 안내해라.”
“그, 그리하지요.”
천계인이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힘겹게 일어섰다가 절뚝거리며 앞장섰다.
거대한 괴물 두 마리를 보관하고 있던 룸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그는 그 문을 통해 좁고 아주 긴 복도를 걸었다.
철로 만들어진 바닥 아래로는 틈새 사이로 초록 가스가 마치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맡아 보는 쿰쿰한 냄새가 물씬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