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61화
준혁도 키가 큰 편이었지만, 우두머리 천계인은 준혁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로 키가 컸다.
그는 용맹한 눈빛으로 준혁을 내려다보며 우직해 보이는 입술을 열었다.
“천계인이 아닌 자가 어찌 이 땅을 밟고 있는 거요?”
그의 표정에선 고집스러움이 묻어나 있다.
필요하다면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 같은 자였다.
“수호성을 찾고자 왔습니다. 그 과정이야 말하자면 길 테고.”
준혁이 우두머리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수호성으로 가는 방향을 좀 알 수 있었으면 하는데,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준혁의 입에서 수호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우두머리는 물론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천계인들 모두 극도의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천계인들이 술렁이는 동안 준혁의 앞에 서 있는 우두머리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분노마저 어린 얼굴이었다.
“수호성은 왜 찾고자 하는 거요?”
“찾고자 하는 게 있고 난 그걸 가져가야 하니까.”
우두머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혼자요?”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수호성에 간단 말이오?”
우두머리가 믿기 어려운 듯 물었다.
“그러기 위해 왔으니까.”
“수호성 근처도 가지 못해 죽고 말 거요. 대체 어떻게 이 땅을 밟게 된 건진 모르나…….”
“수호성으로 가는 방향을 물었습니다. 조언이 아니라.”
우두머리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진정 수호성의 기사들을 만나 싸움도 불사하겠다?”
“피할 수 없다면.”
다시금 우두머리 등 뒤로 구경하던 천계인들이 수근거렸다.
그들은 불안감에 떨고 있었지만, 준혁을 마주한 우두머리는 전혀 다른 성질의 불안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맙소사, 칼라투스의 예언이 이르렀을지도.”
우두머리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눈으로 땅을 보며 손을 떨었다.
“칼라투스의 예언?”
“따라오십시오. 나 마호르가 그대가 정말 칼라투스의 예언이 맞는지 확인해야겠으니.”
천계인의 우두머리.
그의 이름은 마호르였다.
마호르는 불안에 떨고 있는 천계인들을 다독여 각자 자신의 일을 하러 가라고 다독였다.
천계인들은 여전히 불안이 가시질 않은 눈빛으로 준혁을 보면서 흩어졌다.
천계인들을 모두 일터로 보낸 뒤 마호르가 준혁을 돌아봤다.
“따라오시오.”
그가 앞장서서 걸을 때 준혁도 바로 뒤따랐다.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 앞에 도착했다.
간판이 없어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 겉으로 봐서는 알기 어려웠다.
마호르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준혁은 이곳이 신전으로 쓰이는 곳임을 알게 됐다.
단상 뒤로 신의 조각상이 걸려 있었고 나무를 깎아 만든 의자들이 신전을 향해 위치해 있었다.
마호르는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으로 신전의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각상을 향해 천계인 특유의 예를 올리고 의자를 가리켰다.
준혁이 앉자 마호르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준혁은 신의 조각상을 빤히 보았다.
투구부터 발끝까지 갑옷으로 중무장을 한,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이 생동감 있는 조각상이었다.
“헬바인. 그는 만 년 전 수호성을 지키기 위해 현신한 최초의 수호자였습니다. 마계의 침입으로부터 수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결국 마계의 공세를 끝까지 막아 낼 수는 없었지요. 헬바인이 사라지자 오래 걸리지 않아 천사들이 나타나 수호세계의 악마들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천사의 개입과 함께 최초의 수호자는 임무를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남아 있는 천계인들은 수호성을 지키고자 한 헬바인의 공적을 잊지 않았고, 그는 신화가 되어 지금까지 그 이름이 신전을 통해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
“그렇게 수호성이 새로운 역사를 맞이한 후, 오랜 시간이 흘러 이 신전이 생겼습니다. 이 신전을 만든 자는 수호성에서 마녀란 오명을 쓰고 추방된 자. 수호성에서는 예언자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호르는 가라앉은 눈으로 과거를 회상하며 이어 말했다.
“이곳 지상으로 내려온 자들은 모두 죄를 지어 수호성에서 추방당한 자들이죠. 그리고 수호성의 감시 기사들에 의해 통제당하고 있습니다.”
준혁은 좋은 토양을 가진 것에 비해 왜 그들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대충 이해가 갔다.
지상에서 만들어 풍부한 자원은 수호성으로 모두 빼앗기는 듯했다.
타락한 천계인은 노역을 명령받은 죄수들이었다.
“그 마녀라 불리었던 천계인이 이 신전을 만들었고 예언을 한 거라면.”
마호르가 준혁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녀의 예언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 예언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외부인이 나타나 수호성의 수호기사들을 심판할 거라 하였습니다.”
마호르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수호성을 지키는 수호 기사들은 천사들에게 선택받은 자들. 5천 년 전부터 마계조차 완성된 수호 기사들의 힘에 굴복할 정도였으니 그들의 세력은 가히 넘볼 수 없는 절대의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말했습니다. 수호 기사들을 심판할 자가 올 것이라고.”
마호르가 떨리는 눈동자로 준혁을 보았다.
“새로운 전설이 이 땅에 당도할 것이다. 그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졌으며 단신으로 마계를 공포에 떨게 만든 악마 사냥꾼이다. 어둠과 대적할 유일한 전설이니 부디 그의 심판에 침묵하라. 헬바인의 후예들이여.”
마호르가 일어서서 신전의 단상으로 올라갔다.
“예언자는 이 말과 함께 하나의 물건을 남겼습니다.”
그가 신전의 탁자 위에 놓인 나무 조각 하나를 들고 준혁에게 돌아왔다.
“만약 당신이 예언자가 말한 전설이라면 이 예언자의 패가 증명할 것입니다.”
준혁이 나무패를 받았다.
천계어로 왕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글자였다.
이는 천사가 남긴 검을 룬 문자의 힘으로 숨겨 놓은 아이템이었다.
준혁은 나무패에 숨겨진 힘이 있다는 걸 받자마자 알아차렸다.
즉시 마력을 주입하였고 납작한 나무패에 새겨진 룬에서는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이 사라졌을 때, 준혁의 손에는 나무패가 아닌 한 자루의 장검이 있었다.
[헬바인의 장검]
등급 : 신물(SSS+)
종류 : 장검
신성력 : +1000
헬바인의 뼈로 만든 장검입니다.
신화의 재현으로 헬바인의 특성이 적용됩니다.
헬바인의 특성은 칼날에 베인 적 모두를 회복 불가로 만듭니다.
기본적으로 양손 검으로 만들어졌지만, 능력에 따라 한 손 검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 특성 : 100퍼센트 확률로 회복 불가 상태로 만듦. 대상은 손상된 부위에 자가 치유가 불가능하다.
준혁이 칼자루를 꽉 쥐었다.
마계에서 계획하고 꿈꿨던, 그토록 갖고자 했던 신물.
그 첫 번째 신물을 만났다.
준혁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헬바인의 장검의 칼날을 살펴보고 있을 때, 그 광경을 지켜본 마호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이내 엉덩방아를 찧었다.
준혁은 그 소리에 마호르를 보았다.
마호르가 전율에 휩싸인 채 준혁을 보고 있었다.
“……저, 저, 정말 예언자의 전설이 나타날 줄이야.”
그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마호르 입장에서는 마치 신이 직접 강림한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의 충격일 테니까.
“당신은 누구의 편입니까? 마호르.”
준혁이 물었다.
수호성과 한준혁.
결론에 이르렀으니 마호르는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마호르가 준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제겐 마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준혁이 그럼 원하는 걸 말해 보라는 듯 상체를 기울이며 마호르를 주시했다.
“오늘 밤, 감시 기사들이 마을을 찾을 겁니다. 그들을 모두 처치해 주십시오. 안전이 확보된다면 수호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싸우지 않고 수호성으로 가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마계의 악마들도 아니고 천계의 후예들이었다.
굳이 피 튀기는 싸움을 통해 수호성으로 가는 것보단 바로 수호성의 주인과 단판을 짓는 게 편했다.
“이미 독재로 변질된 자들. 절대 외부인을 수호성에 들이려 하지 않을 겁니다.”
준혁이 쓰게 웃었다.
‘하긴 그렇게 능력 있는 예언자조차 마녀로 몰아 내쫓은 놈들이니 말이 통할 리 없지.’
준혁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던전이 아니라고 해도, 결국 또 피가 튀겠군.
“우선 기다려 보죠. 그 수호 기사라는 놈들을.”
준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 * *
장작불이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전기도 없는 수준의 문명이다 보니 화롯불이 유일한 빛이었다.
마호르의 말에 의하면 수호성의 문명과 타락한 천계인들이 사는 땅과는 전혀 그 수준이 다르다고 한다.
마법이 발달하여 그 문명의 발전을 온전히 활용하고 사는 수호성과 달리 지상의 땅은 착취를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지금처럼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수호성의 기사들이 나타난다.
수호 기사들은 어둠을 보는 눈이 발달하여 빛이 없어도 잘 활동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마호르는 대답 없이 빵 하나를 들고 와 준혁의 앞에 놓았다.
“어떻게 보일지 모르나 우리에겐 귀한 음식입니다.”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귀환 음식을 먹을 만큼 배가 고프진 않습니다.”
“그래도 성의를 받아 주시지요. 밤이 길어질지도 모릅니다.”
수호 기사의 방문 시간이 일정할 리는 없었다.
준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빵을 들고 뜯어먹었다.
맛이 없었다.
마치 종이를 씹는 듯해서, 불쾌할 정도였고 이 빵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용도에 불과했다.
“궁금해서 그런데,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준혁이 물었다.
마호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장작불에 나무를 몇 개 더 넣었다.
“어떤 죄를 지으면 타락한 천계인이 되는 겁니까?”
마호르가 작게 웃었다.
“역시 범상치 않은 분이시군요. 그 명칭도 알고 있으신 걸 보면.”
마호르가 잠시 과거를 회상하곤 입을 열었다.
“물건을 훔친 이들도 있고 같은 천계인을 죽인 자들도 있죠. 지켜야 할 법을 어긴 자들. 작고 큰 범죄들로 지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삶의 방식도 인간계와 다를 것 없었다. 범죄의 대가를 어떤 방식으로 치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하지만 문제는 무고한 자들도 있다는 겁니다.”
“무고한 자들?”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천계인이 되어, 지상으로 추방되는 일이 꽤 많습니다.”
“마호르, 당신도 그랬습니까?”
마호르가 웃었다.
“어쩌면 제가 모르는 죄를 지었을지도 모르지요.”
예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마녀가 추방됐으니. 수호성이라는 곳도 악질들이 넘쳐 날 수밖에.
“처음엔 수호성의 수호를 명령 받았습니다. 천계의 진짜 천사들에게.”
“…….”
“하지만 세월이 흘러, 천계인들이 많아짐에 따라 세력을 불리고 권력을 탐하며, 그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졌지요.”
마호르가 벽난로에서 타로으는 불꽃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힘이 없으면 빼앗기고. 죄가 없어도…… 죄인이 되는 그런 세상.”
마호르가 준혁을 보았다.
“당신이 사는 세계는 어떻습니까?”
마호르의 두 눈빛은 지쳐 있었다.
마치 세상에 질린 듯이 희망을 잃은 눈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