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60화
던전 안에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기에 우선 던전핵부터 파괴하기 위해 준혁은 천리안 지도를 보며 신형을 날렸다.
400킬로미터에 가까운 속도로 대지를 가로지르면서 준혁은 죽어 있는 마수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더 이상 던전 안에 살아 움직이는 마수는 없는 듯했다.
준혁이 던전핵 앞에 도착하자마자 손을 뻗었다.
빛을 뿜으며 순식간에 던전핵이 파괴되었다.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탈출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마수를 직접 처치하지도 않았는데 마수들이 모두 알 수 없는 이유로 괴멸되면서 던전은 쉽게 클리어되었다.
엑시트 게이트 앞에 선 준혁은 뒤를 돌아봤다.
던전은 마치 멸망한 세계처럼 고요했다.
- 버, 벌써 클리어?
- 왜 마수들이 저절로 죽지?
- 골드 던전 최단 시간 클리어. 대박;;
- 갓준혁이 너무 세서 골드 던전 막히나?
- 던전 수치보다 공략자 수치가 더 높으면 던전이 상향됨. 그동안 그래 왔음.
- 님 랭커임?
- 골드 던전이 생긴 지 7년만인가?
준혁은 엑시트 게이트를 통해 던전 밖으로 나왔다.
파천 길드가 분주히 활동하고 있었고, 경호 팀은 즉각 긴장하며 준혁을 주시했다.
“어떻게 된 거야? 던전 재설정이라니?”
준혁이 옆으로 다가온 힐러 최설화에게 물었다.
“던전의 역사에 의하면 플레이어의 전력이 최대 난이도의 던전을 상회할 경우, 던전이 상향되곤 했어요.”
결국 자신 때문에 충분히 공략이 가능했던 던전의 수준이 올라가는 얘기였다.
준혁 자신에게 있어선 균열의 조각을 찾기 더 쉬워질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전 세계 인류의 안전을 생각하면 나쁜 방향이었다.
하지만 아우터 갓이라는 외신을 죽이고자 하는 일에 비하면 사실 지금 같은 던전 상향쯤은 별일도 아니었다.
준혁이 파천 길드 팀장을 향해 손짓했다.
인력을 점검하던 팀장이 준혁의 앞으로 뛰어왔다.
“던전 추출 진행 상태는 어떻습니까?”
준혁이 물었다.
파천 길드에서는 가장 처음 공략했던 골드 던전 안으로 들어가 마나석과 같은 던전 물질을 채굴하기 위해 일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지금 현장에는 전보다는 훨씬 적은 수의 길드원들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지원하겠다는 용병팀이 많아서 생각보다 빨리 해결될 것 같습니다. 사흘 정도면 운송까지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크로아티아 던전엔 지금 백인호 군단장이 담당하고 있죠?”
“운송이 시작되면 아마 그때 이쪽으로 넘어올 겁니다.”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파천 길드 팀장이 경례를 올려붙였다.
팀장이 던전 진입을 위해 헌터팀과 작업팀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이 준혁은 최설화와 함께 차량으로 이동했다.
* * *
던전 재설정이 마음에 걸렸다.
던전 재설정은 말 그대로 던전의 수준을 다시 재설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골드 던전보다 상향된 던전이 나올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뜻.
‘어비스를 다녀온 후 머지않아 던전의 변화가 시작되겠군.’
일정상으로는 완벽했다.
어비스에서 돌아온 이후, 만약 더 높은 등급의 던전이 나타난다면 균열의 틈을 찾아야 하는 준혁에게는 당연히 더 이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변화된 던전의 소유권이겠지만.
그런 문제들은 어차피 어비스에서 다녀온 이후에 해결해도 늦지 않았다.
현재 어비스의 문이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길지 않다.
이제 신수와 신물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는 사실에 멈춰 있던 가슴이 두근거렸다.
준혁의 시선이 손목에 찬 시계로 향했다.
초침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듯했다.
* * *
시간이 됐다.
한국으로 귀국한 준혁은 예정된 어비스의 문을 지나기 위해 캐슬 본관에서 나와 연무장으로 향했다.
안전을 위해 힐러 최설화를 제외하고는 모두 캐슬 본관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일꾼들 역시 연무장 주변으로 오는 일이 없도록 잘 전달해 두었다.
연무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최설화가 이미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연무장 중앙에서 대기하고 있던 최설화는 준혁이 나타나자 천천히 눈을 떴다.
“귀환자님, 마음에 드세요?”
준혁은 놀란 표정으로 연무장 내부를 훑어보았다.
연무장 전체에 얇은 막이 씌워져 있었다.
힐러 최설화가 만든 프로텍트 스킬의 방어벽이었다.
던전 물질 자체도 단단하긴 하지만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최설화가 만든 프로텍트는 준혁이 보기에 굉장한 방어력을 갖고 있었다.
마나의 흐름만 봐도 평범한 프로텍트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훌륭하네.”
“저는 따라갈 수 없나요? 같이 가고 싶은데.”
“안 돼. 그만 나가 봐.”
준혁이 단칼에 거절했다.
최설화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부디, 뜻을 이루시길.”
최설화가 예의 인사를 올리고 연무장을 떠났다.
철-컥!
연무장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준혁은 천천히 긴 숨을 내쉬곤 큐브를 손에 쥐었다.
큐브 안에 들어 있는 균열의 조각과 열쇠를 꺼냈다.
어비스의 문을 열 수 있는 아이템들이었다.
균열의 조각에 열쇠를 가져가자 열쇠는 마치 빨려 들어가듯 조각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준혁의 주변으로 태풍과도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며 에너지의 결정체가 형성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은 기류가 마치 용처럼 검은 연기를 뿌리더니 멸마의 서가 준혁의 의식과 상관없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묵빛의 책자가 준혁의 정면 앞으로 부유해 있었다.
멸마의 서는 곧 페이지를 펼치더니 찬란한 빛의 문자를 쏟아 내면서 마치 춤을 추듯 글자들이 준혁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인간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마계에서 눈을 뜨고 처절히 싸워 왔던 고난의 시절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인가?’
준혁이 미소 지으며 에너지가 모여들고 있는 연무장의 중심을 응시했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아주 작은 마나홀이 생성되었다.
그 마나홀은 마치 팽창하는 우주처럼 점차 그 규모를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땅이 진동하고 사방으로 마나의 파장이 마치 칼날처럼 뿌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준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나홀이 완벽한 형태를 이뤄나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평범한 헌터가 서 있었다면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져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준혁은 익숙하다는 듯 게이트가 생성됨에 따라 생기는 마법의 파장을 정면으로 받아 냈다.
연무장의 중심, 거대한 게이트가 완전해지는 순간 천둥 벼락과도 같은 굉음이 울려 퍼지며 이내 게이트를 완성시켰다.
힐러 최설화가 만들어 놓은 프로텍트는 반 이상이 깨지거나 박살 나 있었다.
하지만 연무장까지는 무너트리지 않았다.
최설화의 보호 마법이 빛을 발한 것이다.
“어비스.”
최종 완성된 어비스 게이트는 실패 없이 완전하게 자리를 잡아 있었다.
준혁은 망설임 없이 단숨에 게이트 속으로 자신의 몸을 맡겼다.
* * *
의식이 깨자 새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시야가 초점을 잡자 초록 잎으로 무성한 숲이 보였다.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모를 만큼 높은 나무들로 가득한 숲이었다.
초록의 잎새 사이로 태양의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한국과는 거리가 있지만, 지구라고 해도 믿을 만큼 주변은 밝고 자연으로 가득했다.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했습니다.]
[정보를 읽고 있습니다.]
[더 월드 시스템 업데이트 완료.]
[수호성 지대에 도착했습니다.]
[언어 패치 완료.]
어비스를 통해 들어오게 된 새로운 차원.
여기에선 신수는 물론 신물까지도 구할 수 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귀여운 새들이 날아다녔고 향기로운 풀 내음이 진하게 났다.
준혁은 천리안으로 지도를 오픈했다.
지도를 보며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준혁은 울창한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인간이 만든 것 같은 잘 정돈된 길이 나타났다.
길을 따라 내려가기를 잠시 준혁은 곧 몇 명의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총 세 명의 남자들이 허름한 천옷을 입고 밭을 갈기 위해 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세 명 모두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건 멀리서만 봤을 때의 이야기다.
가까이서 보면 그들은 평범한 인간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등에 아주 작은 날개를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은 날개.
그렇기에 날개가 있다고 해서 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날개는 인체의 크기에 비해 너무도 볼품없이 작았다.
깃털도 죽어 있다시피 하여 사실상 퇴화된 신체 부위에 불과했다.
‘타락한 천계인.’
준혁은 그들을 보자마자 이미 정체를 알고 있었다.
멸마의 서를 처음 구했을 때, 준혁은 천계인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천계인은 천사가 떠난 자리에 살고 있는 자들.
그중 죄를 지은 자들이 수호성 아래로 쫓겨난다.
지금과 같은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자들이 ‘타락한 천계인’이었다.
신력을 빼앗긴 채 오래된 노역으로 인해 그들의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던 타락한 천계인들이 괭이질을 멈추고 준혁이 지나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천리안의 지도가 확장되어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다 하더라도 한계가 없는 건 아니었다.
결국 타락한 천계인들과 말을 섞어야만 했다.
밭에서 일하고 있는 자들보다는 저 멀리 보이는 마을까지 가서 어울리는 게 좋을 듯했다.
괭이질을 하던 천계인들은 부산스럽게 손짓을 하며 준혁을 향해 떠들고 있었다.
날개가 없는 자신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준혁은 무시하고 가던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마을은 큰 산을 끼고 자리 잡아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작은 규모였다.
준혁이 땅을 차고 신형을 날렸다.
단숨에 마을 입구에 도착한 준혁은 긴장한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천계인들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제대로 먹지 못 해 비쩍 말라 있었다.
불안한 듯 얼어 있던 그들은 곧 귓속말을 수근거렸다. 그러자 이내 한 어린아이 같은 천계인이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누군가에게 지금의 이 상황을 전하러 가는 듯했다.
준혁은 마을 안을 둘러보았다.
마치 먼 과거의 바이킹들이나 살법한 조악하기 짝이 없는 구조의 건축 형태였다.
높은 건물이 없었고 대체로 모두 단층짜리 건물이었다.
‘수호성은 이런 평범한 마을과 얼마나 다를까?’
준혁이 그렇게 생각하던 중,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
마을에 살고 있는 천계인들이 모여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략 30명 정도 되는 인원이었다.
천계인들은 하나같이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준혁을 응시했다.
‘지금쯤이면 이 마을의 우두머리가 나올 때가 됐는데.’
준혁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마침 수십 명의 천계인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비루한 몰골의 천계인들과 달리 그는 비교적 멀쩡했다.
키도 컸고 근육도 제법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기골이 장대했다.
검게 난 수염과 검은 눈동자를 보니 등에 날개만 없으면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외모였다.
우두머리 천계인이 준혁의 앞으로 당당하게 저벅저벅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