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50화
이탈리아 협회장이자 유럽연합의 대표 지오반니가 팔짱을 낀 채 귀환자를 응시했다.
준혁은 지오반니의 직원으로부터 계약서를 받자마자 선우에게 넘겼다.
곧장 계약서 내용을 꼼꼼히 확인한 선우가 다시 준혁에게 계약서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문제없어. 사인해도 돼.”
계약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첫 번째로 사람이 죽지 않을 정도로 손속을 두고 실력 차를 통해 경기를 치를 것.
이는 헌터돔의 공식 룰대로 설령 사망자가 나온다고 해도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면 처벌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경기 결과에 따라 준혁이 승리 시 유럽연합이 올해 독점으로 사들인 골드 던전이 준혁에게 양도 된다는 사항이 있었다.
그 반대로 준혁이 패배할 경우의 거래 조건 사항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준혁이 곧바로 사인하고 맞은편에 앉은 이탈리아 협회장 지오반니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지오반니도 사인을 하고, 서로 계약서를 챙겼다.
이로써 헌터돔에서 치르게 될 헌터대전의 계약이 확정됐다.
“음…… 경기까지 이제 딱 4시간 정도 남았군. 식사들 하셔야지?”
지오반니가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준혁을 보며 말했다.
“넌 먹지 마라. 경기가 끝날 때쯤이면 다 게워 내게 될 테니까.”
준혁이 지오반니의 눈을 보며 말했다.
“하하, 이보게. 경기를 치를 상대는 내가 아니라네.”
“약속을 지켜라. 지오반니. 다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준혁이 방을 나갔다.
선우와 지우도 준혁을 따라 방을 나와 피에로에게 미리 안내받았던 대기실로 향했다.
“음식에 아마 독을 탔을 거야. 경기를 앞두고 식사 권유라니. 재수 없는 자식. 안 봐도 비디오지.”
선우가 비웃으며 말했다.
꼬르륵.
지우의 배에서 밥 달라는 알람이 울려 퍼졌다.
선우가 식은땀을 흘리며 지우를 힐끔 보았다.
“음식을 챙겨 올 걸 그랬네요. 여기가 그들의 헌터돔이라는 걸 생각 못 했어요.”
선우가 걱정하며 말했다.
“저, 전 배가 안 고파도 배에서 이런 소리가 나요. 정말이에요!”
선우가 지우를 보다가 눈가를 짚었다.
“우리 이지우 매니저. 한창 먹어야 할 나이인데…….”
“지, 진짜 괜찮아요, 협회장님!”
지우가 팔짝 뛰는 사이, 준혁이 대기실 문을 열었다.
준혁은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고 선우의 시선이 준혁이 보고 있는 TV로 향했다.
TV에서는 오늘 있을 경기를 중계하기 위한 방송이 벌써부터 시작 돼 있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이번에도 H&TV에서 헌터돔 경기의 진행을 맡게 된 최현호입니다. 오늘의 중계는 저 최현호와 해설을 맡아 주실 전문가 유현성 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MC최현호가 옆자리에 앉은 전문가에게 꾸벅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시청자분들에게 간단히 인사 좀 부탁드립니다.”
“헌터돔 경기에서 해설을 맡고 있는 유현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헌터돔 경기를 늘 매주 시청하고 있는데 이렇게 해설 전문가인 유현성님과 진행을 맡게 돼서 굉장히 영광입니다.”
“아휴 별말씀을요.”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 경기를 중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헌터돔 경기 같은 경우는 정식 경기는 아니고 귀환자님께서 나오실 예정이네요?”
“네. 갑작스럽게 진행이 된 건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비밀리에 예정이 되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고 없이 공개됐습니다.”
“정말 갑작스러웠죠?”
“그래서 한국 헌터돔 공식 사이트도 마비되는 헤프닝도 있었고요.”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죠. 귀환자님께서 헌터돔에서 경기를 한다는 것도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중요한 건 내용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유럽연합에서 데려온 헌터가 8명입니다. 귀환자께서는 이 헌터들. 그것도 최상위 랭커들로 구성된 8인의 헌터들과 경기를 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지금 전 세계 언론에서도 참 말이 많죠?”
전문가 유현성이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팍 찌푸렸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조건입니다. 헌터돔의 경기는 1대1 대전 혹은 팀 대전으로 진행하는데, 이번 경기는 8인을 상대로 귀환자님 혼자서 싸운다니. 전혀 상식적이지가 않은 경기입니다.”
“네. 그렇긴 합니다만, 조건은 정말 파격적이긴 해요. 만약 귀환자께서 이번 경기에서 이긴다면 현재 유럽연합이 강제로 독점 한 골드 던전을 모두 귀환자에게 양도하기로 했거든요.”
“조건이 파격적이긴 하지만…….”
헌터돔 전문 해설가 유현성이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헌터돔 역사에 남을, 비열한 경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귀환자님이 그래도 리더보드 1위이지 않습니까? 해 볼 만하다고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번 경기에 참가하는 헌터들은 리더보드 순위에는 없지만 사실상 리더보드에 근접하는 능력을 가진 최상위 랭커들이거든요.”
“예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거액을 받고 이번 헌터 대전에 참여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데이터를 보면, 최상위 랭커들은 리더보드 후보나 다름없는 헌터들입니다. 역사적으로 한 명이 다수의 비슷한 등급을 가진 헌터들을 상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 역시 이미 유명하고요.”
“귀환자께서 역대급으로 불리한 조건으로 경기를 치르게 될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단순히 불리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만큼, 심각하게 불공정한 규칙입니다.”
MC최현호가 진지해진 얼굴로 침음을 삼켰다.
“이런. 걱정이 많이 되는데. 사실 헌터돔 경기가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긴 하지만 일반 스포츠가 아닌 만큼 사고가 생길 수 있거든요?”
“웬만한 부상은 힐을 통해 치료가 되겠지만 치명상을 입을 경우가 가장 걱정되는 부분입니다.”
“경기를 앞두고 현재 유럽연합을 향한 비난이 거세지고 있지만, 미국 측에서는 별달리 반응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내에서는 피켓을 들고 이 불리한 조건에 대해 항의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일단 경기가 잡혔고, 귀환자님께서 경기를 수락하신 만큼 이 조건 그대로 진행되는 데 있어 크게 변동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네. 그렇군요. 무엇보다 부디 큰 사고 없이 경기가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4시에 H&TV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를 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에서 취재진을 모두 막은 관계로 인터뷰도 어려운 상황이고, 왜 갑자기 이런 이벤트가 잡히게 되었는지도 아직은 파악이 안 되고 있는데요. 우선은 귀환자님이 이번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게 우선이겠습니다.”
* * *
“경기까지 이제 겨우 30분 남았어. 다들 컨디션 괜찮지?”
한 사내의 물음에 유럽연합의 각성자들은 모두 자신만만한 표정들이었다.
“이거 꼭 글래디에이터가 된 기분인걸?”
“하하하하.”
“경기장으로 나가서 그 오만한 귀환자를 패 주자고.”
“진짜 멍청하지 않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릴 상대로 경기를 하겠다고 한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귀환자놈이 약에 절었을지도 모르지.”
몇몇 헌터들이 약이라는 말에 낄낄 웃었다.
“드디어 그 유명한 리더보더와 붙어 보는군.”
“리더보더들이 자리 보전하겠다고 숨어 지내는 거야 이미 유명한 얘기지. 별로 대단할 것도 없어.”
대기실에서 8인의 각국 랭커들이 웃으며 떠들었다.
긴장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여유로운 모습들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이길 테고, 난 돈만 받으면 돼. 이번에 벌어가는 돈으로 밤새 파티를 할 거야.”
“직접 보는 관중이 없는 이벤트 경기지만, 그 어느 때보다 피가 끓어올라. 자꾸만 그 고귀하신 챔피언이 처참한 몰골이 되는 게 상상돼거든.”
“내가 확실히 죽여 버리겠어.”
“헤이, 네덜란드 친구. 그래도 경기의 룰을 잊지는 마. 전투 불능의 상태까지 몰아붙이거나 기권하게 만드는 게 신성한 헌터돔의 규칙이야.”
“규칙? 개나 주라지. 아주 아작을 내 버릴 거다.”
긴 머리의 네덜란드 헌터가 거울 속의 야수 같은 자신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이탈리아 협회장 지오반니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일시에 랭커들이 지오반니를 보았다.
“컨디션들은 어떠십니까?”
지오반니의 물음에 랭커들이 문제없다는 듯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지오반니는 그런 랭커들이 아주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번 경기가 유리한 만큼 어느 정도는 언론을 생각해서라도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 주도록 해 주세요. 귀환자에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여 줘야 합니다.”
“당연하지. 뼈까지 갈아 마셔 주겠어.”
네덜란드 헌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주 좋군요. 시원한 경기 부탁드립니다. 경기만 확실히 해주시면 서비스로 추가금은 섭섭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챙겨 드리지요.”
지오반니 입에서 추가금이란 얘기가 나오자 랭커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역시 지오반니야.”
“뭐 어차피 돈 때문에 온 건데 마다할 필요는 없지.”
“오히려 적당히 손봐 주는 게 귀환자에겐 더한 굴욕이 될 수 있어. 끝을 맺어주자고.”
“지오반니 회장의 분부대로, 시원하게 가지고 놀아 주자고.”
“어려울 것 없지.”
대부분의 헌터들이 기분좋게 웃었다.
귀환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긴 머리의 네덜란트 헌터만을 제외하고.
“귀환자는 전 세계를 지배할 것처럼 오만하게 굴었어.”
네덜란드 헌터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핏대를 세웠다.
그는 이미 벌써부터 경기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중이었다.
“더 월드를 통해 지나친 폭력성을 내비친다면 오히려 당신만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수적 우위로 귀환자를 패배로 몰아넣는 것으로도 충분해요. 우리 유럽연합이라는 세력의 힘을 대외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도 잡게 되는 겁니다.”
“…….”
“우리가 빛날 수 있는 순간을 굳이 감정적으로 망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오반니가 빙그렛 웃는 얼굴로 말했다.
혼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네덜란드 헌터가 호흡을 진정시키면서 주변을 보았다.
모두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마지못해 혀를 찼다.
“그냥 즐기는 거야. 이 순간을. 실수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들 말라고.”
주변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기 전에 굳이 분란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건 랭커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부디 돈과 유럽연합의 명예. 그 모두를 가져가시길!”
간단하게 자신들의 아이템 장비를 점검한 랭커들이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대기실을 나와 경기장으로 향했다.
스피커에서 경기 출정을 준비해 달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오반니는 귀환자와의 경기를 위해 움직이는 랭커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제아무리 잘났다 하여도 혼자서 위업을 쌓을 수는 없는 일.
과분한 순위에 미쳐 귀환자가 세상을 만만하게 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 확신하면서 이탈리아 협회장 지오반니 역시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VIP 관전룸으로 향했다.
“잊을 수 없는 날이 되겠군.”
지오반니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