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47화
준비했던 그림이 망가졌다.
유럽연합은 이런 식으로 회담이 진행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마피아처럼 구는군.”
이탈리아 협회장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준혁을 보았다.
“본토 마피아는 너희들이지. 난 혼자잖아? 작당을 해서 시장을 장악하려 든 건 너희들이야. 감당할 수도 없는 던전의 수량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건 범죄 행위다. 날 견제하고 싶었던 거라면 방향이 틀렸어.”
툭. 툭.
주목시키려는 듯 이탈리아 협회장 지오반니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자네 정말 혼자서 우리 유럽연합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정말?”
준혁이 지오반니의 눈을 빤히 마주보았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확인해도 돼.”
준혁이 말했다.
지오반니가 주변 협회장들을 한 차례 훑어봤다.
그는 협회장들과 눈짓을 주고받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감이 참…… 뭐라고 해야 할지. 그래 다 좋아. 자네가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거래를 하지. 자네가 좋아하는 합법적인 제안을 하나 할까 싶은데. 들어 보겠나?”
준혁이 말해보라는 듯 눈짓했다.
“우선 하나 말해 두자면 자네가 오해하는 게 있어.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던전은 각자 개인의 소유이네. 그리고 그 던전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공식적으로 회원을 등록한 유럽연합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것을 우리가 통합한 것 뿐.”
“…….”
“그런 우리에게 혼자서 시장 독점을 멈추라는 것은 지나치게 선을 넘는 행위야. 설령 우리가 시장을 독점한다고 하더라도, 자네는 물론 한국 전체가 이 시장을 모두 소화할 수 있나? 난 없다고 보네. 그러니 이 시장 독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면 그만큼 능력을 보여 줘야겠지. 자네가 그럴 만한 사람인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우린 확인하고 싶네.”
“방식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협회장들이 직접 데리고 있는 랭커들이 있어. 만약 그 여덟 명을 상대로 헌터돔에서 헌터대전을 치러 이긴다면 유럽연합이 독점한 골드 던전을 자네에게 넘겨주지. 하지만 반대로 자네가 진다면? 한국 협회와 귀환자 자네가 보유한 골드 던전을 모두 양도하는 것은 물론 향후 10년 안에 유럽연합에게 마나석 1천 킬로를 지급하게. 이 조건, 받아들이겠나?”
“헌터대전?”
“스포츠 같은 거야. 엄연한 공식 경기지. 물론 특별한 이벤트 경기인 만큼 일반적인 헌터대전과 경기 조건은 다르지만 말일세.”
준혁은 대체 지오반니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멍청한 제안을 한단 말인가?
만약 그의 말대로 이 거래가 성사된다면, 그 말도 안 될만큼 쉬운 게임 하나로 유럽연합의 던전을 한입에 삼킬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 정도 수량이라면 충분히 어비스로 가는 균열의 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기관총을 들고 꿩을 잡으러 왔더니 호랑이가 잡아먹어 달라고 달려드는 꼴이었다.
준혁이 그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준혁의 생각과 달리 그들은 준혁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이 거래에 자신이 없다면 우리 유럽연합을 상대로 추잡한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할 걸세. 그리고 우리 유럽연합은 결단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야. 그건 국제적으로도 우리 서로에게도 창피하고 더러운 일이 될 테지. 전쟁은 혹독한 걸세.”
지오반니가 웃으며 준혁에게 손짓했다.
“자, 어쩔 텐가? 자네가 정말 실력이 있다면 이 거래를 받아들일 것 같은데?”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선우가 화난 얼굴로 한 발 나섰다.
“더러운 새끼들! 한 개인의 각성자가 랭커 8명을 상대로 혼자 싸우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선우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거칠게 소리쳤다.
지오반니는 시커먼 턱수염을 매만지며 끌끌 웃었다.
“리더보더도 아니고 일개 랭커들이네. 그리고 그 정도도 못할 거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이탈리아 협회를 쳐들어와 이렇게 난장을 피운단 말인가? 애초에 말이 안 돼잖나?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면서 이 정도도 할 수 없다? 선을 넘고 있는 건 외려 자네들이야.”
지오반니가 피투성이인 피에로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렇게, 우린 지금 불필요한 전쟁을 하지 않고자 나름 선의의 제안을 하는 걸세. 아니 오히려 아량을 베푼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 리더보드라는 1위라는 자리에 취해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건 바로 자네들에게!”
지오반니가 혼내듯이 뱃심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선우가 지오반니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준혁이 일어서서 선우의 앞에 섰다.
“진정해.”
“형. 일반 헌터도 아니고 세계 랭커들이야. 리더보드가 아니라고 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고!”
준혁이 선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내가 책임져.”
“형, 하지만 이건.”
“날 믿어.”
준혁이 선우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닫았다.
도저히 설득할 수 없을만큼, 단호한 눈빛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준혁이 지오반니를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지오반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선 들어 보고 결정하지. 말해 보게. 그 조건이라는 걸.”
“더 월드 라이브.”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지오반니가 쿡쿡 웃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하하!”
그 모습을 보고 주변의 협회장들도 넘어갈 듯이 웃어 댔다.
“하겠다고? 정말? 자네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싶어 환장을 한 건가? 하하하하! 이 정도 놀아 줬으면 적당히 숙이고 자네 나라로 돌아가는 게 순서야.”
“내일이 주말이니 그 헌터대전이란 일정은 내일 오후 4시로 잡아. 미리 준비해놨다며? 가능하겠지?”
지오반니가 시가를 물면서 진한 웃음을 얼굴에 걸었다.
“맙소사. 우리 챔피언께서 제정신이 아니군.”
이탈리아 협회장 지오반니는 물론 유럽연합의 협회장들이 모두 승냥이처럼 웃고 있었다.
그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수락하는 건가?”
“더 월드 스트리밍 라이브로 이벤트를 벌일만한 아주 훌륭한 무대가 될 것 같군.”
파격적인 조건은 여론의 물매를 피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모든 조건이 유럽연합에게 유리하게 작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지오반니가 준혁을 향해 만개한 웃음을 지었다.
“좋네. 그 조건! 내 기분 좋게 수락하지.”
“내일 오전까지 계약서 준비해.”
“도망치지나 말게. 챔피언.”
준혁이 돌아섰다.
동생과 매니저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타자 협회장들은 마치 축제라도 벌이는 것처럼 웃어 대고 있었다.
준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준혁의 입가엔 선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주변의 방해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는 출발 전에 이미 매니저인 지우가 찾아 놓은 상황이라 레스토랑 안에는 다른 손님이 없었다.
분위기와 야외 풍경은 좋았지만 테이블에 앉은 선우와 지우의 표정은 편하지 않았다.
선우는 생각이 많았고 지우는 경직되어 있었다.
“이지우 매니저는 꽤 많이 놀랐을 거야. 나도 예상은 했지만 분위기는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고.”
선우가 간담이 서늘했다는 듯 말했다.
지우가 긴장한 표정으로 준혁을 흘겨보았다.
“하나를 양보하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빼앗으려 드는 게 저런 양아치들이니까.”
“난 형을 믿지만, 무려 세계 최상위 랭커들이야. 혼자서 8인과 대전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으니까 유럽연합에서도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 거겠지. 형. 이렇게 된 이상 최설화 힐러도 부르는 게.”
“괜찮아.”
준혁이 편안한 얼굴로 답하곤 물을 마셨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는 거야? 크게 다칠지도 몰라. 내 기억 안에 최상위 랭커들은 형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강한 헌터들이야. 리더보더라는 게 결국에 다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야.”
“이번 헌터대전이라는 그 유치한 장난질이 끝나고 나면 준비해. 최대한 빨리 던전을 돌 거니까. 스케줄을 던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
“……알았어.”
선우가 근심을 삼키며 대답했다.
잠시간 멀리서 눈치를 보던 지배인이 선우에게 다가가 음식을 내와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선우가 어서 가져오라고 말했고, 직원들이 음식을 가져왔다.
다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런 공기 속에서, 준혁은 보이지 않게 웃었다.
본래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다.
일을 진행하려면 때론 거칠어질 수도, 그리고 걱정을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결국 모두 해결 될 일이다.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으음. 우리 이제 식사할까요?”
지우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숟가락과 포크를 들며 애교 있게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준혁이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위에는 이탈리아 정통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다.
선우가 슬픈 표정으로 음식을 응시했다.
지우가 웃으며 파스타를 먹었고, 준혁도 옅게 웃으며 따듯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표정이 좋지 않은 건, 오직 협회장이자 준혁의 동생 한선우 뿐이었다.
* * *
“파천 길드에서 긴급 공지사항을 발표했습니다. 내일 주말인 토요일. 귀환자가 유럽연합의 대표 랭커들과 공식 헌터대전을 치를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시간은 오후 16시. 귀환자는 8인의 유럽연합 대표 헌터들과 대전을 치르게 됩니다. 이번 대전에 유럽연합이 소유한 골드 던전이 걸려 있는 만큼 역사적인 헌터대전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헌터대전으로 전운이 감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금일, 세계 증시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보도 중인 뉴스를 보며 선우는 야외 테라스 의자에 앉았다.
밀라노 풍경을 보며 선우는 내일 있을 헌터대전에 대해 생각했다.
헌터 대전은 전 세계에서 주최하는 일종의 스포츠였다.
최상급 수준의 보호 시설을 갖춘 헌터돔은 던전 물질을 통해 리더보드가 전력을 써도 보호할 수 있을 만큼의 방어력을 갖추고 있다.
그 돔 안에서 헌터들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 일종의 스파링과 같은 개념의 대전을 치르게 된다.
하지만 헌터대전을 일반 스파링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헌터인 만큼 스킬에 힘을 조절할 수 없으니 사망자가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보통 랭커들은 이런 야만적인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실력 검증을 통해 스카웃을 받고자 하는 신인 헌터들이 주 무대로 삼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귀환자가 8인의 랭커들과 헌터 대전을 치르는 것이다.
더 월드 스트리밍으로 실시간 중계되는 헌터대전.
선우는 형을 믿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었다.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한다면 설령 승리한다고 해도 귀환자의 이미지는 추락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귀환자가 패배하게 된다면 그 이미지 타격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유럽연합이 자신 있게 이번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
역사적으로 다수를 상대로 이긴 랭커는 없었다.
그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다.
최상위 랭커와 리더보더의 격차는 선우가 알기로 분명, 아주 차이에 불과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