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46화
“귀환자가 여기까지 와서 헌터대전을 피한다면 더 볼 것 있겠습니까? 앞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그 작은 나라에만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해야죠.”
“최상급 헌터들과의 상성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 혼자 잘난 듯이 미쳐 날뛰겠지. 그럼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오. 아마 개처럼 덤벼들었다가 여느 개처럼 흠씬 두들겨 맞으면 다시 조용해질 것이오.”
“순위 하나로 까불다니. 우릴 만만히 봐도 정도가 넘었지.”
“안타깝군요. 조금만 똑똑했더라면 자신의 이용 가치를 잘 살릴 수 있었을 텐데.”
“10년 동안 잠이나 자던 놈이 뭘 알겠습니까?”
“하하하하하!”
독일 협회장의 말에 회담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서로 눈을 빛내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협회장들을 보면서 이탈리아 협회장 지오반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귀환자를 누르는 방법은 간단했다.
굳이 놀아 줄 필요 없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려 주기만 하면 될 일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기량을 가진 헌터라고 해도 단 한 명일 뿐.
개인이 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다.
챔피언이라고 해서 다수의 복서를 상대할 수 없듯이 이 각성자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다른 상성과 더불어 다수의 공격을 막는 건 실현 불가능하다.
수준이 한 단계 아래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이번에 각국에서 불러 모은 헌터들은 리더보더는 아니지만 그들과 종이 한 장 차이의 실력을 가진 세계 최상위 수준의 랭커들이었다.
프로 간의 대결에서 숫자가 가지는 이점을 극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냥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군.’
지오반니가 끌끌 웃었다.
이번 프로젝트명은 일명 귀환자 사냥.
경험 없는 애송이에게 세상의 무서움을 알려 줄 차례였다.
이번 기회에 아주 강하게 밟아 놓으면 결국 놈은 머리를 숙이고 주인을 찾게 될 것이다.
그때 지오반니는 귀환자를 자신의 사냥개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철저히 기를 죽이고 서열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했다.
“한계를 경험해 본 적 없는 어린 챔피언의 좌절과 절망은 드라마틱하죠. 어서 빨리 그 얼굴을 보고 싶군요.”
취한 듯이 말하는 지오반니의 목소리는 도화선이 되어 회담실에 불을 지른 효과를 냈다.
“꼬맹이 새끼! 큰 세상 앞에 저 하나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깨닫게 될 것이오!”
“벌써부터 눈에 선합니다. 귀환자가 비참하게 쓰러져 있는 모습이!”
“오랜만에 아주 귀한 사냥 구경을 하게 생겼습니다?”
“하하하하하하!”
회담실에 다시 한번 박장대소가 울려 퍼졌다.
* * *
이탈리아 공항에 도착하자 리무진이 준비되어 있었다.
유럽연합 협회 측에서 미리 준비한 차량.
그 리무진을 타고 협회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지만, 거리를 구경하면서 대화를 하다 보니 이동시간이 그리 지루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준혁은 한동안 말없이 이탈리아의 거리를 구경했고 그 끝에 유럽연합의 대표인 이탈리아 협회 앞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역시 협회 건물에 상당한 공을 들인 게 보였다.
장인의 나라답게 마치 다수의 천재 작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하나 세밀하게 만든 디테일적인 부분부터 순백의 화이트로 만든 새하얀 건축의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상징성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리무진을 타고 가면서 협회 건물 앞에 이를 때쯤 선우는 주변의 분위기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것이 협회로 향해 올라가는 넓은 계단에는 수십 명에 달하는 헌터들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우가 알기로 어느 나라든 협회가 손님을 앞두고 이렇게 헌터를 배치하는 건 듣도 보도 못했던 일이었다.
대부분의 경호 헌터들은 작은 인력으로 감시하면서 긴급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협회를 지키는 헌터들은 늘 대기 상태로 있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헌터들을 배치해 놓았다는 건 이탈리아 협회를 찾는 준혁을 자극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밖에 없었다.
“꽤 도발적이네. 평소와 다르게 헌터들을 배치해 놓은 걸 보면.”
선우가 말했다.
준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우와 매니저 지우를 대동하고서 이탈리아 협회 건물로 가는 순백의 계단을 밟았다.
계단의 양쪽 끝에 선 헌터들이 그런 준혁을 힐끔거렸다.
“유치하네, 정말.”
선우가 배치된 헌터들을 보며 웃었다.
건물 본관 입구에 이르자 수트 차림의 중년인이 약 다섯에 달하는 헌터들을 등 뒤에 대동한 채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턱에 노란 수염이 번지듯이 나 있는 체격 좋은 사내가 양팔을 벌렸다.
“우리 이탈리아 협회에 오신 귀환자님을 환영합니다. 저는 협회 본관으로 안내를 명령받은 협회팀 소속 헌터 피에로입니다.”
더 월드 시스템에 의해 피에로의 언어가 자동으로 해석되어 준혁의 눈앞에 문자로 나타났다.
그 사이 피에로가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을 건 채로 준혁을 노려보았다.
피에로는 입구를 틀어막은 채로 인사에 답하라는 듯 자세를 취했다.
선우는 불쾌하다는 듯 얼굴이 굳어졌고 매니저 지우는 왜 저러지 하는 눈빛으로 피에로를 보았다.
반면 별달리 감흥 없는 눈으로 피에로를 보던 준혁이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피에로는 비켜서지 않고 준혁을 노려보았다.
준혁이 가까이 걸어와 피에로의 바로 앞에 가서 섰다.
준혁의 눈동자와 피에로의 시선이 서로 섞여들었다.
“네가 내 길을 막은 거지, 지금?”
준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피에로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요. 이탈리아 협회에 들어서기 전, 매너부터 갖추시길 바…….”
준혁의 주먹이 피에로의 얼굴에 스트레이트로 꽂혔다.
나무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피에로가 로비 입구의 회전문을 깨고 날아가 바닥을 청소하듯이 미끄러지더니 로비 중앙에 대(大)자로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피에로 주변에 있던 헌터들이 반사적으로 병장기를 꺼냈다.
채채채채챙!
지우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고 선우는 곧바로 병장기를 꺼낸 헌터들을 주시했다.
만에 하나 그들이 움직인다면 이는 사실상 전쟁이 촉발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듯 이탈리아 협회 쪽의 헌터들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무기를 겨눌 뿐 공격을 취하진 못했다.
준혁은 무기를 꺼낸 헌터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로비 중심에 누워 있는 피에로에게 걸어갔다.
“쿨럭……!”
피에로는 천장에 달려 있는 샹들리에를 보며 입 밖으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코는 깨졌고, 입술은 반쯤 찢어져 있었으며 이 세 개가 빠졌다.
준혁이 피에로를 내려다봤다.
피에로가 준혁을 올려다보며 꿈틀거렸다.
“일어나, 얼른.”
피에로는 준혁이 방금 말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준혁의 눈은 진심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살심.
정해진 선을 넘을 때마다 죽음이 가까워짐을 본능적으로 인지했다.
피에로는 공포를 느끼며 안간힘을 다해 일어서려고 노력했다.
피에로가 정신없이 휘청거리는 몸으로 겨우 중심을 잡아 섰다.
그때 준혁의 주먹이 다시 날아들었다.
주먹에 맞은 피에로가 허공을 날았다가 떨어져, 엘리베이터 앞으로 미끄러졌다.
피에로와 함께 있던 부하 헌터들은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대다가 황급히 상부로 연락하기 위해 전화를 돌렸지만, 전화는 모두 꺼져 있었다.
회담 시간에 전화기를 켜 놓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비서의 역할을 대신해 안내를 맡은 것이 피에로였다.
명령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자신들로서는 결단이 서지 않아 방법이 없었다.
귀환자를 상대로 독단적인 판단을 내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들로서는 현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피에로 님! 명령을 주시면……!”
피에로가 부하들에게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도발을 하긴 했지만, 회담을 시작하기도 전에 민감한 싸움이 벌어지는 건 피에로서로도 피해야 할 문제였다.
피에로는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엉망이 된 얼굴로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준혁이 다가오자 피에로가 피로 물든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회, 회담실로…… 안내하겠습니다.”
피에로가 전신을 벌벌 떨었다.
그의 얼굴은 피범벅이었고 숨쉬기도 힘든 듯 색색거렸다.
선우가 지우를 데리고 준혁의 뒤에 섰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피에로가 겨우 정신을 붙잡고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라고 공손히 손짓했다.
준혁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선우와 지우도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준혁이 어서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떨고 있던 피에로도 탑승.
그는 5층을 눌렀다.
버튼에 피가 묻어 나왔다.
피에로가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 숨을 헐떡였다.
“시끄러워.”
준혁의 말에 피에로가 손으로 반쯤 찢어진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 * *
“아시겠지만 귀환자가 오면 우리의 기세를 보여 줘야 합니다.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요.”
“힘만 세다고 어디 무섭나? 그런 고릴라는 마취총으로 잡으면 되는 거요.”
“하하하하하! 그거 적절한 표현이오!”
“결국 우리가 이 회담을 이끌어 나가겠지만 만에 하나 거칠게 나올 경우.”
“절대! 고작 귀환자 하나가 유럽연합 전체와 각을 세우진 못할 겁니다. 이 회담실로 들어오는 순간 위축되는 어깨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지능이 떨어지는 괴물을 상대하는 법은 쉽소.”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애송이일 뿐이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교육을…….”
따앙!
회담실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에 회담실의 협회장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엘리베이터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거기서 얼굴이 피로 물들 피에로가 준혁의 발길질에 의해 밀렸다가 바닥에 철퍽 엎어졌다.
협회장들이 일제히 충격에 물든 표정으로 준혁과 피에로를 번갈아 보며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렸다.
상상도 해 본 적 없던 등장이었다.
준혁은 엎어진 채로 꿈틀거리는 피에로의 머리카락을 틀어쥐고 일으켜 세웠다.
숨을 헐떡이는 피에로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코는 뭉개지고 이가 빠진 채, 피로 물들어 있는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이 친구가 내 길을 막더군.”
준혁이 협회장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곤 옆으로 휙 밀어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있던 피에로가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준혁이 하나밖에 없는 자리를 빤히 보다가 충격에 빠져 있는 협회장들을 보며 긴 테이블의 상석과 맞은편에 위치한 자리에 앉았다.
준혁이 의자에 등을 편안하게 기대고 앉았다.
“대한민국 각성자. 한준혁이다. 아니 귀환자라고 소개해야 하나?”
이렇게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협회장들의 침묵 속에서, 이탈리아 협회장 지오반니가 화난 얼굴로 준혁을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하는 짓이요? 진짜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요?”
“싸우자고 든 건 그쪽이 먼저일 텐데.”
지켜보고 있던 지우가 손수건을 건네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준혁은 지우에게 받은 손수건으로 주먹에 묻은 피를 슥슥 닦았다.
“괴변이군. 우리가 싸움을 걸다니?!”
준혁이 손수건을 꽉 쥐며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협회장들이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잘 들어. 지금부터 모르는 척 이상한 개소리를 하는 놈들이 있으면 그놈부터 죽인다.”
순식간에 살벌한 공기가 휘몰아쳤다.
한 소리 하려고 준비하던 유럽연합의 협회장들이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귀환자라도 이런 자리에서 무력행사를 마음먹었을리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난 여기 놀러 온 게 아니야. 던전 수급을 정상화하러 왔다. 시장을 정상화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너희들도 자신이 있으니까 일을 벌였겠지. 전쟁을 원해? 얼마든지. 난 준비되어 있다.”
준혁이 협회장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말했다.
“…….”
협회장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바쁘게 서로를 살피며 무언의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준혁이 양팔을 테이블 위에 툭 올리고 상체를 기울였다.
“시작하자. 난 오늘 안에 대답을 들어야겠어.”
준혁이 마치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로 협회장들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