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44화
파천 길드의 회사 차량인 국산 SUV를 타고 지우는 캐슬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유다연을 데려다주고 귀환자님의 던전 의복을 체크한 뒤 몇 가지 일정을 치러야 했다.
“그냥 캐슬 밖에 내려 주세요. 버스 타고 가면 돼서요.”
“오늘 타이트한 일정이 아니라서 괜찮아요. 언니랑 커피 타임을 못 가지는 건 정말 아쉽지만 다음에 기회가 있겠죠?”
“그럼요. 언제든지요.”
용병 사무실까지는 멀지 않았다. 앞으로 자주 연락하자는 얘기와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고 유다연을 내려 줬다.
“고마워요!”
유다연과 간단히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지우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신호를 받고 멈췄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보고 지우는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 잘 지내고 있어?
“당연하지.”
- 아버지가 걱정이 많아.
“하하. 거짓말하지 마. 우리 회장님 머릿속엔 사업 생각밖에 없을걸?”
- 네 생각을 얼마나 하는데.
“됐네요.”
- 거긴 지낼 만해?
“응. 일도 재밌고, 다 좋아.”
-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집엔?
“바빠서 못 가. 가 봤자 아부지 또 회사 물려받으라는 잔소리할 게 뻔하지.”
- 아버지 입장에선 그럴 수 있지. 힘들게 키운 회사 남한테 주고 싶겠니.
“난 내 힘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거야. 고등학생때부터 그랬잖아. 난 그렇게 살 거고 변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난 우리 딸이 그래서 자랑스러워.
“역시 우리 엄만 내 가치를 잘 안다니깐? 내가 얼마짜리야?”
- 에이. 돈으로 매길 수 있니. 굳이 따지자면 한 1경 정도?
지우가 쿡쿡 웃었다.
“1경이 얼만지는 알아?”
- 몰라.
전화기 너머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조만간 선물 사 들고 들를게. 워낙 바빠서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 됐어. 엄마 아빠가 사 주는 건 받지도 않으면서 넌 네 마음대로?
“그럼 안 사줘도 돼? 내복 사려고 했는데.”
- 날씨가 추워지긴 했지?
“이제 그만 끊어 여사님. 나 일 해야 돼. 의류 체크해야 되거든.”
- 저기 지우야. 부탁이 있는데.
“응? 별 일이야. 엄마가 무슨 부탁?”
지우가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하면서 웃었다.
- 귀환자님 사인 좀 받아 줄 수 있을까? 그…… 엄마 친구들이 너무 시끄럽게 굴어서…… 호호호.
“사인?”
- 힘들겠니?
“부탁은 한번 해 보기나 할게. 몇 장 정도 필요한데?”
- 한 100장 정도?
“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한 10장 정도까진 빌어 볼게. 해 주실진 모르겠지만?”
- 정말?
“엣헴. 효도하는 거지?”
- 그럼 그럼. 당연하지. 저기 그리고…… 네 아빠가 귀환자님이랑 식사 한 번 하고 싶다고.
지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지우야 다른 뜻은 아닐 거야.
“다른 뜻 맞아. 대기업 회장이 귀환자님이랑 식사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그 사이에 매니저인 내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지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 줄 수도…….
“내조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잘 들어 엄마. 청와대에서조차 아직 캐슬 문턱도 못 밟았어.”
- 아빠는 그냥 우리 딸이 힘 좀 쓸 수 있나 싶었나봐.
“여전히 아빠는 날 존중하지 않고 있어.”
- 지우야. 그런 거 아니야.
“하루 이틀이야? 신경 쓰지 마. 난 여전히 단단히, 내 길을 갈 거니까. 이 정도로 흔들릴 일 없어.
- 그래도 정말 대단해, 우리 딸?
“음?”
- 우리 지우 이제 사실상 청와대 비서실장보다 권력이 센 거잖아. 이제 아빠보다도 높은 사람이 됐네?
“엄마! 아빠한테 물들었어? 나 지금 슬프려고 해. 꽃과 요리밖에 모르던 우리 엄마가 어쩌다가…….”
- 농담이야, 농담. 넌 엄마 아빠가 널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를 거야.
“아빠한테 날 이용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해 줘. 비서학과 무시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양심도 없어 정말.”
- 무뚝뚝한 아빠가 말 몇 마디 붙여보려고 그냥 한 말이었을 거야.
“절대 아닐걸. 역시 엄마는 아빠 편이지. 끊어 엄마. 나 진짜 이제 일해야 해.”
- 힘내 우리 딸. 파이팅! 사랑해.
“응. 나도 사랑은 해.”
지우는 스마트폰을 끄고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에서 내린 지우가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청담동에 위치한 이 가게는 최고급 던전용 의복을 판매하는 곳으로 유명해서 국내 VIP들이 자주 찾는 명품 매장이었다.
물건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캐슬로 보내 달라고 했다.
이어 미팅실로 들어갔다.
던전 의복은 자동차처럼 옵션을 따로 추가할 수 있기 때문에 모니터를 보면서 상담을 통해 적합한 던전 의복을 세팅해서 주문했다.
일을 끝내고 나오자 부사장과 직원이 주차장까지 따라 나왔다.
겨우 돌려보내고 차에 탄 지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귀환자님을 모시고 있다 보니 만나는 사람 모두 자신을 어려워했다.
- 우리 지우 이제 사실 청와대 비서실장보다 권력이 센 거잖아.
문뜩 엄마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처음엔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였다.
엄마 말대로 자신은 협회장인 한선우 길드마스터를 제외하면 귀환자와 사실상 가장 가까운 최측근이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자꾸 모르는 번호로 전화나 문자가 오긴 했었지.’
이런 쪽으로는 전혀 경험이 없었던 터라 생각을 별로 안 해 봤는데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까진 전화나 문자였지만 조만간 사람들이 은근하게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캐슬에서 지내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지냈으면?’
닭살이 돋았다.
“으으윽!”
얼마나 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옆구리를 찔렀을지 생각만 해도 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한 차례 몸서리를 친 지우는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면서 블루투스가 연결된 무선 이어폰을 끼고 항공사로 전화를 걸었다.
“전용기 어떻게 됐어요?”
- 그렇지 않아도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점검은 모두 마쳤고, 현 시간부로 언제든지 이용 가능한 상태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지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협회장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이지우 매니저.
“협회장님. 새벽에 메일 주신대로 전용기 계약해서 점검 마쳤어요. 현 시간부로 언제든지 즉시 출발 가능 상태라고 하네요.”
- 수고했어요.
“귀환자님이랑 해외로 가시는 거예요?”
- 이탈리아 협회로 가게 될 겁니다. 이지우 씨도 동행하게 될 거예요.
“이탈리아 협회로 가시는 거면 비즈니스 업무겠네요?”
- 비즈니스라고 할 수 있을까? 뭐, 좋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 참, 이지우 매니저.
“네?”
- 아무리 생각해도, 형의 매니저로 너무 잘 뽑은 것 같아요. 기대 이상입니다.
“하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 형을 잘 보좌해 주고 있으니 제가 더 감사하죠.
“저, 협회장님.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 네, 그럼요. 말해 봐요.
“협회장님은 귀환자님 매니저로 왜 저를 뽑으셨어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파천 길드 재무팀 신입사원. 처음엔 몰랐는데 지내다 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 자리가 훨씬 어려운 자리 같기도 해서요. 귀환자님을 모시기엔 많이 모자라 보였을 텐데요.”
- 쉬운 질문이네요. 답은 간단합니다. 형에겐 똑똑하고 센스 있고 능력 있는, 그러면서도 순수한 사람이 필요했어요.
“순수하다는 건 권력이나 돈을 탐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인가요?”
- 정확합니다. 답변이 됐나요?
지우가 심호흡을 하곤 미소 지었다.
“네. 충분히요.”
- 그럼 비행 날 뵙죠.
처음에 파천 길드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그리고 귀환자님의 매니저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만 해도 정신없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했던 터라 잘 몰랐다.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며 무거운 자리인지.
하지만 지우는 여전히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내가 타락하기엔 너무 젊고 아름답지.”
지우가 웃으며 악셀을 꾹 밟았다.
* * *
보좌관이 협회장실 앞에서 숨을 가다듬으며 노크했다.
“들어와.”
답변을 듣자마자 보좌관이 문을 열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탈리아 협회장 지오반니는 벽면에 걸린 대형 TV를 통해 뉴스를 보고 있었다.
지오반니의 옆에 선 보좌관의 시선이 TV로 향했다.
“나스닥이 랠리를 이어 가던 중 월 스트리트에 소문이 돌았습니다. 파천 길드에서 지분을 매각하고 있다는 정보였고 확인 결과 장 마감 전, 파천 길드가 미국에 투자한 모든 주식을 매각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매각 사유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 영향으로 나스닥은 소폭의 하락세로 전환 중입니다.”
지오반니가 담배를 뻑뻑 피우며 TV를 향해 턱짓했다.
“사실이야?”
지오반니가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보좌관을 보았다.
보좌관의 얼굴은 불편한 기색으로 가득했다.
“예,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저 보도국에서 알 정도면.”
“죄송합니다. 미리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워낙 티 나지 않게 매각하다 보니.”
“월스트리트 애송이들 보다도 늦어서야 쯧.”
보좌관이 할 말 없다는 듯 얼굴을 숙였다.
“……죄송합니다.”
재떨이에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끈 지오반니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한숨 쉬었다.
“그래서 파천 길드 의도가 뭐야?”
“한국의 협회에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내용은?”
“귀환자가 협회장님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오반니가 헛웃음을 흘렸다.
“망할 꼬맹이. 누가 만나나 준대? 그 힘만 센 코끼리 새끼 뒈질라고…….”
“거절할 경우…….”
“거절할 경우 뭐?”
“……강제로 협회 문을 열겠답니다.”
지오반니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뭐라고?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야?”
“메일 내용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럼, 지금 미국 자산을 전부 매도한 건 우리 유럽연합과 전쟁도 가능하다는 거야?”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지오반니가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아니. 골드 던전 좀 우리가 챙겼다고 전쟁까지 생각한다고? 귀환자 그거…… 그거 미친 거 아니야?”
“엄밀히 말하면 1차적으로는 미팅을 요청한 거긴 합니다만...”
지오반니가 보좌관을 노려보았다.
보좌관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유렵연합을 어떻게 보고 망할 새끼가.”
TV를 노려보던 지오반니가 생각이 많아진 듯 제자리를 서성였다.
“귀환자 말이야. 더 월드에서 봤던 거랑은 이미지가 다르네. 응?”
“…….”
“보좌관!”
지오반니가 버럭 소리질렀다.
“예. 보스.”
“어떻게 생각해?”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보단 1차적으로 우선 미팅을 진행하는 쪽이 좋을 듯합니다.”
“만나서 뭐라 그래? 네 밥그릇 빼앗아서 미안하다. 그래 몇 개 돌려줄게. 그렇게?”
“그보단 아무래도 비즈니스 적으로…….”
“그 미친놈들은 지금 이미 비즈니스가 아니잖아! 협박 메일을 받았잖아!”
지오반니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유럽연합 회담 쪽으로 유도하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자칫하면 대화를 나눠 보기도 전에 금융계에 심각한 타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에서도 어느 정도는 조치를 하게 될 겁니다.”
“날짜는?”
“내일까지 준비하시랍니다.”
“와…… 귀환자 이 미친 새끼!”
지오반니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손가락 끝을 모았다.
“우선, 이번 일에 손잡은 정상들을 내일까지 불러 모으셔야 합니다.”
지오반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미친놈이라도 각국 정상이 모인 자리에서 미친 짓을 하진 않겠지.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정상에서 서로 거래할 만한 비즈니스 제안이 있어야 할 겁니다.”
지오반니가 핏발 선 눈으로 보좌관을 돌아봤다.
“꼬맹이들에게 사업을 좀 가르쳐야겠군. 진행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