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43화
저녁을 앞두고 파티를 위해 메이드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다이닝 룸의 긴 테이블 위로는 그릇과 포크를 놓을 자리를 제외하곤 빈틈없이 화려한 만찬들로 가득했다.
거실을 통해 넓은 통유리 문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바로 앞마당에도 음식과 술이 진열되어 있었다.
기분 좋은 음악이 최고급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캐슬의 마당에서 보는 주변 조경은 가까운 곳만 해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노을이 질 무렵.
선우가 캐슬에 도착했다.
캐슬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 지우가 선우를 반겼다.
“오셨어요, 협회장님?”
지우가 생긋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형이 유다연 씨를 구해 냈다면서요?”
선우가 지우와 캐슬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걱정 안 되셨어요?”
“제가 어떻게 걱정하겠어요. 형이 귀환자인데. 당연히 잘 구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죠.”
“저는 떨려 죽는 줄 알았어요. 혹시나 사고가 생기면 어쩌나 하고.”
“음. 이지우 매니저, 형을 의심한 겁니까?”
“그럴 리가요. 그저 전 다연 언니가 걱정이 됐을 뿐이에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유다연씨는 좀 어때요? 컨디션은 괜찮은 것 같아요?”
지우가 기분 좋게 웃었다.
“힐러님 덕분에 빨리 회복한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형은요?”
거실에 이르렀는데도 준혁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서재에 계실 거예요. 책이 이렇게나 많은 줄 몰랐다면서 푹 빠지신 것 같던데요?”
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형이랑 책이랑은 어울리지 않는데.”
“던전 관련 서적 위주로 보고 계신 것 같았어요.”
“그건 이해가 되네. 형 좀 만나고 올게요.”
“네, 협회장님.”
선우는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메이드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긴 복도를 지나 큰 문 앞에 이르렀다.
캐슬의 규모에 어울릴 만한 서재가 있다는 건 선우도 알고 있었다.
오래전 신문 기사에 날 정도였다.
이곳 캐슬에 귀한 자료로 쓸 만한 책들이 모여 있다는 건 이미 캐슬 밖으로도 유명했다.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서재가 드러났다.
약 200평에 달하는 곳은 평면도형으로 봤을 때 반원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중앙에 한 사람이 쓸 커다란 알루미늄 테이블이 있고 그 주변으로는 모두 책이 도배되어 있다시피 높고 넓게 책들이 펼쳐져 있었다.
외국의 멋진 도서관과 견주어도 지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준혁은 서재의 중심의 알루미늄 테이블 앞에 편하게 기대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형이 서재에 있는 모습은 적응이 안 돼. 갑자기 왜 이래?”
선우가 농담을 섞어 말했다.
책을 읽고 있던 준혁이 선우를 힐끔 보았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번 기회에 나에게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
선우가 힘 빠진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얼마나 천재가 되어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하하, 평범한 인간인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가네.”
준혁의 부근에 이른 선우가 준혁이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던전윤리학. 교과서 중 하나지. 그만큼 논란이 많은 책이기도 하고.”
준혁이 책을 덮고 일어섰다.
완독이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렇게 책을 읽다 보면 던전을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겠지.”
준혁이 책을 휙 날리자 마치 날개를 단 새처럼 책은 공중을 날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책이 정확히 본래 자리로 돌아가 꼽히는 걸 보고 선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그런 건?”
마술처럼 높은 책장에 되돌아간 걸 보고 선우가 기막힌 듯 준혁을 돌아봤다.
책상 정리를 마친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모른다니?”
“……팔다리 쓰는 걸 설명하긴 어렵잖아.”
선우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해했어.”
“어디 안 좋아?”
“아니. 현타가 조금 왔을 뿐이야.”
“현타? 그게 뭐야?”
“현자타임이라고…… 됐어. 그런 게 있어.”
“밥 먹자. 이제 저녁 시간이네.”
“그 전에, 형. 아직 이탈리아 협회장한테 메일을 안 보냈어. 형 의견을 들어 봐야 할 것 같아서.”
앞장서서 서재를 나가는 준혁의 옆에 따라붙으면서 선우가 말했다.
“그건 그때 얘기했지 않아?”
“어감이라는 게 꽤 중요하거든. 이탈리아의 협회장한테 직통 메일을 쓰려니 머리가 좀 아파서.”
“메시지의 분위기를 말하는 거지?”
“맞아.”
“한국의 귀환자가 이탈리아 협회장을 만나길 원한다. 거부한다면 귀환자는 강제로 협회의 문을 열게 될 거다. 그 정도면 충분해. 더 길 것도 짧을 것도 없지.”
“형의 생각이나 말투는 예상은 했지만, 그건 너무 직접적일 수 있어. 그렇다고 돌려 말한다고 의미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아무래도 이건 국제적 외교니까.”
준혁이 걸음을 멈추고 선우를 보며 어깨를 꽉 잡았다.
“상대가 비신사적으로 나오면 우리도 비신사적으로 굴어야 해. 난 내 명성보다 내 시간이 더 귀하거든.”
“난 형의 명성까지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다른 방법은?”
선우가 긴 숨을 뱉었다가 웃었다.
“그럼 이 이야기는 끝난 걸로. 그렇지?”
준혁이 쇄기를 박듯 물었다.
“싸움보단 대화를 원하는 시민들에게 미움을 받을 지도 몰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정의와 힘이야. 그 이외엔 약자의 변명이 될 뿐이고. 역사적으로 미국이 그래왔듯이. 무엇보다 이건 거창한 일이 아니야. 당연한 일인거지.”
준혁이 거실을 지나 마당으로 나갔다.
매니저 지우와 용병 유다연, 그리고 최설화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준혁의 뒷모습이 선우의 눈에 들어왔다.
일상을 즐기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우가 혼자 걸음을 옮겨 캐슬 현관 쪽으로 나왔다.
운전기사를 물리고 혼자 차량에 탑승하면서 블루투스가 연결된 무선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짐에 따라 조명이 켜지고 있었다.
먼 곳의 풍경을 보던 선우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자마자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 네 협회장님.
“이따가 증시 장이 열리는 즉시 파천 길드가 미국에 투자한 모든 자산을 매각하도록 해.”
- ……전부 매각하시는 거 맞으세요?
“부동산을 제외한 금융 상품만. 그리고 달러는 모두 원화로 바꾸도록 하고. 매각은 가급적으로 티 나지 않게. 그리고 월스트리트가 눈치 챌 때쯤 전량 매각하도록 해. 파생 상품까지 전부.”
- 알겠습니다. 다른 분부 있으세요?
“매각 이후 달러까지 처분하고 난 다음 내가 준비했던 메일 있지? 이탈리아 협회로 쏴 버려.”
- 발송 전에 마지막으로 전화 드릴까요?
“아니.”
-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 네?
“오늘 밤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 저도 그럴 거예요. 필요하시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
선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고요한 침묵이 차 안에 감돌았다.
앞으로 펼쳐질 언론의 칼질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선우는 차량 시트를 뒤로 살짝 젖히며 한숨을 뱉었다.
“내일이면 체크메이트…….”
생각이 많아지던 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매니저 지우가 창가에 붙어서 차량 안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문을 내리자 미소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안에 계셨네요. 저녁 준비가 끝나서 협회장님 모시러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배고팠는데.”
선우가 차에서 내렸다.
“메인 요리가 뭐죠?”
지우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메인이 뭐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메인이 많던데요?”
“좋네요. 가서 많이 먹죠.”
“넵!”
다이닝 룸으로 들어가자 이미 모두들 착석해 있었다.
상석에 앉은 준혁. 그리고 그 옆으로 자신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맞은편은 최설화가 앉아 있었다.
용병 유다연까지.
선우는 지우와 함께 저녁을 위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까 초대는 받았는데, 왜 이런 파티가 시작됐는지 얘기를 못 들었어. 형 성격에 직접 파티를 연 건 아닐 테고.”
선우의 말에 모두가 준혁을 바라봤다.
“유다연 씨를 구하기 위해 들어간 던전 안에서 내가 찾고자 했던 중요한 물건을 찾게 됐거든.”
다이닝 룸 모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축하해요, 귀환자님.”
지우가 가장 먼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던전에 갈 때마다 준혁이 얼마나 의욕적이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지우였다.
단순히 돈과 명예를 위한 던전행이 아니었음을, 지우는 잘 알고 있었다.
“축하드려요.”
뒤이어 힐러, 최설화도 축하를 건넸다.
“축하해, 형.”
“축하해요.”
동생에 이어 용병 유다연도 축하 인사를 전했다.
“유다연 씨.”
“네?”
“사실…… 유다연 씨가 위험에 빠진 건 제게 책임이 있었습니다.”
“책임이라니?”
선우가 되물었다.
“처음 그 먹구름이 나타났을 때부터. 의도적으로 유다연 씨를 통해 던전을 오픈한 거였어. 처음부터 유다연 씨를 노린 것도 나를 던전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고. 결국 모든 건 계획되어 있었다는 얘기야.”
예상치 못한 소식에 다이닝 룸의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졌다.
그러자 유다연이 그 분위기를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귀환자님은 저를 구할 때까지 몰랐었던 거죠?”
유다연이 준혁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준혁은 유다연의 눈빛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환자님은 저를 위해 나서 주셨어요. 그건 이유야 어떻든 귀환자님의 도움을 받은 거예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유다연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귀환자라는 이유로 갖다 부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그녀의 진지함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선우야. 용병팀 안에서 유다연 씨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줘. 내가 하고 싶은데 난 그런 건 잘 몰라서.”
“알아볼게.”
선우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다연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귀환자님이 신경 써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선우가 얼굴을 내밀었다.
“고생한 만큼 빛을 봐야죠. 실질적 인사권은 제게 있어요. 거절은 거절하겠습니다.”
선우의 장난스런 미소를 보고 유다연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됐다.
선우가 박수를 짝 쳤다.
“자 그럼 이제 파티를 시작하죠!”
밝은 분위기 속에 화려한 만찬이 시작됐다.
* * *
월스트리트의 금융 기관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 하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자 동료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뭘 그렇게 봐?”
직원이 모니터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일부 주식 물량이 대거 빠지고 있어.”
“랠리가 이어져도 빠지는 주식은 빠지잖아?”
“만약 이 자금이 모두 한곳으로 빠지는 거라면?”
그제야 동료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딘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거겠지. 기관이든 그 반대쪽이든. 그렇다는 건…… 어?”
갑자기 급속도로 큰 자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금융 시장에 충격을 가할 정도의 금액은 아니었지만, 특정 몇 가지 주식의 차트 하락 폭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었다.
“젠장.”
직원의 욕설에 동료가 어깨를 붙였다.
“왜 그래?”
“기관 자금이 빠지는 주식들의 공통점을 찾아냈어.”
“어디 쪽이야?”
“파천 길드.”
“파천 길드?”
“한국의 협회장이 운영했던, 그리고 여전히 비밀리에 회장으로 활동 중인 길드.”
“그럼 파천 길드에서 미국에 투자한 자금을 빼고 있다는 소리야?”
“아마도.”
“그건 한국 자국에 투자를 확대하기 위한 걸로 볼 수 있잖아?”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로 빨리 지분을 매각하는 건 이상해. 누가 봐도 좋은 회사의 지분까지 팔고 있잖아?”
“퍼펙트 스톰까지 보는 거야?”
“뭐가 됐든 우리 물량부터 줄여 놓자. 지금이면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야. 시장이 변화를 알아차리기 전에 정리하고 선물을 숏 포지션으로 전환해야 해.”
“밥 살게.”
“술까지 사.”
“물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