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42화
준혁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마법의 용광로에서 흘러나온 쇳물이 하늘에서, 마치 유성처럼 빠르게 주변을 메워 나가고 있었다.
던전의 하늘 범위를 모두 장악하고 나면 이 곳 전부는 저 용광로의 쇳물로 가득 잠기리라.
작정하고 준비했을 테니, 쉽게 퇴로를 찾긴 힘들 것이다.
멸마의 서.
악마 소환.
땅을 깨고, 차원을 찢으며 악마들이 등장했다.
데스나이트까지 바닥을 디디며 모든 악마들이 준혁의 앞으로 도열했다.
“던전핵을 찾아라. 단서가 될만한 걸 가져와. 실패하면 너희들은 이 자리에서 소멸한다.”
준혁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악마들이 온몸의 근육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준혁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악마들.
그 사이 준혁 역시 천리안을 주시하며 속도를 끌어 올렸다.
진흙처럼 변했던 땅은 이미 용암이 끓는 것처럼 쇳물에 축축히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던전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마치 박스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던전의 지형 모두를 수색했지만, 여전히 천리안은 던전핵의 위치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던전에 던전핵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천리안이 찾아내지 못한다는 건 숨겨진 것.
그렇다는 건 발로그가 던전핵을 어딘가에 숨겨 놓았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하늘에도 없고 지상에도 없다면.’
무너진 성을 뒤지고 있는 악마들을 보던 준혁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쇳물로 질척이는 땅은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이 안에 있겠지.”
신성한 힘을 담은 빛의 검이 독성마저 내뿜는, 땅으로 내리꽂혔다.
빛의 검이 힘을 발휘하자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준혁의 주변으로 땅이 갈라져 나갔다.
마법 용광로의 쇳물이 사방으로 비산하거나 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쳤다.
특수 제작된 마법 의복마저 일부분을 태워 나갈 정도로 극도의 고온을 가진 발로그의 쇳물들이 으깨진 땅의 틈 사이로, 마치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갈라진 땅 사이 아래, 마치 바닷물처럼 쇳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그 순간 천리안의 지도가 던전핵의 위치를 알렸다.
준혁은 빠르게 지도가 알려 주는 위치로 이동했다.
갈라진 땅 사이로, 쇳물에 반쯤 잠긴 던전핵이 보였다.
던전핵은 석상처럼 변해 버린 용병 유다연.
그녀였다.
준혁이 던전핵을 향해 손을 뻗자 섭물의 힘에 의해 던전핵이 통째로 물결치는 쇳물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점차 떠올라 이내 준혁의 바로 앞에 이른, 던전핵은 유다연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육신은 마치 조각상처럼 보였다.
하늘에서 쇳물이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준혁은 자신의 앞에 둥둥 떠오른 조각같은 유다연을 품에 안았다.
준혁의 손끝에서 시작된 찬란한 빛이 던전핵이 된 유다연의 전신을 비추었다.
이내 던전핵에서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강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금이 가는 소리에 이어 파편이 떨어져 나왔다.
뒤이어 유다연을 감싸고 있던 던전핵의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투둑 투둑.
딱딱한 껍질이 벗겨지듯 던전핵의 외피가 부서져 나갔다.
그에 던전핵에 갇혀 있던 유다연의 피부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마치 껍질을 벗고 새로 태어난 존재처럼, 완전한 인간으로서 다시 돌아온 유다연은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유다연을 품에 안은 준혁의 시선이 2시 방향으로 향했다.
탈출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준혁은 땅과 하늘에서 폭발하거나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는 쇳물 사이를 태연하게 걸었다.
준혁이 만든 마력의 장막이 폭발과 쇳물로부터 유다연을 지키고 있었다.
‘천리안이 없었으면 위험했겠어.’
던전에 대한 사고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자신의 강함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이번 사례를 통해 배웠다.
그건 곧 마계와 인간계의 차이이기도 했다.
철저히 혼자였을 때와 달리, 귀환 후로는 더 많은 부분을 생각해야 했다.
던전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시각의 확장이 준혁의 눈앞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더 활용도가 높은 시스템 보상과 던전 아이템이 필요해.’
평범한 게이트와 달리 블랙홀처럼 검게 소용돌이치는 탈출 게이트 앞에서 준혁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유다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끙끙 앓고 있던 표정이 아니라 마치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죠. 당신의 일상으로.”
준혁이 게이트를 향해 던전을 나가려는 순간 시스템 알림이 준혁의 눈앞에 나타났다.
[멸마의 서가 균열의 틈을 찾아냈습니다.]
그 순간 준혁의 눈동자가 커졌다.
악마들을 소환하기 위해 펼쳐놓은 멸마의 서가 똑똑하게도 클리어된 던전 안에서 균열의 틈을 찾아낸 것이다.
신수와 신물을 구할 수 있는 어비스로의 연결 통로, 균열의 틈.
탈출 게이트 앞에서 준혁은 심장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탈출 게이트의 유지시간은 보통 30분에서 짧게는 15분.
시간은 충분했지만, 상황상으로는 여유롭다 할 수 없었다.
준혁은 우선 게이트를 통해 나왔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힐러, 최설화가 책을 덮었다.
“귀환자님!”
힐러 최설화가 벌떡 일어섰다.
준혁은 최설화에게 안고 있던 유다연을 넘겨 주었다.
“다시 들어가야 해.”
영문 모를 얼굴로 유다연을 보던 최설화가 준혁을 보았다.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없어.”
준혁이 몸을 돌려 다시 게이트를 통해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던전으로 돌아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 세상을 불태워 버릴 것만 같던 불길이 꺼지고 있었다.
용암처럼이나 뜨겁게 부글거리던 쇳물도 식어가고 있었다. 갈라진 땅 사이로 쇳물이 식으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던전핵이 파괴되어 던전의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인 듯했다.
준혁은 탈출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균열의 틈을 찾아야 했다.
균열의 틈이 위치한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 번 발견 되면 멸마의 서가 그 장소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마치 오로라와 같은 빛이 한 곳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준혁은 멸마의 서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이동했다.
몸을 날려 순식간에 멸마의 서가 알린 위치에 선 준혁은 심호흡을 했다.
그토록이나 만나고 싶었던 균열의 틈이 준혁의 눈앞에 있었다.
균열의 틈은 아주 작았다.
손가락 세 개 정도가 들어갈 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허공에 찢어져 있듯이 열려있는 균열의 틈 사이로 에메랄드 빛이 새어 나왔다.
홀린 듯이 그 빛과 틈을 보던 준혁이 빛의 검을 만들어냈다.
균열의 틈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이 틈이 커질 수 있도록 강제로 열어 내야 했다.
준혁의 검이 균열의 틈에 거칠게 박혀 들어갔다.
검이 균열의 틈을 깨트린 순간 하나의 빛이 모든 공간을 가득 채웠다.
준혁이 잠시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준혁은 균열의 틈 너머에 있었다.
준혁은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큐브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는데 피라미드 내부를 연상케 하는 공간이었다.
사각으로 된 각진 공간은 아주 넓고 깨끗했으며 냉랭했다.
준혁의 시선이 자연스레 먼 곳에 위치한 단상으로 향했다.
준혁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내 단상 앞에 이르렀을 때, 준혁은 유리관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은 신비로운 루비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열쇠였다.
준혁은 유리관의 뚜껑을 열어 그 열쇠를 손으로 집었다.
- 어비스의 열쇠를 획득했습니다.
어비스의 열쇠
: 균열의 틈을 통해 어비스에 입장할 자격을 얻었다.
- 멸마의 서가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 이에 새로운 권능을 기록합니다.
쿠궁.
[권능 : 격노] - 1단계
: 신성력이 열 배로 상승하지만 마력의 소모 역시 그에 상응한다.
준혁의 눈동자가 떨렸다.
현재의 무력에 열 배를 더하는 힘.
역시 멸마의 서가 가진 권능은 일반적인 능력의 수치를 초월한다.
더욱이 일반적인 수치도 아니고, 가장 강화하기 어려운 능력인 신성력의 10배수 된 힘.
이 정도 힘을 부여받게 되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 힘에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이 상대해야 할 대상은 단순히 인간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놈들이 아니었으니까.
준혁은 손바닥 위에 올려 둔 키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 열쇠가 없었다면 설령 균열의 틈에서 ‘어비스의 문’을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운이 좋았어.’
준혁은 희미하게 웃으며 손에 놓인 열쇠를 꽉 쥐었다.
열쇠의 존재가 생생하게 손끝에서부터 느껴졌다.
“엑시트.”
준혁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꽉 막혀 있던 사각 공간에서 전류가 튀기는 소리와 함께 탈출 게이트가 준혁의 앞으로 이동해 새롭게 열렸다.
준혁은 어비스의 열쇠를 꽉 쥐고서 게이트를 통과했다.
* * *
눈을 깜박이다가 혼미한 정신이 조금씩 안정되는 걸 느꼈다.
그리고 비로소 시야가 완전해졌을 때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방으로 들어온 건 매니저 지우였다.
“언니! 정신이 들어요?”
지우가 호다닥 달려와 유다연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다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상체를 일으켰다.
지우가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 걸 도와주었다.
“……귀환자님이 날 구한 거지?”
지우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속했던 것처럼 무사히요.”
유다연이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거리자 지우가 다시 잡아 주었다.
“지금 움직이는 것보단 조금 쉬다가.”
“귀환자님을 뵙고 싶어.”
“최설화 힐러님이 깨어나면 몸이 조금 굳어있을 거라고 했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유다연은 지우의 부축을 받아 2층에서 내려왔다.
계단에서 반쯤 내려왔을 때쯤, 유다연은 멍하게 거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준혁은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메이드들이 멈춰 서서 유다연을 쳐다봤다.
찻잔을 들고 이동하던 최설화 힐러가 멈춰 서서 유다연을 올려다봤다.
마지막으로 준혁이 시선이 유다연에게 닿았다.
어쩐지 그 풍경이 유다연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불안은 늘 존재했다.
그리고 그 불안이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가능성에서 해방되어 완전한 안전지대로 돌아온 것이다.
1층 거실로 내려와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던 때.
“지금 이거 꿈 아니죠?”
유다연이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걸 축하해요.”
최설화 힐러가 그렇게 말하곤 들고 있던 차를 마셨다.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메이드들도 미소지었다.
웃고 있지 않은 건 준혁뿐이었다.
유다연의 시선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준혁의 눈빛과 마주쳤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온 걸 축하합니다. 유다연 씨.”
준혁이 말했다.
유다연은 울컥한 감정이 올라오는 듯 눈가를 짚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다연이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지켜보던 지우도 울면서 유다연을 꼭 끌어안았다.
메이드들도 유다연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울면서 눈물을 닦고 있는 유다연을 지켜보던 준혁은 조용히 모르는 척 커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