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41화
성의 내부로 들어가자 횃불이 어두운 공간을 밝혔다.
횃불은 일정한 간격으로 천장 부근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바깥보다도 훨씬 뜨거운 열기가 성 내부에 감돌았다.
아지랑이 같은 것이 눈 앞을 흐리게 만들정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통에 몸부림칠 정도의 뜨거운 열기였으나 준혁은 태연하게 복도를 걸었다.
마수는 보이지 않았다.
흔적도 없었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넓고 이글거리는 복도를 지나면서 준혁은 지금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기억이 날 듯 나지 않았다.
자꾸만 익숙한 무언가가 아른거린다.
까앙. 까앙.
걸음을 옮길수록,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수십의 악마들이 서로 엉켜 있는 조각상을 지나자 아주 넓은 홀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르게 됐다.
준혁은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눈으로 빠르게 공간을 훑었다.
새빨간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엔 균열이 나 있었다. 그 균열 사이로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방에는 마법 용광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용광로에서 나오는 연기와 열기는 실로 지독했다.
준혁조차 그 열기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마력으로 신체를 보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호를 뚫고 들어올 정도의 열기였다.
그건 곧 이 공간에서 내뿜는 열기의 원천은,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사방에서 철철 흐르는 쇳물에서는 불꽃이 팡팡 튀었다.
그 뜨겁고 붉은빛으로 가득한 공간의 끝 무렵.
뿌연 연기 너머, 거대한 누군가가 철과 같은 것을 망치로 두드리고 있었다.
뒷모습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머리에 거대한 두 개의 뿔을 달고 있다.
악마의 날개를 달았으며 거대한 근육질 몸에 벌어진 틈 사이에서는 현재의 이 공간처럼 불길이 흐르고 있었다.
거대한 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이 작아 보일 정도로 큰 덩치다.
그리고 그 존재를 가까이서 보게 되자 준혁의 오래된 기억의 파편이 다시 재생되었다.
“발로그.”
준혁이 놈의 이름을 말했다.
발로그는 마계에서 마왕의 오른팔이었다.
높은 충심으로 마왕을 섬겼으나 마왕이 죽자 발로그는 사라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마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준혁이 발로그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발로그에 대해 무수히 많은 얘기를 전해 들어서였다.
마왕보다 강한 힘을 가졌지만 놈은 마왕을 섬겼고, 마왕의 악마로서 마계를 살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랜만이구나. 사냥꾼.”
발로그가 준혁을 돌아봤다.
보는 순간 압도당할 만큼 엄청난 포스를 가진 머리였다.
뿔의 크기 하며, 사나운 외모. 그리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핏빛의 눈과 괴기스러운 주둥이는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할 만큼 굉장한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난 너를 만난 적이 없어.”
준혁이 냉담하게 말했다.
발로그가 웃음 지었다.
“넌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때 넌 무저갱 속을 헤매고 있을 때였으니. 그때 진즉에 너를 해치웠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으련만.”
“마계에서조차 숨어 지내던 네가 왜 여기 있지?”
“마왕께서 네게 죽은 그날. 나는 마신 케르니안께 맹세했다. 내 반드시 잃어버린 힘을 찾아, 사냥꾼을 죽이겠노라고.”
준혁이 웃었다.
“나를? 네가?”
발로그가 자신이 만든 검을 물속에 담가 식혔다.
치이익! 하고 잿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평범한 방법이라면 힘들겠지. 하지만 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자신이 만든 칼을 보던 발로그의 새빨간 눈이 준혁에게 향했다.
“소멸한 마신들의 영혼을 모아 이 검에 새겨 넣었지. 이 검에는 네놈 때문에 스스로 소멸한 마신들의 원한이 깃들어 있다. 그 어둠의 원이 느껴지는가?”
준혁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땅을 내려다보았다.
침묵하는 준혁을 보고 발로그가 눈을 치켜떴다.
“그 원을 내가 갚을 것이다.”
발로그의 눈이 용광로의 쇳물처럼 변했다.
“주인님의 원한. 그리고 마신들의 한이 바로 내가 만든 이 검 안에 있다.”
땅이 흔들리고, 바닥 곳곳이 깨지면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준혁이 볼만하다는 듯 훑어봤다.
“옛날 생각나네.”
불길이 휘몰아치는 주변을 보며 준혁이 말을 이었다.
“요즘 인간계에 있다 보니 마계에서의 내 모습이 떠오르지 않아.”
준혁이 발로그에게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추억이라는 게 있는 줄 몰랐다. 발로그.”
쿵.
발을 굴린, 발로그가 마법을 일으켰다.
검은빛의 마계어가 허공에 새겨지더니 준혁을 향해 화염 폭풍이 휘몰아쳤다.
사방에서 평범한 불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온도의 불이 준혁을 향해 쏟아지듯 밀려들었다.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시커멓게 녹아 있을 뿐, 준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발로그의 등 뒤로, 포지션을 잡은 준혁이 이미 허리를 비틀며 주먹을 리볼버처럼 장전하고 있었다.
준혁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무형의 힘이 발로그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발로그는 허리가 휙 꺾이더니 그대로 벽에 날아가 처박혔다.
벽이 허물어지면서 불덩어리와 불꽃이 떨어져 내렸다.
발로그가 신음을 흘리며 신경질적으로 벽돌과 불덩어리들을 걷어 내며 일어섰다.
“마왕이 죽을 때가 생각나.”
준혁이 말했다.
발로그의 눈에서 새빨간 쇳물과도 같은 눈물이 흘렀다.
“그 때 아마…… 내게 살고 싶다고 애원했었지.”
발로그가 비명 같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발작하듯 휘두른 검에는 꽤 무시 못 할 힘이 실려 있었다.
폭발하는 불꽃과 함께 준혁을 향해 칼날이 떨어졌다.
전력을 담은 힘이었지만 발로그의 칼은 애꿎은 바닥만을 파괴할 뿐이었다.
마치 싱크홀처럼 변해 버린 바닥을 내려다보던 발로그 옆으로 준혁이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빛의 검을 손에 쥔 준혁의 칼날이 발로그의 어깨를 내리그었다.
간단하게 절단되며 발로그의 팔은 마신들의 혼이 깃든 검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검은 시커먼 바닥 아래로 추락하듯 떨어져 내렸다.
발로그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다 벽으로 가서 등을 대고 헐떡였다.
날개는 마치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넌 마왕의 옆에 없었잖아? 듣기로 내가 무서워 도망쳤다고 하던데.”
“주인께서는 나를 숨기셨다.”
발로그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숨겨?”
“주인께서는 미래를 예언하신 것이다. 악마사냥꾼이 자신은 물론 마신까지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하여 마계는 파멸을 맞이할 것이라고.”
“하긴 마왕은 인간을 많이 닮아 있었지. 인간이라도 해도 믿을 만큼. 외모는 물론 지성까지도.”
준혁이 웃었다.
“그래 맞아. 진짜 인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어.”
발로그가 그리운 듯이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내게 복수하기 위해 인간계로 내려온 건 앞뒤가 안 맞아. 발로그.”
발로그가 공격을 하려고 하자 준혁이 먼저 움직였다. 준혁의 발차기가 발로그의 커다란 뿔을 부러트렸다.
부러진 뿔이 바닥에 쿵 하고 떨어져 굴렀다. 뿔이 부러져 나간 발로그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대체 어떻게 한 인간이 마계를 초월할 수 있단 말인가……!”
발로그의 얼굴은 추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쇳물 같은 눈물이 줄줄 흐르는 발로그의 눈에서는 마치 아지랑이처럼 살심이 어려 있었다.
“어떻게, 왜? 인간계로 온 것이냐. 발로그.”
준혁이 서릿발 같은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발로그는 답하지 않았다.
준혁의 주먹이 발로그의 얼굴을 짓뭉갰다.
피가 터지고 안면이 깨져 나가고 얼굴이 뒤틀렸다.
발로그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준혁의 주먹에 다시 빛의 힘이 실렸다.
별달리 감정이 실리지 않은 주먹이 다시 한 번 발로그의 머리를 뭉갰다.
그나마 성했던 남은 뿔 하나가 마저 부러져 나가고 목이 꺾이면서 광대가 함몰됐다.
피로 물든 채 서글프게 울던 발로그가 입 밖으로 연거푸 피를 울컥 토했다.
발로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죽음에 이를 것만 같았다.
준혁은 마치 자살이라도 하러 온 것처럼 구는 발로그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제 와서 왜?
마신들의 혼 이야기 따위는 핑계다.
그런 걸로 이길 수 있는 게 한준혁 자신이었다면 애초에 인간계로 돌아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발로그도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공이군…….”
발로그가 흐리멍덩하게 한 곳을 보며 말했다.
“뭐?”
준혁의 시선이 발로그가 보고 있는 곳을 따라갔다.
그곳엔 수십 개의 용광로가 만들어 낸 마법의 쇳물이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금빛의 쇳물은 마계 문자가 새겨진 벽면으로 마치 빨려 들어가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광경이었다.
준혁이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려는 순간.
“충성의 눈물을, 영원히 영혼에 새기겠나이다. 나의 주인 블라디카르토여.”
발로그의 육신이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더니 이내 폭발하듯 터졌다.
사방으로 살점과 핏물이 비산했다.
준혁이 불쾌한 표정으로 발로그가 있던 쪽을 보았다.
그곳엔 발로그 대신 핏물이 고인 웅덩이와 놈이 만든 칼 한 자루만이 땅에 꽂혀 있을 뿐이었다.
준혁은 발로그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 마음에 걸렸다.
함정에 빠진 것 같은 기분.
성이 곧 무너지려는 듯 지반이 흔들리고 불붙은 돌들이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준혁은 천리안을 통해 던전핵으로 변했을 유다연을 찾아보았다.
발로그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리안의 지도에는 던전핵이 표시되지 않고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준혁이 우선 뚫려 있는 창문을 통해 성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땅에 착지해 위를 올려다보자 성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거대한 불길을 확 일으키며 성이 주저앉듯이 무너져 버렸다.
뒤이어 무너진 성에서 마치 용암과도 같은 쇳물이 검은 하늘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치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과 이어진 길을 만들기라도 하듯이 하늘을 향해 치즈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불길을 머금은 용암 같은 마법의 쇳물은 그렇게 끊임없이 하늘을 뚫어 버리기라도 할 듯 솟아났다.
“설마…….”
이는 불의 주인이자, 불의 대장장이라 불리었던 발로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흔한 수하 하나 이끌지 않고, 불타는 성전에서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싸움이 아닌 마법 장치의 완전한 마지막 완성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총 27개의 마법 용광로가 만들어 낸 마법의 쇳물이 하늘 위에서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땅에서는 용암과 같은 불길을 머금은 액체가 땅을 질퍽하게 만들었다.
결국, 하나의 공간 안에 준혁을 쇳물 속으로 녹여 버리기 위한 발로그의 작전이었다.
유다연을 이용하고 자신을 이 곳으로 몰아넣으려고 했던 근원은 발로그의 복수였다.
준혁이 발로그가 죽었던 자리를 돌아봤다.
만약 이 공간이 모두 용광로의 쇳물로 가득 차기 전에 유다연을 구해 내지 못한다면 유다연은 물론 준혁 자신조차도 위험할 수 있었다.
이 던전의 공간은 발로그가 오직 준혁에게 복수하기 위한 불의 공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