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39화
“내 목적은 던전에서 내가 원하는 걸 찾아내는 거야. 만약 그 길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준혁의 눈동자가 조용히 타올랐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걸 불태울 것만 같은 열기였다.
“내 방식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어.”
“……형의 방식은 어떤 건데?”
선우가 긴장한 눈으로 준혁을 응시했다.
이곳에 온 이유.
그건 최종 결정권자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다.
최종 결정권자는 그 누구도 아닌 귀환자 한준혁이다.
준혁은 잠시 침묵했다.
“망설일 필요 없어. 얘기해 형.”
선우가 말했다.
“망설인 적 없어. 단지 네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될 뿐이야.”
“형이 대단한 건 알지만 나 역시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데 단 한 번도 쉬웠던 적 없어.”
준혁이 와인 빛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형의 판단은?”
“전쟁이다. 그 전에 선전 포고부터.”
선우는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형을 향한 시선이 부정적으로 도배될 거야.”
“전쟁을 시작한 건 우리가 아니야. 우린 충분히 신사적이었어. 아니야?”
선우는 할 말을 잃었다.
준혁의 말대로였다.
시작은 우리가 아니다.
싸움을 시작한 건 유럽연합이다.
그들은 강제적으로 연합의 힘을 앞세워 시장을 독점했다.
이는 불문율을 어기는 범죄 행위.
던전 시장의 교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우는 귀환자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았다.
전쟁이 촉발될 수도 있다는 긴장감은, 그 불안과 공포의 화살이 최상위 포식자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
두려움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환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 것도 단호히.
“……그러고보면 난 지독한 이상주의자였을지도.”
선우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준혁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준혁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기엔 너무 훌륭한 기업가로 컸어.”
준혁을 멍하니 보던 선우가 결국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형 생각엔 그 선전 포고를 어떻게 했으면 하는데?”
준혁이 먼 곳을 봤다.
“용병 유다연을 던전에서 구하고 나면 스케줄을 잡아. 귀환자가 유럽연합의 대표. 이탈리아 협회장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거절하면?”
“강제로 들어갈 거라고 해.”
준혁이 그렇게 말하곤 와인을 마셨다.
선우가 눈가를 짚으며 웃었다.
“확실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되겠네.”
와인을 보던 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술을 마시면 취한다고 하던데.”
“느낌이 안 와?”
“전혀.”
“누가 귀환자 아니랄까 봐.”
선우가 벽에 위치한 진열장으로 가서 꼬냑과 스트레이트 잔을 가져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취해야겠어.”
스트레이트 잔 두 개를 꼬냑으로 가득 채웠다.
잔을 모두 채우고 선우가 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술을 신기하게 보던 준혁이 스트레이트 잔을 들었다.
짝 하고 건배를 하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화끈한 열기가 목을 지나자 준혁이 놀란 눈으로 선우를 보았다.
“이거 독 아니야?”
선우가 웃으며 잔을 다시 채웠다.
“이제 진짜 어른이 된 거야.”
“나쁘지 않네.”
준혁이 다시 꼬냑을 털어 넣었다.
가슴이 뜨꺼워지는 술에 숨을 훅 뱉었다.
그 사이 선우는 최상급 오디오로 음악을 틀었다.
고급스러운 음율이 다이닝룸을 채웠다.
선우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술잔을 다시 채웠다.
선우가 불을 붙이곤, 갑갑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술 마실 때 가끔이야. 자주는 아니고.”
준혁의 시선에 질문이 있음을 알고 선우가 미리 답했다.
“몸에 안 좋을 텐데.”
“스트레스보단 이쪽이 나으니까. 이제 막 어른이 된 형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선우가 웃으며 다시 잔을 들어 보였다.
준혁이 건배를 해 주자, 선우가 꼬냑을 휙 마시곤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멋있어 보여도 형은 손대지 마.”
준혁이 웃자 선우도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이렇게 큰 건지.”
“10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야.”
“하긴.”
준혁이 술을 마셨다.
취기가 조금 올라왔다.
“우린 무력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력을 앞세우면 마피아 같은 가문이 될지도 몰라.”
선우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마피아에게 정의는 없어.”
준혁이 술을 따라 주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그거 멋진데?”
“알아 나도. 내가 멋진 거.”
선우가 쿡쿡 웃었다.
“형. 그거 알아? 각성자도 술에는 면역이 없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간으로 흡수되는 알콜은 막을 수가 없다는 거지.”
준혁이 의아한 눈으로 선우를 보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술로는 형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미안하지만 난 지는 방법을 몰라.”
“정말?”
“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넌 나 못 이겨.”
선우가 상처받은 얼굴이 되었다.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형이니까.”
준혁이 진지하게 잔을 들어 보였다.
선우가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시 태어나면 내가 형으로 태어날 거야.”
짝! 하고 잔이 부딪쳤다.
“무조건 내가 형이야.”
“하하. 승부욕이...”
선우가 술을 마시려다 말고 놀란 눈으로 준혁을 보았다.
준혁은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다.
* * *
“지원이나 연구팀이 필요합니까?”
선우의 물음에 유다연이 누운 침대 앞에서 일어난 힐러 최설화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공부할 만한 케이스이기도 하고, 제가 케어하는 게 귀환자님 마음에 드실 겁니다.”
“형이랑은 좀 어때요? 친해졌어요?”
최설화가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네요.”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지겠죠.”
선우가 유다연의 팔에 새겨진 문양을 가까이서 확인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이례적인 케이스.’
선우는 CCTV로 봤던 충격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하늘에 떠 있던 먹구름이 마치 타깃팅을 정한 것처럼 유다연의 몸을 뚫고 들어갔다.
일반적으로 유출된 마수에 의해 헌터가 던전핵이 되어 던전을 형성하는 경우와는 전혀 다른 케이스였다.
이상 현상이기에 긴장될 수밖에 없다.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으니까.
그건 곧 사고 혹은 심하면 재해로 이어질 수 있다.
“중요한 인물입니다. 문제가 있거나 지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그러죠.”
선우는 1층으로 내려왔다.
매니저 지우가 선우를 따라 함께 캐슬 본관 밖으로 나섰다.
“형 좀 잘 좀 챙겨 줘요.”
“네. 협회장님. 걱정마세요.”
지우가 생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선우가 차에서 봉투를 꺼내 준혁의 매니저인 지우에게 내밀었다.
“헉! 괜찮아요, 협회장님. 저 진짜 괜찮아요!”
“잘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제가 보기에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는 것 같고.”
“말씀만으로도 고맙지만 사실 협회장님. 귀환자님 명령으로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휴식하라고 해서요. 24시간 대기도 하고 있지도 않아서…….”
“그건 진즉에 보고 받았고. 상관없어요. 성의를 표하는 것뿐입니다. 회식하라고 메이드 팀장한테도 줬으니까 그냥 부담 갖지 말고 받아요.”
“아…… 감사합니다.”
지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양손으로 돈을 받고 90도로 인사했다.
“그럼 수고해요.”
선우가 지우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기사가 운전하는 차량을 타고 떠났다.
차량이 보이지 않을 때쯤 지우는 금액을 확인하고 기절할 뻔했다.
봉투에는 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월급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센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월급과 달리 예정에 없이 받은 돈이라 손이 발발 떨렸다.
지우는 혹여나 다른 직원들이 볼까 싶어 재킷 속에 잘 숨기고, 캐슬로 들어갔다.
거실로 가자 준혁이 소파에 늘어지게 기대 있었다.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귀환자님? 주무시러 간 거 아니었어요?”
“이지우 매니저.”
“네. 귀환자님.”
“술은 위험한 것 같아.”
“네? 술이요?”
“암살에 취약하겠어.”
“아, 암살이요?”
“술을 먹으면 감각이 엉망이 돼 버리니까.”
“힐러님을 불러드릴까요? 숙취가 가실 거예요.”
준혁이 비웃듯이 웃었다.
“내가 그 정도로 정신력이 약하진 않아. 그리고 이런 일로 힐러를? 하하.”
지우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침실로 가셔서 주무시는 편이…….”
“취해? 내가? 그럴 리가.”
“네?”
“찬 바람을 좀 맞아야겠어.”
통유리 문을 지나 마당으로 나가는 준혁을 보며 지우는 짧게 한숨 쉬었다.
귀환자님에게 저런 모습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서였다.
‘귀여우셔 정말.’
지우는 피식 웃곤 준혁을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
준혁은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우도 준혁을 따라 달을 올려다봤다.
“추울 텐데?”
왜 굳이 나왔냐는 스윗한 질문이었다.
모시다보니 귀환자님의 말투에 숨은 뜻이 자동으로 해석이 됐다.
“귀환자님이 혹여나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까요?”
준혁이 웃었다.
“재미있는 농담이네.”
“오늘 처음 술을 드신 거라면서요?”
“선우가 그래?”
“앗. 잠시 지나가다가 본의 아니게 엿들었어요. 죄송해요.”
지우가 어깨를 움츠린 채 애교스런 표정으로 웃음 지었다.
준혁이 술기운에 숨을 길게 뱉었다.
“이지우 매니저.”
“네. 귀환자님.”
“난 어떤 사람처럼 보여?”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던 지우가 곧장 떠오른 대로 입을 열었다.
“귀환자님은…… 마치 약점이 없는 슈퍼맨 같달까?”
준혁의 공허한 눈빛으로 호수를 응시했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순간. 이제 더 이상 뭔가를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 말이야.”
“……?”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곤 해. 늘 그랬지.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거야.”
“저희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가야 할 곳이 있고 그 과정들이 삶이라고. 그리고 그게 추억이 될 테니까 항상 밝은 면만 보려고 노력하라고.”
준혁이 지우를 보았다.
그녀는 달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명언이네.”
준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핫. 어머니가 좀 철학적이라서요.”
“춥다.”
“어? 추우세요?”
“나 말고.”
준혁이 빨갛게 얼어 있는 지우의 얼굴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들어가자.”
“귀, 귀환자님.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괜히 저 때문에...!”
준혁이 안절부절 못 하는 지우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취기는 언제든 없앨 수 있어. 걱정 마 앞으로도.”
준혁이 거실 안으로 들어갔지만 지우는 유리문 앞에 멈춰 서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지우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툭툭 쳤다.
“아... 또 확 반할 뻔했네.”
추운 날씨에 뺨을 때리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 차리자 이지우!”
지우는 눈을 크게 뜨고 씩씩하게 캐슬 안으로 들어갔다.
“일하기 힘들게 형제들이 세트로 왜 이렇게 멋진 거야. 정말.”
지우가 눈을 지그시 감고 콧김을 뿜었다.
* * *
유다연의 몸에 새겨진 마계어가 예고한 당일.
유다연의 컨디션은 눈에 띄게 악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할 정도였음에도,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 유다연은 전날 새벽부터 특수 제작된 트레이닝 센터의 중앙 의자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는 나무 의자에 앉아 간신이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다.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누가 봐도 지나치게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연 언니. 괜찮을 거예요.”
지우가 무릎을 굽혀 앉아 유다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유다연이 창백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귀환자님 싸우는 거 보신 적 있죠? 눈 깜짝할 사이에 다연 언니를 구할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 편안하게 먹어요.”
유다연이 지우를 애틋하게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다연 언니. 이번 일 끝나고 푹 쉬고 나면 우리 맛있는 거 먹기로 했던 거 기억하죠?”
“덕분에 큰 힘이 됐어. 정말.”
지우가 눈물을 글썽이며 유다연을 꼭 끌어안았다.
유다연이 외려 지우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지우가 눈물을 꾹 참고 있던 때 유다연이 기침을 했다.
지우가 깜짝 놀라 다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유다연의 입을 막은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우가 깜짝 놀라 손수건을 꺼낼 때 트레이닝 센터의 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