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의 모든 것-38화 (38/175)

귀환자의 모든 것 38화

유다연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앓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

준혁이 유다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한 3시간 전부터예요. 혹시나 해서 들어가 봤는데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어서.”

매니저 지우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유다연을 보며 말했다.

“유다연 씨는 던전핵이 된다. 그러니 몸이 안 좋을 수밖에. 최설화 힐러에게 치료 좀 부탁한다고 해. 싫으면 나가라고 하고.”

지우가 살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귀환자님.”

“선우가 온다고 했었지?”

준혁이 거실로 내려가면서 말했다.

“지금 시간이면 곧 도착할 것 같아요. 제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볼게요!”

“됐어. 곧 오겠지.”

거실 쪽으로 내려오자 다이닝 룸 부근이 분주했다.

메이드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하시는 분들 중에 불편한 게 있거나 해결했으면 하는 문제들이 있으면 가감 없이 말하라고 해. 캐슬까지 선우가 관리할 수는 없으니까.”

“네. 제가 전체적으로 한 번 얘기하고. 앞으로 주기적으로 체크하겠습니다. 전 그럼 최설화 힐러한테 다녀올게요.”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는 꾸벅 인사하고 서둘러 캐슬 밖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귀환자님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예민하고 날카로운 기운이었다.

어쩐지 오늘은 발뒤꿈치를 들고 살살 걸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날이다.

‘별일 없겠지?’

지우는 저도 모르게 긴장된 근육을 스트레칭으로 이완시켜 풀면서 별채 앞에 이르러 노크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최설화 힐러의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최설화는 미소와 함께 인사에 답했다.

“좋은 아침. 무슨 일이야?”

“귀환자님이 유다연 씨 치료를 좀 도와달라고 하셔서요.”

지우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귀환자님이 아닌 일반인의 치료를 도와달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자체로 그녀를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설화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는 일반 힐러를 써도 돼. 내가 전담할 힐러를 불러줄테니.”

“저기.”

“……?”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최설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지우를 보았다.

“괜찮아. 얘기해 봐.”

“귀환자님이 하기 싫으면 나가시라고…….”

지우가 최설화의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이 없자 지우는 키가 큰 최설화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돌덩이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게, 오늘 기분이 조금 안 좋아 보이셨어요. 예민해 보였거든요. 아마 사냥을 다녀온 직후라 그런 걸지도 몰라요.”

최설화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난 그를 위해서 한국으로 왔어. 그와 함께 같은 길을 가기 위해서. 하지만 생각해 보면 너무 내가 편한 쪽으로만 생각했던 걸지도 몰라.”

최설화가 먼 곳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사람을 돕는 건 결국 귀환자님을 돕는 일이겠지.”

“네. 분명히. 그럴거예요.”

최설화가 미소지었다.

“조금만 기다려. 채비를 할 테니.”

문이 탁 닫혔다.

지우는 뒷걸음질 치면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혹여나 마음이 크게 상하는 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어쩌면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힐러 최설화는 얼핏 부드러워 보이지만 자존감과 가치관이 이미 정해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만큼 귀환자님의 냉정한 태도로 인해 혹여나 불화가 생기는 건 아닐지 걱정헀지만, 다행히 최설화는 귀환자님에게 뜻을 맞추려는 마음이 더 큰 듯 해서 다행이었다.

지우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최설화과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잠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봤을 때.

최설화가 여신같은 모습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지우가 무슨 뜻이냐는 눈빛을 보내자 그녀는 지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서둘러야지.”

최상급 힐러는 매스 텔레포트가 가능했다.

즉 시전자와 연결되면 함께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것.

살짝 어지러움이 든다 싶던 순간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지우는 최설화와 함께 캐슬 건물 앞에 있었다.

차를 닦고 있던 운전기사가 휘둥그런 눈으로 갑자기 나타난 지우와 최설화를 보았다.

“괜찮아?”

최설화가 이마를 붙잡고 비틀 거리는 지우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조금 어지러워요.”

최설화가 가벼운 힐 치료를 하자 지우는 금세 속이 편해지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가, 감사합니다.”

지우가 신기하다는 듯 최설화를 보며 말했다.

최설화는 웃으며 턱짓했다.

“들어가자.”

지우는 운전기사에게 꾸벅 인사하고 최설화와 함께 캐슬 본관으로 들어갔다.

* * *

최설화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준혁이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세는 평상시와 다를 게 없었지만, 신기하게 공기는 그렇지 않았다.

지우가 왜 귀환자님의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는지 십분 이해가 갔다.

마치 다른 중력이 흐르는 공간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최설화예요.”

인사를 전하자 준혁은 시선을 던졌다가 눈인사로 인사를 받았다.

최설화는 매니저의 안내를 따라 유다연이 있다는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뭔가 분위기 장난 아니죠?”

2층으로 올라오자마자 지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설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유다연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불규칙한 호흡을 내쉬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최설화는 손목을 잡아 유다연의 상태를 스캔했다. 그는 순식간에 스캔을 마치고 손을 뗐다.

“어떤 상태죠?”

최설화가 미간을 구부렸다.

“처음 보는 케이스야. 다만 보통 던전화에 대한 연구 결과, 지금의 과정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거라.”

“그나마 다행이네요.”

“하지만 마나 흐름이 완전히 데이터가 없는, 특이한 케이스라 힐 치료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 공부할 만한 케이스네.”

“괜히 방해될 수 있으니까 전 그럼 이만 나가 있을게요. 귀환자님께 보고도 드릴 거고요.”

최설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우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가 나간 걸 확인한 최설화는 유다연의 팔에 새겨진 문양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던전이 만들어질 거란 얘기는 이미 들었다.

유다연이 던전핵이 될 거란 얘기도.

육체가 던전핵으로 굳어지는데 육체의 손상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다만 어느 정도까지 데미지를 입는지 그리고 어떻게 버티는지는 알 수 없다.

전혀 다른 케이스의 마나 흐름이었고 그 마나의 흐름이 심상치 않은 내재력을 가진 듯 보였으니까.

최설화는 큐브에서 테블릿을 꺼내 그녀의 상태를 기록했다.

앞으로 계속 그녀의 상태를 따라가면서 과정과 회복을 확인해야 했다.

* * *

다이닝 룸으로 들어가자 언제 왔는지 선우가 있었다.

“형. 술 마셔 본 적 없지?”

선우가 와인을 흔들어 보였다.

“너한테 배우면 되겠네.”

준혁이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메인 요리로 스테이크, 그리고 치즈와 과일이 보기 좋게 세팅되어 있다.

“그거 알아? 형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아서 캐슬 식구들 모두 떨고 있다는 걸.”

“미안한 일이지만 내가 내 기분까지 컨트롤 할 능력은 없어서.”

“던전에서 형이 원하는 걸 찾지 못한 거지?”

“그렇지 뭐.”

“그러고 보면 아무리 귀환자라고 해도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는 건 아니야. 안 그래?”

준혁이 웃었다.

“얼른 술이나 열어 봐.”

선우가 오프너로 능숙하게 코르크를 개방했다.

우람한 와인잔에 영롱한 루비 빛의 와인이 흘러내렸다.

“피노누아라고 부르고뉴지방과 샹파뉴지방에서 주로 재배하는 거야. 다루기가 어려워서 재배하기 힘든데. 그만큼 맛도 섬세해.”

선우가 자신의 와인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 여유라는 게 생겼을 때 먹은 와인이야. 그래서 그런지 내가 잊지를 못하지 이 맛을.”

준혁은 선우와 건배를 했다.

잔이 울리면서 귀에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어렸을 때부터 마계로 갔으니 술이란 걸 먹었을 리 없었다.

악마들이 술을 먹는 건 봤지만 혼으로 존재하는 준혁에겐 그저 그림이었다.

그래서인지 별로 술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다.

악마들이 얼마나 술을 즐기고 방탕하게 타락하는지 봐 왔으니까.

하지만 여긴 인간계였다.

인간은 악마와 다르다.

“어때?”

선우가 물었다.

“맛있네.”

준혁이 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향은 길게 여운을 남겼고, 혀에 쌉사름한 포도 찌꺼기가 남는 맛이 좋았다.

선우도 와인을 마시고 자리에 앉았다. 동생은 캐슬 내, 다이닝 룸을 훑어보았다.

“참 멋진 곳이야. 형이랑 잘 어울리고.”

“워커홀릭이 시간이 남아서 온 건 아닐 테고.”

“평범한 하루가 될 수도 있고. 역사적인 날이 될 수도 있고. 형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게 되겠지.”

“무슨 일 있어?”

“형.”

“……?”

선우가 와인잔을 보며,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킹 메이커가 되겠다고 다짐했을 때. 난 고백하자면 솔직히 머릿속이 꽃밭이었어.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너무나 달콤한 미래가 보였거든.”

준혁은 말없이 다시 와인을 마셨다.

달콤하고 풍부한 향이 후각을 찔렀다.

“형의 존재만으로 난 모든 걸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주 품위 있는 제국건설의 역사가 이루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

“그런데?”

선우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꽤 비관적이네.”

선우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어릴 때부터 동전 세는 것만 하다 보면 말이야. 어른들의 세계는 먼 꿈처럼 느껴져. 폐쇄적인 세계가 익숙해서 움츠러들게 되거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은 나보다 훨씬 더 큰 한계와 싸워왔을 거야. 그리고 돌아왔겠지.”

준혁은 가만히 선우를 응시했다.

“내가 꽃길을 깔아 주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네.”

선우가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로 준혁을 보았다.

“형의 결정이 필요해. 최종 결정권자는 형이니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야?”

“당연하지. 결국 완성 될 제국은 형의 것이니까.”

“선우야. 난…….”

“알아. 형은 그런 거창한 것엔 관심이 없다는 걸.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해. 세상의 균형을 위해서. 그리고 형과 나. 우리를 위해서도.”

준혁은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동생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문제가 뭐야?”

준혁이 선우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유럽연합이 한국을. 아니 형의 성장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어. 가장 큰 세력이 유럽권과 일본. 그다음으로 중동. 가장 큰 세력은 중국이지만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단체라 신경 쓸 필요는 없고.”

“그러니까 해외 세력들이 날 견제하려 한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형이 던전에 있는 동안 유럽연합이 골드 던전 수급을 쓸어 담았어. 각국이 입을 맞췄으니 실제적인 움직임은 아니겠지만 시장은 패닉 상태야. 곧 언론에서도 알게 되겠지.”

“고민하는 이유가 뭐야?”

선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난 피로 물든 제국은 원하지 않았거든. 기업 전쟁과 달리 이건 진짜 피가 묻을 수 있는 일이니까.”

준혁은 그제야 모든 정황을 알겠다는 듯 숨을 다듬었다.

“그런 거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야.”

선우가 놀란 눈으로 준혁을 다시 보았다.

준혁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강인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