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37화
지도상 끝 무렵에 위치한 곳.
그곳에 던전핵이 있었다.
그 주변으로 던전핵을 지키기 위해 마수들이 제법 있긴 했지만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런 만큼 이제 골드 던전의 클리어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물론 40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가 있으니 시간이야 꽤 걸리겠지만 준혁이 마음먹고 속도를 낸다면 사실상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다만 여전히 멸마의 서에서 출발한 수색대가 균열의 틈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이 정도로 어려울 줄이야.’
준혁이 실망감을 덧붙인 웃음을 지었다.
멸마의 서를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하긴 기대대로 된 적이 있긴 했던가.’
준혁은 먼 곳을 보았다.
눈보라는 이제 거의 불지 않았다.
준혁이 이른 곳엔 한때 호수였다는 듯 그저 빙판길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바닥은 미끌미끌했지만 준혁의 걸음에 제약이 되진 않았다.
지도상에 드러난 던전핵을 향해 빙판길을 지나던 중 준혁은 발아래로 뭔가 그림자가 지나가는 걸 보았다.
그에 준혁은 반투명한 천리안의 지도를 쳐다봤다.
지도상에는 마수가 표시되지 않고 있었다.
분명 마수의 이동처럼 보였는데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다니?
이상했다.
잘못 봤다고 하기엔 마수가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을 정도의 그림자였다.
설령 마수라고 해도 대응하면 그만이긴 했지만 천리안이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는 건 기억해 둬야 할 부분이었다.
준혁이 빙판길을 훑어보고 있던 때 갑작스레 빙판을 깨고 거대한 마수가 솟구쳐올랐다.
마수는 아주 높이 튀어 올랐는데, 그와 동시에 천리안 지도에 마수가 곧장 표시되고 있었다.
천리안의 반투명한 지도상에서 빨갛게 반짝이는 점.
이는 아마도 은신하는 마수는 천리안의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것이리라.
물론 딱히 준혁에게 문제 거리는 아니었다.
준혁은 마수를 올려다봤다.
마치 다이아몬드를 깎아 만든 것 같은 은빛의 몸체였다.
도마뱀의 형태를 가진 마수였는데 놈은 마치 포유류처럼 차가운 물속에서도 호흡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 장관이다.
- 겁나 높이 뛰어오르네.
- 와 체공 시간 ㄷㄷ
- 아직도 솟아오르고 있어.
- 그림 같네.
긴 꼬리가 얼음 밖으로 나와 허공에 치솟았을 땐 그 크기가 대략 12미터에 육박할 정도로 거대했다.
마수는 새파란 눈을 빛내며 허공에서 몸체를 비틀더니 준혁을 향해 공격 타점을 잡으려는 듯 포지션을 잡았다.
그러더니 공중에 떠오른 채로 준혁을 향해 마치 브레스처럼 냉기의 마력을 뿜었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얼어붙으며 마력 폭발을 일으켰다.
준혁의 부근으로 사방으로 으깨지는 빙판.
마력 폭발에 의해 잿빛 연기가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그 희뿌연 연기 속에서 빛의 검이 튀어나와 마수의 머리를 단숨에 꿰뚫었다.
즉사한 마수가 빙판으로 추락했다.
쿠웅.
마수는 자신이 직접 뚫고 올라왔던 빙판 아래 그 차가운 물속으로 다시 가라앉았다.
- 웅장한 등장이었지만 원샷.
- 애도를 ㅋㅋㅋㅋ
- 원샷원킬 ㅋㅋㅋㅋㅋㅋ
- 응 다시 들어가 ㅋㅋㅋㅋㅋㅋㅋ
- 돌고래쇼였나요?ㅋㅋㅋㅋㅋ
- 공중제비 잘 봤고.
- ㅋㅋㅋㅋ 물도마뱀 뭐 하냐?
풍덩!
[마수 오피러스의 마나핵을 획득했습니다.]
[오피러스의 룬을 +1 획득했습니다.]
큐브가 얼음물 속으로 들어가더니 아이템을 확보했다.
준혁은 핏물이 번지고 있는 빙판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유럽연합의 대표, 이탈리아 협회장 지오반니는 더 월드를 통해 모니터 속 준혁을 보며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선 보좌관 역시 무거운 얼굴로 모니터를 지켜봤다.
“저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10년간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었다며?”
“예. 보스.”
“근데 저건 그냥 병실에 누워 있었던 인간이 아니잖아? 저건 밥 먹듯이 칼을 쓰고 마법을 부린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야. 성격부터 사냥에 대한 태도까지 전부.”
“한국 측에서 귀환자의 정보는 전혀 오픈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
“그야 당연하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그렇다고 빈틈이 없는 건 아니지.
지오반니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시가를 물고 불을 붙였다.
“혼자서 골드 던전에 들어가 플레이하고 있다니.”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찬다는 듯이 지오반니가 자조적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영국 쪽을 제외하면 골드 던전 수급이 원활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협회장이 눈치를 챈 것 같아요.”
보좌관이 스마트폰을 보며 말했다.
“눈치채봐야 이미 늦었어. 골드 던전의 가치가 폭등하게 되면 우리 쪽에서 제안할 이야기가 많아질 거야.”
지오반니가 모니터 속 준혁을 보며 코웃음 쳤다.
“제아무리 툭 튀어나온 리더보드 탑이라고 해도 결국엔 햇병아리 아니겠나? 얼치기 형제들에게 위대한 연합의 힘을 자각시켜 준다.”
“예 보스.”
보좌관이 생각이 많은 눈으로 더 월드의 준혁을 바라봤다.
반면 지오반니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준혁을 지질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 * *
던전핵 부근에 이른 준혁의 검이 무자비하게 마수들의 살을 베고 뼈를 분리했다.
거대한 체구의 마수들이었으나 준혁의 검 앞에선 무의미한 덩치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보인 적 없던 속도감이 던전핵을 보호하던 마수들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일곱 마리의 거대 마수를 도륙하고 보스몹으로 추정되는 놈을 팔 하나를 날려 보낸 지금.
준혁에겐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얼어붙은 숲의 중앙.
보스몹 라이언트는 준혁을 마주한 채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마치 악마처럼 뿔을 달고 있는 라이언트는 외양은 발로크를 닮았지만, 그 성질은 전혀 달랐다.
뜨거운 불의 힘을 쓰는 발로크와 달리 놈은 반투명한 푸른빛의 피부를 갖고 있었다.
얼핏 보면 몸체가 유령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체 어디서 너 같은 놈이 나타난 것이냐……?!”
커다란 도끼를 든 채 자꾸만 뒷걸음질 치는 라이언트를 향해 준혁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칼을 휘둘렀다.
준혁의 칼날에 가슴이 찢겨져 나간 라이언트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인간의 검은 본디 나 같은 마력 본체에 힘을 가할 수 없거늘. 너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한데 어째서 인간의 냄새가……!”
준혁이 걸음을 옮겨 라이언트의 몸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고요한 살기를 담은 눈으로 라이언트를 내려다보았다.
라이언트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벌벌 떨었다.
“네놈은 정…… 녕! 쿠륵!”
준혁의 빛의 검이 라이언트의 머리를 꿰뚫고 얼어붙은 땅 속까지 밀려 들어갔다.
준혁이 칼자루를 놓았을 때 빛의 검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나 그 자리에 라이언트의 죽음은 분명하게 자리해 있었다.
던전핵을 지켰던 마지막 마수의 사체 위로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큐브가 마수들의 사체 안에서 아이템을 꺼내는 소리만이 바람 소리 사이로 섞여 들었다.
- ☆☆☆☆☆ 미쳤다.
- 골드 던전 클리어 ;;;
- 진짜 클리어했다. 혼자서.
- 레전드
- 예상은 했지만 와…… 새삼 경이롭다.
- 무신이 서 있다. ㄷㄷ
- 골드 던전 마수들 썰려 있는 거 보소
- 쟤네들 하나하나 다 보스급 마수들인데 사체 쌓인 거 봐랔ㅋㅋㅋ
- 근데 골드 던전에 원래 이렇게 마수가 많았나?
- 뭐라 말로 설명을 못 하겠네. 허.
- 골드 던전마다 등급 달라요. 어떤 골드 던전은 미국에서 도와줘도 클리어하는 데 몇 달 걸린 곳도 있다 들었음.
- 폐하 축하드립니다!!
- 클리어 축하해요!
- 축하드립니다!
- 잘 봤습니다 ㅎ
- 역사 하나 쓰셨네 또. 키야.
- 폐하 던전이 춥사옵니다. 어서 돌아오시옵서서.
준혁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주변을 훑어봤다.
풍경을 보는 준혁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 넓은 설원에서, 멸마의 서는 결국 균열의 틈을 찾지 못한 것이다.
멸마의 서가 이미 수색을 마쳤음을 알리고 있었다.
던전 클리어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준혁은 짧은 한숨을 뱉으며 던전핵으로 걸어갔다.
얼어붙은 숲속에서 하나의 조각된 예술처럼 자리해 있던 던전핵이 준혁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그와 동시에 탈출 게이트가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열리는 게 준혁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아쉬워서 그런지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골드 던전에서 수급된 아이템이 던전 비용 이상의 이윤을 남기지만, 돈 보다 중요한 건 준혁이 찾고자 하는 신수와 신물이었다.
골드 던전에서 신수와 신물을 찾을 수 없다.
천계의 흔적이 남은 공간.
바로 천계인들이 살고 있는 숨겨진 세상.
오직 그곳만이 준혁이 원하는 것이 존재했다.
* * *
“유럽연합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랭커들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정황들입니다.”
비서가 보여준 사진들을 보던 선우가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어루만졌다.
비서가 불안한 눈빛으로 선우를 응시했다.
“생각해보면 자본주의는 진즉에 끝났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그 날부터.”
선우가 말을 이었다.
“유럽연합이야 그렇다 쳐도 미국이 이런 식으로 나몰라라 할 줄은 몰랐는데.”
선우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비서가 마른침을 삼켰다.
“되도록이면 싸움은 피하고 싶어.”
“귀환자님을 위해서죠?”
“모두를 위해서.”
“현재 저희 협회 측으로 메일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아직 언론도 안 탔는데 어디서 오는…… 반정부들?”
“그렇습니다.”
“골드 던전의 수급에 자물쇠를 걸어 한국의 성장을 막겠다는 건데. 실질적으로 거래가 오간 건 아닐거야. 입만 맞췄겠지. 이런 일로 국가의 재산을 공유한 위인들은 될 수 없으니.”
“당분간 스케줄을 비울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선우가 길게 심호흡했다가 비서를 봤다.
“형은?”
“곧 캐슬에 도착한다고 들었습니다.”
“형을 만나러 가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 처음이야.”
선우가 불안을 내포한 눈으로 먼 곳을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분명 협회장님을 지지해주실 겁니다.”
선우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일어섰다.
“오늘 일정은 모두 내일로 미뤄. 캐슬로 가서 형도 만나고. 유다연이라는 여자도 만나봐야겠어.”
“와인 어떠세요?”
“와인? 간만인데 빈손일 순 없으니까. 선물용으로 괜찮겠어. 어떤 거야?”
“로마네 꽁띠입니다.”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형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야. 스토리가 있으려면 내가 직접 고르는 게 좋겠어.”
“네. 바로 차량 준비할게요.”
비서가 인사를 하고 나갔다.
협회장실에 혼자 남은 선우는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체스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퀸 기물이 선우의 시선 안에 가득 찼다.
‘형은 어떤 선택을 할까?’
어떤 선택이든, 이번 일은 형의 입장에 서서 판단할 생각이었다.
‘형의 선택에 따라 전략도 달라지게 되겠지만 그게 어떠한 방식이든.’
선우가 걸음을 옮겼다.
‘그게 한국 역사의 첫걸음이 될 거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어.’
선우가 문고리를 강하게 밀고 협회장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