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36화
보고서 내용을 확인한 선우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이거 확실한 거야?”
선우의 강한 눈빛이 비서에게로 꽂혔다.
“실물 계약서까지 확인되고 있는 상황이라 확실합니다.”
선우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국내부터 사업의 규모를 확장해 나가야 할 판에 이렇게 빨리 외부에서 브레이크를 걸어올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유럽연합에서 선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가 서류 안에 담겨 있었다.
결론적으로 보고서의 내용은 유럽연합이 전 세계 골드 던전을 쓸어 담고 있다는 정황 증거로 가득했다.
자본 규모에서 이미 선제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던 그들이었고 귀환자의 등장은 성장에 있어 극한의 리스크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처는 자본 공격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선우가 이를 갈았다.
페이퍼 컴퍼니지만 유럽연합 계좌라는 걸 알기까지는 어렵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골드 던전 수급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유럽연합이 벌인 일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도록 추적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놓고 던지는 견제.
그런 만큼 한국이 이 일을 알게 되는 게 시간 문제라는 건 이미 유럽연합 측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선우가 숨을 크게 내쉬며 모니터 속의 귀환자 준혁을 바라봤다.
“난 킹 메이커가 되기로 형에게 약속했어.”
비서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협회장인 선우를 소리 없이 응시했다.
언제라도 명령에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신중해야 해.”
선우의 눈이 초조하게 흔들렸다.
“축하를 전할 땐 언제고 이런 식으로 뒤통수라니.”
선우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비서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선우가소파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잊고 있었어.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교역적으로 얼마나 불리한 위치에 있었는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형 말이 맞아. 난 결정적인 순간에 늘 빈틈을.”
선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 게임을 시작한 건 전적으로 형이 있었기 때문이야.’
선우가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바깥쪽엔 체스판이 있었다.
선우가 퀸 기물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나 혼자 움직여서 이 게임을 이길 수 있을까? 잠깐의 승세는 가져올지 몰라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지도 몰라. 신중해야 해. 몇 수가 아닌 수십 수를 내다봐도 모자라.’
선우는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던 선우가 비서를 보았다.
“형과 얘기해봐야겠어.”
“스케줄 조정하겠습니다.”
비서가 인사를 올리고 협회장실을 나갔다.
* * *
준혁은 눈밭을 헤치고 걸으며 우선 던전핵 위치부터 확보하기 위해 속도를 올렸다.
준혁이 걸을 때마다 그 발 주변으로 눈이 녹거나 사방으로 흩날렸다.
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한 차례 마수들을 휩쓸고 나자 마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쓸데없이 거창하게 넓은 설원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 탓에 던전핵을 찾는 데도 시간이 할애되고 있었고, 멸마의 서에서 출발한 수색대 역시 균열의 틈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다.
‘인간계로 돌아오고 나서 어쩐지 급해지게 돼. 하지만 어차피 시간이 걸릴 일이다.’
준혁은 가까운 동굴 쪽으로 이동했다.
던전 의복이 강하긴 해도 준혁의 마력체에 의해 눈이 녹으면서 잦은 눈발로 옷이 아주 조금씩이지만 젖고 있었다.
툭. 툭.
준혁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눈을 털어 냈다.
바깥으로는 강한 눈보라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동굴 밖으로 나가자마자 눈 속으로 파묻혀 버릴 것만 같은 강한 눈보라였다.
“날씨가 험악해지고 있군요.”
준혁이 동굴 바깥을 보며 말했다.
더 월드 시스템을 통해 이 스트리밍을 보고 있을 시청자들에게 건넨 말이었다.
채팅창을 보자 열광적인 반응으로 인해 마치 글자가 그래픽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 날씨 진짜 장난 아니네요 ㅋㅋ
- 앗 귀환자님이 말씀하셨다!
- 폐하 춥진 않으신가요?
- 저희의 따듯한 마음을 전합니다. ㅎㅎ
- 목소리 넘 좋아 ㅠㅠ
- 사냥은 할 만하신가요? ㅎㅎ
.
.
채팅이 너무 빨리 올라가기도 했고, 어떤 이야기에 대답을 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오질 않았다.
준혁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별로 춥진 않아요. 눈보라가 좀 걸리적거리긴 하지만.”
- 채팅창 보고 말해 주다니. 너무 신기해 ㅋㅋㅋㅋ
- 누가 방금 환자님이라고 했냐?
- 귀환자님. 네크로맨서인가요??
- 소환 괴물 뭔가요~?
- 귀환자님 각성자 특성 좀 알려 주세요!
- 준혁님. 매력의 끝은 어디신가요? 우주 끝??
- 존경합니다. 형님 ㅠㅠ
- 오빠 제 이름 수연이에요. 이름 한 번만 불러 주세요. 제발요 ㅠㅠㅠㅠ
채팅창을 보던 준혁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천리안 맵을 통해 마수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멸마의 서로 수색 중인 범위를 대략 가늠해 봤는데, 여전히 멸마의 서는 여전히 균열의 틈을 찾지 못했다.
마수 단 한 마리만이 주변에서 방황하듯 서성이고 있음을 천리안이 보여 주고 있었다.
준혁이 다시 동굴 밖으로 나섰다.
눈발이 다소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강한 바람을 동반한 눈발이었다.
준혁은 눈보라를 뚫고 지도상에 위치해 있는 마수 쪽으로 이동했다.
어차피 놀고 있어 봐야 의미가 없으니 클리어를 위해서 마수들은 보일 때마다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다.
- 이런 밀당의 귀재 같으니. 채팅창 한 번만 더 봐주세유
- 내겐 너무나 먼 당신…….
- 악! 조금만 더 목소리 들려주지!!
- 시크 ㅋㅋㅋ
- 다른 사람이었으면 소통할 줄 모른다고 욕 먹었을텐데 귀환자는 진짴ㅋㅋㅋ 팬심 미쳤다.
- 귀환자님이랑 친하면 얼마나 좋을까…….
- 말 몇 마디 듣는 게 왜 이리 어렵냐ㅠㅠ
- ㅎㅎ 귀환자님이 내성적이신 듯.
- 아니 시크하다. 난 그 시크함에 취한다.
- 지금의 귀환자님을 잘 기억해야 해요. 나중에 말 잘하게 되면 이런 시절이 그리워질지도? ㅋㅋㅋ
- 그러고 보니 더 월드에서 목소리 제대로 듣는 거 처음이넼ㅋㅋㅋ
- 피부가 애기 피부네.
- 아아. 사치스러운 내 눈. 설원을 걷는 폐하라니……!
마수의 이동 경로가 준혁 쪽이라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준혁은 마수를 만날 수 있었다.
마수를 앞에 둔 준혁은 늘 그랬듯이 침착하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준혁이 마수를 올려다보았다.
설원과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었다.
천둥 같은 소리로 가슴을 두드리는 마수는 마치 킹콩을 보는 듯했다.
거대 고릴라는 바이러스라도 걸린 것인지 입에 수십 마리의 뱀을 물고 있는 듯한 외양이었고 눈은 충혈되어 새빨갛게 빛났다.
특이하게도 형광 피부를 갖고 있었는데, 녀석은 자신을 뽐내기라도 하듯 화려한 색채감을 자랑하려는 듯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오른팔에 수갑과 연결되어 휘감겨 있는 긴 체인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들썩였다.
- 윽 징그러워 ㅡㅡ
- 은근히 귀여운데? ㅋㅋ
- 늠름한걸?
- 피부가 형광색이얔ㅋㅋㅋㅋ
- 근육 봐. 터질 것 같다 ㅎㅎ
- 마! 단백질 좀 먹었나?
- 헬스 중인 고릴랔ㅋㅋㅋ
- 저래 보여도 최상급 마법 마수겠지 ㅋㅋ
- 아니 형님덜. 끔찍한 게 개 세보이는데요? ㅡㅡ
준혁이 가까이 온 것을 보고 위협이라도 주고 싶었는지 마수가 팔에 감긴 체인을 휘둘렀다.
체인은 순식간에 키 높은 나무 세 그루를 종이 찢듯 찢어 버렸다.
이어 귀청을 때리는 괴성을 질렀다.
- 으악!
- 어이쿠~
- 깜짝이야 ;;;;;
- 오미 ;;;
- 귀 떨어질 뻔했잖아! 원숭이 놈아!
- 놀래라 ㅠㅠ
- 킹콩??
- 스테로이드 맞은 킹콩ㅋㅋㅋㅋㅋㅋㅋ
- 체력은 꽤 돼 보이는데 어떨지. 흠.
- 솔직히 놀랬다 ㅋㅋ 와, 힘 봐라 ㅋㅋ
- 마수놈 핏줄 섹시한데?
흥분하여 날뛰는 고릴라형 마수를 응시하던 준혁은 문뜩 생각했다.
사냥 중에 획득한 아이템들 중 포탈이라는 게 떠올라서였다.
이대로 사냥 속도를 올린다고 맵이 넓은 만큼 균열의 틈을 수색하기까지 얼마나 더 시간을 잡아먹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해결할 만한 아이템이 있을까?
준혁은 큐브를 불러 와 내용을 확인했다.
큐브가 기계적으로 열리며 확장된 내부 공간을 보여 주었다.
마수는 준혁의 모습에 빈틈을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곧장 육중한 쇠사슬을 휘둘렀다.
커다란 체인이 휘면서 준혁을 향해 내리꽂혔다.
공기를 찢는 파공음.
준혁은 큐브 내부의 아이템을 살피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체인이 아슬아슬하게 준혁을 스쳐 지나가며 바닥을 찍었다.
바닥에 깔려 있던 눈이 마수의 머리보다 훨씬 위로, 화려하게 솟구쳐 올랐다.
그 사이 준혁은 여전히 큐브 속 아이템을 살피고 있었고 폭발하는 눈꽃 사이로 마수의 눈은 당혹감과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마수만 확실히 처치해 놓으면 포탈을 통해 던전 밖으로 다녀올 수 있을까?’
준혁은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포탈 주문서가 큐브 안에 있음을 확인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포탈 주문서는 공간과 공간을 잇는 주문서.’
던전 밖으로도 출입이 가능한지 확인 해 볼 필요가 있었다.
- 마수 앞에 두고 큐브 보고 있엌ㅋㅋㅋ
- 신의 경지…….
- 골드 던전 마수까지 갖고 노시는 중.
- 이 정도면 리더보드고 뭐고 같은 리더보드 순위권에 있다고 보기에도 무리지 않냐?!
마수가 저음의 울음소리를 터트리며 큰 동작으로 체인을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체인은 강한 마법의 힘을 품고 있었다.
체인이 움직이는 경로마다 바닥 아래로 폭발이 치솟아 올랐지만, 준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체인의 공격 속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몸놀림이었다.
준혁은 마수의 발목을 베어 내자마자 그 즉시 땅을 박찼다.
무게 중심을 잃고 자세가 흐트러진 마수와 준혁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마수는 준혁을 보고 본능적으로 죽음을 감지한 듯 눈물을 글썽였다.
그것은 아주 찰나의 시간.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기엔 이미 늦었다.
검이 자비 없이 목을 베었다.
준혁이 소리 없이 착지한 이후.
……근육 가득한 어깨 아래로, 머리가 뚝 떨어졌다.
출혈조차 나지 않는 깔끔한 절단이었다.
준혁은 마수의 사체조차 확인하지 않고, 큐브 속 포탈 주문서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 절단면 봐. 깔끔하다.
- 단순 마력 수치를 떠나서,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야.
- 리더보더를 떠나서 검술부터가 믿을 수 없는 천재.
- 아니 랭커님들 티 겁나 나요 ㅋㅋㅋㅋㅋ
- 뭐야?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헌터들이냐?!
- 더 월드는 외국어도 다 한국어로 번역돼서 누군지 알 수가 없어.
- ㅋㅋㅋ 헌터들 감탄 중.
- 랭커가 있겠냐? 어중간한 애들이겠지. 대한민국에 헌터가 몇인데.
- 엣헴.
- 랭커 채팅방은 따로 있지 않음?
- 랭커들은 채널 따로 있을 텐데?
- ㅇㅇ 따로 있음.
- 따로 있는데 일반 채팅방에 들어오는 변태들도 많다는 게 함정.
- ㅋㅋㅋㅋㅋ
- 아아 다들 닥치세요.
- 너나 닥쳐.
- 귀환자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다…… ;; 나 남자인데 왜 이러지? 가슴이 이상해.
- 괜찮아. 다들 그렇게 게이가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