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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의 모든 것-34화 (34/175)

귀환자의 모든 것 34화

차가운 물기가 피부에 닿았다.

얼음 조각이 피부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눈보라 치는 설원이 시야에 펼쳐졌다.

이번 골드 던전의 오픈 필드는 차가울 겨울을 품고 있었다.

눈보라가 강하긴 했지만 의외로 눈이 많이 쌓이진 않았다.

쉽게 걸을만한 정도의 지형이었다.

기후 변화가 심한 듯 걸음을 옮김에 따라 눈보라는 강해지기도 했다가 약해지기도 했다.

준혁은 언덕을 오르며 천리안을 활성화시켰다.

반투명한 맵이 나타났는데 지형이 넓은 탓에 마수들의 위치는 아주 먼 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준혁은 멸마의 서로 균열의 틈을 찾기 위해 수색대의 역할을 하는 마력을 퍼트리며 마수들이 위치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클리어까지 꽤 걸리겠어.’

얼핏 봐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규모의 대형 맵이었다.

준혁은 스마트폰을 꺼내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배터리는 충분했지만 워낙 넓은 지형이라 혹여나 오랜 시일이 걸려 유다연이 던전화 되는 것을 놓칠지도 몰랐다.

날짜와 시간을 체크한 준혁이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을 때 어디선가 기묘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맵을 보자 빨간 포인트가 준혁이 위치한 곳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준혁의 위치를 알고 있는 듯한 마수의 접근이었다.

잠시 후, 맵이 보여 주는 대로 빨간 포인트가 준혁이 위치한 곳의 부근에 이르렀을 때 맵의 레이더가 예견한 대로 마수가 나타났다.

[라그나스]

마법계열의 짐승형.

더 월드의 시스템이 마수의 정체를 알렸다.

녀석은 맘모스를 닮았는데 검은 갈기털이 인상적이었다.

피부는 마치 뱀처럼 반들거렸다.

지축을 울리며 눈발을 헤치는 마수의 이름은 라그나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처럼 패도적인 기세로 놈은 준혁을 향해 지체 없이 달렸다.

준혁은 거대한 상아를 자랑하며 마치 공룡이나 다름없이 지축을 뒤흔드는 라그나스를 응시한 채 빛의 검을 쥐었다.

반투명한 빛의 검은 오직 준혁의 마력과 의식만으로 만들어 냈으나, 그 마력의 농도는 일품.

신물이 아닌 다음에야 준혁이 가장 신뢰하는 무기라 할 수 있었다.

그 빛의 검을 들고 준혁은 달려오는 라그나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고지능의 마수는 지척에 이르기 전에 이미 자신의 육체에 마법 언어가 새겨지고 있었다.

짧은 문자 캐스팅만으로 마법이 발동되는 것은 고지능의 마법능력.

냉기를 품은 안개가 준혁을 덮칠 듯이 저 멀리서 날아들었다.

스치는 순간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기운을 가진 마법의 힘이었다.

그 공격을 보고 멈춰 있던 준혁의 다리가 움직였다.

상아를 치켜들고 괴성을 지르는 라그나스를 향해 정면으로 내달렸다.

라그나스의 안개 같은 냉기의 결정체는 준혁에게 닿지 못하고 그대로 녹아내렸다.

준혁이 가진 순수한 마력의 결막이 라그나스가 만들어 낸 냉기의 마법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라그나스가 당황한 듯 눈이 커졌을 때 준혁의 검은 이미 라그나스의 목을 길게 베어 내고 있었다.

새빨간 출혈을 일으키며 거대한 몸집의 라그나스가 눈밭을 뒹굴었다가 다시 일어나 뜨거운 콧김을 뿜었다.

골드 등급의 던전이라 그런지 마수 한 마리의 체력은 상당했다.

꽤 깊게 베이긴 했지만 라그나스의 전투력은 여전해 보였다.

준혁은 검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느긋하게 라그나스를 돌아봤다.

휘몰아치는 눈발 사이에서 라그나스의 빨간 눈이 영엄하게 빛나고 있었다.

“뭘 망설이는 거야?”

준혁이 라그나스를 향해 말했다.

라그나스는 마치 준혁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다시 힘을 내어 본연의 용맹함을 빛내기 위해 준혁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이미 안타깝게도 용맹함은 더 이상 빛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라그나스의 눈은 본능적으로 이길 수 없는 적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아주 여유롭게 검을 늘어트리고 서 있는 준혁은 라그나스에게 있어 갑작스럽게 나타난 천재지변이나 다름 없었다.

준혁이 라그나스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 총 7번의 검격이 살을 베어 냈다.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와 강대한 마력이 깃든 힘은 웬만한 헌터들이 흠집조차 낼 수 없는 라그나스의 질긴 피부를 간단하게 베어 냈다.

사방으로 새빨간 피를 흩뿌리며 라그나스가 비명 같은 울음을 터트리며 눈밭을 뒹굴었다.

거대한 체구답게 출혈량 역시 압도적이라 눈밭을 붉은 피로 물들이는 속도가 굉장했다.

준혁은 늘 언제나와 같이, 감정의 변화 없는 눈으로 라그나스를 돌아봤다.

강대한 체력을 가진 마수인 라그나스는 숨을 헐떡이며 죽어 가고 있었다.

- 와 씨! 갓준혁의 칼 7방을 맞고도 아직 안 죽었다니.

- 오미. 골드 던전 마수들 체력 오지네.

- 날씨 개 추워 보인다 ;;

- 폐하의 라그나스 마법을 해체하는 솜씨가 ㄷㄷ

- 마법을 그냥 눈처럼 녹여 버렸음.

- 레알 미친 수준이다.

- 저 대단한 마수가 저리 안타까워 보일 정도라니.

- 갓준혁이니까 이런 그림이지. 고위 헌터들이 골드 던전 공략할 때 왜 미국에 도움 요청하는지 알겠음.

“쉬어라.”

준혁이 죽지 않고 고통에 물들어 있는 라그나스의 숨통을 끊어 주기 위해 빛의 검을 녀석의 목에 찔러 넣었다.

몇 번 몸을 들썩거린 녀석이 곧 숨이 멎었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큐브는 라그나스의 거체에서 마나석을 가져갔다.

[최고급 마나석을 획득했습니다.]

[SSS+급 피부조직을 획득했습니다.]

골드 던전은 마수들의 등급이 높은 만큼 그 수량이 많지는 않았다.

마수들의 위치를 알려 주는 맵에 보이는 빨간 점들은 몇 개에 불과했고 또한 쉽사리 준혁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지도 않았다.

용맹하고 호전적인 라그나스 같은 마수와 달리 경계하고 작전을 세우는 마수들도 많았다.

아마도 맵에 보이는 마수들은 그런 부류들인 듯했다.

준혁은 라그나스의 사체를 남겨 둔 채 다시 눈밭에 발자국을 찍으며 나아갔다.

어차피 남겨둔 마수들은 파천 길드에서 알아서 회수할 것이다.

잠시 옅었던 눈발이 다시 바람과 함께 거세지고 있었다.

* * *

유다연은 거실에서 그의 매니저 지우와 함께 더 월드를 통해 귀환자 한준혁을 보고 있었다.

불안과 공포를 지우기 위해 귀환자를 믿었지만 몸에 새겨진 문양 때문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은 귀환자를 꽉 붙잡곤 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듯 더 월드를 통해 귀환자의 압도적인 무력을 보고 있자 불안과 공포는 언제 자리를 잡았냐는 듯 깨끗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무신이란 저런 분을 두고 하는 말이겠죠?”

지우가 마나석과 연결된 모니터의 더 월드 화면 속 준혁을 보며 두 손을 꼭 잡은 채 취한 듯이 말했다.

“부럽네요. 귀환자님을 늘 곁에서 모실 수 있으니.”

지우가 빙그레 웃었다.

“저의 유일한 자랑이죠.”

서로 미소를 지은 채 화면을 보고 있던 중 유다연의 안색이 점차 흐려졌다.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 가던 그녀는 곧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흰 셔츠의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리자 팔에 새겨진 문양이 마치 뱀처럼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듯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유다연이 충격에 물든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고 있자 그녀를 지우가 뒤늦게 발견하고서 사태를 파악했다.

“……파, 팔에 문양이.”

당황한 유다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지우도 놀란 얼굴로 문양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다연의 팔을 꽉 잡았다.

유다연이 눈을 크게 뜨며 지우를 보았다.

“괜찮아요. 귀환자님이 마계어를 해석했고, 분명 사흘 후에 던전이 열린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건 단순히 준비 과정?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침착해요. 분명 별것 아닐 거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우 역시 긴장으로 굳어진 눈으로 유다연의 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마치 지뢰를 양 손으로 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불안감에 두 여자의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고 있는 가운데, 곧 문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었다.

꽤 오랫동안 지켜보았지만 문양은 더 이상 살아움직이지 않았다.

유다연의 거칠어지던 숨이 점차 안정되었다.

지우도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봐요. 별거 아니었어요. 그렇죠?”

유다연이 애써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더 흐르는 동안 계속 지켜보았다.

문양은 더 이상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지우가 유다연을 향해 얼굴을 끄덕여 보였다.

안심하라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그 순간 유다연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을 치켜뜨는 순간 입 밖으로 피가 훅 터져 나왔다.

손가락 틈새 사이로 핏물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우가 화등잔만 하게 뜬 눈으로 그녀의 피를 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히, 힐러님! 최설화 힐러님!”

지우가 다급히 소리 질렀다.

힐러 최설화가 아닌 메이드 팀장이 주방에서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질문을 던졌던 메이드 팀장이 유다연을 보고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어서, 힐러님을 불러 주세요. 어서요.”

메이드 팀장이 전화를 걸면서, 혹시 몰라 다급하게 직원을 시켜 별채로 보냈다.

소란스러워지고 있는 가운데 유다연은 오히려 공포감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는 준혁의 말을 떠올렸다.

- 유다연 씨가 던전의 핵이 될 겁니다.

던전의 생기이자 생명력.

던전핵.

즉 던전화 시키는 본체가 본인의 육신이라면 지금은 던전화를 위한 준비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리라.

유다연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귀환자가 자신을 구해 주리란 사실을.

메이드 팀장이 가져온 수건을 받아 직접 입가의 핏물을 닦았다.

“괜찮아요.”

차분해진 유다연을 보고 지우는 훨씬 더 걱정되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겨 낼 거니까.”

지우가 눈물이 맺힌 얼굴을 끄덕였다.

“다 지나갈 거예요. 분명히.”

유다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수건으로 마저 입가를 닦았다.

불현듯 자신이 이렇게나 겁이 많은 사람이었나 싶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두려움으로 주변에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민망해질 정도였다.

“무슨 일 있어?”

메이드 직원의 부름을 받고 온 최설화가 거실로 들어와 물었다.

“그게 유다연 씨가 갑자기 각혈을 해서요.”

최설화가 유다연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았다.

마나스캔으로 상태를 확인한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마나의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어. 딱히 힐을 써야 할 정도의 문제는 아니야. 굳이 치료하기보단 최대한 감정의 폭을 안정화시키는 게 중요해 보여.”

“괜히 신경 쓰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힐러님.”

“귀환자님의 손님이시니 마땅한 예의죠.”

최설화가 지우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거실을 떠났다.

“어서 소파에 편하게 앉아요. 물 드릴까요?”

지우가 물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방에 가서 쉬고 있어도 될까요?”

“그럼요. 같이 가요.”

유다연은 지우의 부축을 받으며 서둘러 자신이 머물던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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