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25화
라미네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준혁의 손이 뻗어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단 사실에 라미네르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뒤이어 준혁의 눈빛을 다시금 보는 순간 라미네르는 소름 끼치는 미지의 공포를 느꼈다.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할 공포의 근원 따위는 준혁의 눈 속에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외려 준혁의 눈 속에는 마왕들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어둠의 권위가 깃들어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대체 넌…….”
준혁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목을 틀어쥐는 힘이 점점 더 강해졌다.
“나, 날 죽이면! 내가 지배한 이 육체는 죽고 마는……!”
준혁이 팔을 뻗자 거대한 묵빛의 책.
멸마의 서가 펼쳐졌다.
그 멸마의 서로부터 천계의 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의 문자는 눈부신 광채를 뿌리며 라미네르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라미네르가 당황한 듯 숨이 거칠어졌다.
라미네르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빛의 문자를 보다가 준혁의 손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빛의 문자는 전혀 경험한 적 없는 압박과 공포가 되어 라미네르를 짓누르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혼의 일부가 조금씩 깨지듯 소멸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멸은 소생이 불가능한 완전한 죽음.
라미네르가 지배한 유다연의 육체에는 전혀 손상 없이, 오직 영혼만이 새파랗게 타오르듯 무너지고 있었다.
고통과 함께 파괴되어 가는 건 오직 라미네르의 영혼뿐이었다.
“끼아아아아아악! 말도 안 돼 인간이 어떻게 천계의 힘을……! 그, 그만!”
라미네르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지만, 준혁의 눈엔 조금의 아량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준혁의 눈은 점점 더 어두운 기운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복종할게요. 그러니 제발, 멈춰 주세요. 제발요…… 흐흐흐흐흑!”
고통에 의해 몸을 벌벌 떨며 말하는 라미네르를 보면서 준혁의 눈이 더 강해졌다.
“누가 보냈어?”
“그분들은……!”
라미네르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배후를 말하려는 순간, 마계어가 라미네르의 영혼에 새겨졌다.
준혁이 보기에 그건 아마 이미 인간계로 오기 전부터 계약된 마법 같았다.
일종의 자살폭탄과도 같은 마법이었다.
진실을 내뱉기 이전 라미네르의 영혼이 폭발했다.
영혼은 검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준혁이 곧장 무너지듯 쓰러지는 유다연을 품에 안고 천천히 바닥에 눕혔다.
라미네르에게 잠시간 육체를 빼앗겼던 유다연은 마치 악몽을 꾸는 듯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준혁은 그런 그녀를 응시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혁이 위치를 말하며 유다연의 상태를 간단히 체크했다.
“차량 한 대와 힐러가 필요해.”
- 바로 보낼게요. 5분이면 됩니다.
통화를 끝내고, 유다연의 이마를 만져 봤다.
열은 전혀 없었다.
휴식만 취하면 충분히 별문제 없이 회복될 것 같았다.
“귀환자님.”
발자국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준혁의 전담 힐러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받으며 나타났다.
텔레포트 마법으로 공간이동이 가능한 세계 정상급 힐러이자 준혁의 전속 담당 힐러, 최설화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준혁에게 다가가다가 곧 바닥에 누워 있는 유다연을 보고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녀가 유다연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다친 게…… 이 사람이었나요?”
“그게 중요합니까?”
준혁이 최설화를 보며 물었다.
“…….”
최설화는 아주 잠시 망설였다.
자신은 귀환자인 한준혁의 전담 힐러가 되기 위해 한국에 왔다.
본래라면 자신이 이런 식으로 일반인이나 일반 각성자를 치료하기 위해 힐을 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최설화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잠깐 몇 초에 불과한 고민 후에 쓰러져 있는 유다연에게 걸어갔다.
마나 스캔을 해 보니 치료는 가벼운 힐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최설화가 손을 뻗자 은빛 가루 같은 것이 눈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땀을 흘리며 눈살을 구기고 있던 유다연의 얼굴이 곧 편해졌다.
“큰 부상이 아니니 곧 괜찮아질 거예요.”
유다연은 힐러 최설화의 말대로 안정을 찾은 얼굴이었다.
준혁은 안정세를 찾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배후가 누구지?’
분명 멸마의 서로 영혼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미리 준비된 마법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마치 어떠한 흔적을 지우려는 듯이 자결을 유도하는 마법.
‘아우터 갓?’
잠시 생각에 잠겼던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들이 한준혁 자신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면 결코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무의미한 방법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곧 차량이 도착할 테니 이 여성 분은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최설화가 호리호리한 몸으로 유다연을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건물 난간으로 가서 하늘을 봤다.
유다연을 덮쳤던 구름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하늘이었다.
* * *
“유다연 헌터가 지금 병원에서 의식을 찾고 정상 컨디션으로 검진을 받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따로 더 알아봐야 할 사항이 있을까요?”
준혁은 고개를 저어 보이고 캐슬 안으로 들어갔다.
꽤 빠른 걸음이라 매니저가 곧장 뒤따라 붙었다.
“귀환자님이 계셨던 폐건물 부근에서의 소음에 대해서는 일단 언론 측을 막아두긴 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한선우 협회장에게는 보고했습니다. 다급한 사안이라 제멋대로. 죄송해요. 허락도 없이.”
“괜찮아. 선우는?”
“도착하시면 바로 전화 달라고 하셨어요.”
준혁은 소파에 앉으면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거의 신호가 가자마자 전화가 연결됐다.
- 형! CCTV에 유다연이 운전한 차가 사고 난 걸 확인했어. 이상 기후 현상까지도 확인했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마도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것 같다. 영혼계였고. 그 이상으로는 알아낸 건 없어.”
- 우리 쪽에서도 분석이 들어갔는데 이상 기후에 대해서는 전례가 없는 형태였어.
“분석이 되긴 해?”
- 전담팀이 있어. 연구원들이 파고 있고, 설령 차원계라고 해도 분석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시간이 꽤 걸리겠지.
현재 준혁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번 일은 동생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했다.
“뭔가 실체가 있는 결과가 나오면 알려 줘. 내가 알아야 할 일일지도 모르니까.”
- 알았어.
“던전 일정은 선우 네가 알아서 잡아. 내가 맞추면 되니까.”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던전을 돌고 싶었지만, 가뜩이나 시간에 쫓기는 동생을 더 바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 스트리밍은 확실히 하기로 결정한 거지?
“그래야지. 시스템 보상이 주어지는 동안은.”
- 그럼, 오늘 밤 안에 일정 준비해서 바로 공지 올릴게. 방송 스케줄은 내 쪽에서 알아서 커트할 테니까, 이후 던전 스케줄은 형 편한 대로 하면 돼.
“그래.”
준혁이 전화를 끊고 매니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절차상 거쳐야 할 던전이 블루 던전 다음으론 레드 등급이라고 했지?”
“네. 맞아요.”
“던전에 들어가려면 조건이 있는 걸로 아는데, 뭐였지?”
“보통은 길드 경매 입찰로 진행돼요. 현재 레드 던전부터는 모두 낙찰되어 빈 매물이 없는 상태여서, 구하려면 길드와 거래를 통해 매물을 거래해야 해요.”
“남은 매물 잔량. 그리고 협의 가능한 길드 알아보는 데 얼마나 걸려?”
“내일 오후 2시까지 1차적으로 진행 상황 보고 드릴게요.”
“하나가 아니야.”
“네?”
“레드 게이트는 하나만 있으면 되지만 나머지 골드 던전 수급에 집중해야 돼. 매입 가능한 모든 수량으로. 단 강제적이지 않도록. 시장에 맞게.”
“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시장 독점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최대 물량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준혁이 매니저 지우를 빤히 봤다.
“어... 제 얼굴에 뭐 묻기라도…….”
“이지우 매니저.”
매니저 지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준혁의 눈동자를 보았다.
“네, 넷?”
“늘 신뢰하고 있어. 잘 부탁해.”
준혁이 지우의 어깨를 툭 짚어 주곤 거실을 떠났다.
* * *
거실에 혼자 남은 매니저 지우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든 채였다.
준혁이 거실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쯤 부터 지우는 참았던 숨을 겨우 뿜어낼 수 있었다.
지우가 멍한 눈으로 먼 곳을 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귀환자님이 나를…… 신뢰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어.’
믿기지 않는 듯 웃던 얼굴을 붙잡은 채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꺄아.”하고 작게 비명을 지르던 지우가 낯선 공기를 느끼고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뒤를 봤다.
그곳엔 준혁의 전담 힐러인 최설화가 찻잔을 든 채 미소 짓고 있었다.
“무, 뭘 봐요?”
당황한 매니저 지우가 자기도 모르게 화를 내듯 말하자 최설화가 살짝 놀란 얼굴이 됐다가 꾸벅 머리를 숙여 보이곤 주방으로 향했다.
“아, 아아. 힐러님? 최설화 힐러님! 그게 아니라.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만!”
다급히 주방으로 좇아가자 최설화 차 한 잔을 더 만들고 있었다.
“우리 신뢰받는 이지우 매니저님? 차 한 잔 하시죠.”
최설화 역시 한 미모를 하는지라 마치 CF 광고처럼 웃으며 찻잔을 내밀었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싸늘한 공기가 배여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 당황해서요. 칭찬에 면역력이 안 좋은 사람이라. 가신 줄 알았는데 아직 안 가셨네요. 아니 빨리 가라는 얘기가 아니고요.”
지우가 횡설수설하며 최설화가 준 차를 급히 마시다가.
“아뜨뜨!”
“천천히 마셔. 뜨거울 텐데.”
최설화가 재밌다는 듯 지우의 등을 토닥였다.
너무 뜨거워서 하마터면 뱉을 뻔했다.
최설화가 걱정하는 얼굴로 지우를 내다봤다.
“괜찮아? 가볍게 힐 치료라도.”
“아니요! 이 정도로 그런 사치스러운 치료라니요. 괜찮아요, 정말! 제가 성미가 급해서. 하하하. 천천히 식혀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지우가 찻잔을 들고 도망치듯 주방을 나왔다.
‘못 살아 정말!’
지우는 죽고 싶다는 표정으로 걷는 속도를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 * *
지우가 주방을 떠나고 홀로 주방에 남은 힐러 최설화는 찻잔에 뜨거운 물을 더 태우고 거실문을 통해 잔디 마당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차를 마시던 최설화가 스마트폰 진동을 느끼고 전화를 받았다.
“네. 저예요.”
- 어떻게 돼 가나?
최설화가 2층 침실 쪽 불빛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결국 뜻을 이루게 될 겁니다.”
최설화가 미소와 함께 찻잔 속의 차를 마셨다.
이내 그녀는 귀환자, 준혁이 있을 침실 쪽의 창가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