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20화
거인 아르고는 태어나 처음으로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
자신이 섬기는 마신 아래 천적이라고 느낄 것은 없었다.
분명 외부 어딘가에 그런 것이 존재할 거라고 어렴풋이 상상은 해본 적 있지만, 던전 안에서, 그것도 인간을 대상으로, 천적으로 치부하게 될 대상을 만날 거라곤 상상치 못했던 일이다.
“지켜야 해…… 그리고 나아가야 해. 던전 밖으로. 하지만…….”
거인 아르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상체를 구부린 채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동굴의 천장 높이는 높았지만, 거인 아르고의 키가 더 컸기 때문에 아르고는 등을 구부린 자세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동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거인 아르고는 점차 적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느꼈다.
전신의 털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그리고 이내 대상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세 개의 단어가 빠르게 거인 아르고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죽음, 소멸, 지옥.
아찔한 공포감이 전신을 삼켰다.
근육이 굳어 버려 땀을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 * *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 대체 너의 정체는 무엇이지……?”
거인 아르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도 돼.”
준혁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거인 아르고의 갈비뼈가 뭉개지면서 동굴 벽으로 거구의 육신이 날아갔다.
염동력으로 만든 힘의 작용이었다.
쿵! 하고 커다란 소리를 내더니 뿌연 먼지가 잔뜩 일었다.
먼지 속에서 기어 나오며 거인 아르고는 피 섞인 기침을 토해 내며 안간힘을 다해 일어서려고 노력했다.
“일정 개체수가 줄어야 한다던데. 다른 놈들은 어디 쯤에 있어? 네가 대충 보스몹 같긴 한데.”
준혁이 아르고에게 걸어가면서 물었다.
아르고는 칼을 바닥에 푹 찍으며 벌벌 떨면서 일어섰다.
“죽고 싶지 않아…… 흐흐흑. 죽고 싶지 않아.”
“희망을 버려.”
“아니야!”
아르고가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준혁의 손이 훨씬 더 빨랐다. 어느새 준혁의 손엔 빛의 검이 있었고, 그 검은 칼을 휘두르던 아르고의 팔을 잘라 냈다.
쿵. 팔이 떨어졌다.
피를 뿜으며, 거인 아르고가 어깨를 붙잡은 채 고개를 젖히며 비명을 질렀다.
여기가 마계였다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고문을 통해 취조했겠지만, 여긴 마계가 아닌 인간계. 지구였다.
더욱이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의 수는 얼마인지 셀 수도 없다.
마계의 습관을 그대로 갖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런 제약이 껄끄럽다고는 해도 동생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준혁은 빛의 단검을 빛의 창으로 바꾼 후, 걸음을 옮겨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는 거인 아르고를 봤다.
거인답게 워낙 크기가 남다른지라 쓰러졌음에도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대답하면 살려 준다. 던전핵은 어디 있지?”
거인 아르고가 숨을 헐떡이며 준혁을 내려다봤다.
“저, 정말? 나, 나를 살려 줄 건가…….”
“내 약속을 못 믿는다고 해도 최소한 던전핵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겠지. 안내는 네가 해야 할 테니까.”
던전을 유지시키는 결정체.
그 던전핵을 파괴하면 던전의 생명치를 순식간에 3분의 2 이상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럼으로 인해 던전은 마수 생성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때문에 마수의 개체수를 줄이는 것보단 던전핵을 파괴하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이는 일전에 휴식을 취할 때 던전에 대해 공부했던 기초적인 내용이었다.
준혁은 아르고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도록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아르고가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앞장서기 시작했다.
“안내하겠다…… 던전핵으로…….”
마계에 있을 때 주로 썼던 방식인데, 악마들도 공포를 느껴 상위 지배종에게 지배당하곤 했다.
마계의 악마도 공포를 견디지 못했으니 던전의 마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준혁은 생각했고, 그 생각은 잘 맞아떨어졌다.
물론 마계에 가끔 마신을 향한 충심이 강한 녀석들이 있긴 했지만 그런 놈들이야 보이는 순간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 본격 보스몹 길들이기.
- 거인을 저렇게 쉽게 후드려 까다니. 이 정도면 버그!
- 진짜 초보 사냥터 맞네. 물론 귀환자님 한정…….
- 귀환자님 레드 게이트랑 골드 게이트 사냥하는 모습 보고 싶다. 개쩔 듯? ㅇㅈ?
- ㅇㅈ
- ㅇㅈ
- ㅇㅈ
- ㅇㅇ
- 이렇게 블루 게이트 사냥이라도 보는 게 넘나 감사하다능. 파천 길드 최고!
- 진짜 오늘 이후로 전 세계 헌터들 전부 다 귀환자님 앞에 머리 박아야 함.
- 진정 신이다. 워…….
- 협회 계약금 1조에 연봉 천억이라는 썰 있던데. 받을 만하네 ㅡㅡ;;
- TOP5에도 못 들었던 나라 원톱 랭크로 만든 거 귀환자님 한 명 때문임.
- ㅅㅂ 졸라 든든하다 진짜 ㅋㅋㅋㅋㅋ
- ㅎㅎㅎㅎ 밸붕의 사나이.
- 만약에 게임이었으면 게임사 부랴부랴 패치 했다 ㅇㅈ?
- 블던 사냥을 노잼으로 만들어 버리는 클라쓰.
- 긴장감 0.1도 없음. ㄹㅇ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ㅇㅈ
“귀환자님이 던전에 들어간 지 정확히 이제 30분 정도가 지났는데. 사실 귀환자님이 일부러 설렁설렁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거든요?”
MC최현호의 말에 던전 전문가가 웃었다.
“예. 아무래도 파천 길드의 이벤트를 생각해서 사냥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월드의 장점은 각성자의 속도를 일반인도 볼 수 있도록 더 월드가 자동적으로 그 속도를 조절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얼마나 빠른 속도일지는 감히 가늠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겨우 30분입니다! 보스몹에게 던전핵 안내를 맡기기까지. 진짜 경이롭네요!”
MC최현호가 혀를 내두르며 웃었다.
“던전핵을 파괴하고 나면, 마수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할 겁니다. 던전이 무너지게 된다는 걸 자각하게 될테고 본능이 던전을 침입한 대상에게로 향하게 될 테니까요.”
“예. 저도 던전핵을 파괴하면 클리어가 가속화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개체수가 많은 상태에서 던전핵을 파괴하면 마수가 갑자기 다량으로 몰리니까 위험할 수 있지만.”
MC최현호가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귀환자님이면 뭐. 그렇죠?”
던전 전문가가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예. 전혀 문제 될 건 없어 보입니다.”
* * *
거인 아르고는 머리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절벽 끝에 내몰린 상황이라 그런지 하얗게 변해 버린 머릿속에 어떠한 수단도 떠오르지 않았다.
던전핵이 파괴되면 던전은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게이트를 버리고 나가려면 지금 뒤따라 오고 있는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을 죽여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인간이 자신을 무사히 던전 밖으로 보내 줘야만 한다.
인간이 마수를 던전 밖으로 내보내 준다?
순순히?
그럴 리가 없었다.
마수는 인간에게 적이자 사냥감이었고, 인간 역시 마수의 적이자 사냥감이었다.
공존할 수 없는 세계이기에 마수는 침략자로서 존재했다.
희망을 버려.
인간의 목소리가 머리에 윙윙 울렸다.
두려움이 가슴을 옥죄어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던전핵을 찾아가는, 그 주어진 시간 동안 짜내고 짜낸 유일한 전략은 던전핵을 파괴해 지능이 낮은 마수들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숨어 있던 자신이 그때 인간을 공격하는 것 정도뿐이었다.
결국 총력전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부디 저 무지막지한 인간에게 불운이 찾아오길 바라며 아르고는 준혁을 데리고 던전핵 앞에 도착했다.
“이게 던전핵.”
준혁이 작은 돌기둥 위에 놓인 동그란 구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던전핵은 던전땅과 이어져 있었다.
스탠딩 마이크처럼 얇은 대 위로 악마의 얼굴이 조각처럼 만들어져 있다.
별달리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
평범한 악마 조각처럼 보였지만 이 것이 던전의 심장이었다.
이 던전핵을 파괴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손으로 잡아 마력을 주입하면 악마의 풍경이 의식 안에서 피어난다.
그 작은 악몽을 지나 끝까지 마력을 주입하면 던전핵이 간단하게 파괴된다.
상당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보통 팔라딘 특성의 각성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준혁이 던전핵에 손을 가져다대자 그 즉시 찰나의 시간 동안 강렬한 검은빛을 뿜더니 던전핵은 악몽 같은 건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분해된 채 이내 사방으로 파편이 날아갔다.
사실상 손을 대자마자 파괴 된 것이다.
“이렇게 쉬웠나?”
준혁이 고개를 갸웃하곤 거인 아르고를 돌아봤다.
뒤꿈치를 든 채로 살금살금 도망가던 아르고가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일반 마수들은 지능이 낮은 만큼 던전핵이 파괴되면 단체로 반응을 할 테고 넌 그 순간을 기회로 보고 있겠지.”
아르고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디서 기다리면 돼? 여기?”
아르고가 벌벌 떨면서 준혁을 돌아봤다.
한없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서 있는 준혁을 보고 아르고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굵은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기…… 다릴 건가?”
“상관없어.”
“……알겠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라.”
아르고가 쿵쿵 발소리를 내면서 달아났다.
준혁은 근처 바위에 앉아 털썩 앉아 던전을 지키기 위해 몰려들 마수들을 기다렸다.
* * *
- 아르고 도망갈 때 눈빛 킹받네.
- 아르고 엉덩이 귀여워!
- 몰이 사냥하시려는 듯요.
- 존멋이네 진짜 하…….
- 블던인 걸 잊게 된다. 여기 초보 사냥터 맞죠 오빠들? ㅋㅋ
- 보스몹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 거 가능한거냐?;;
- ㅎㅎ 잘생겼다 귀환자님.
- 더 월드 카메라 앵글 기가 막히게 잘 잡네. 그리고 아까 아르고 표정 뭔데 ㅋㅋㅋㅋㅋㅋ
- 그래도 나름 블던 보스몹인데 ;; 보는 내가 다 좌절스럽다.
- 블던이 약해 보인다 ㅁㅊ
- 확실히 블던 정도는 그냥 갖고 노는 수준이야.
- 이 채팅방에 몰래 섞여서 덕후 챗 쓰는 국내 랭커들 있다에 내 손모가지 검.
- 그게 맞지. 헌터의 헌터. 각성자의 각성자.
- ㅇㅈ
.
.
실시간 시청자들의 반응을 본 해설진 역시 시청자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보다 보니까 귀환자님이 점점 저희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지네요.”
“맞아요. 너무 멋있어요, 귀환자님.”
“권아영 씨. 너무 반하지 마세요. 팬들한테 혼날 수도 있으니까.”
“멋진 걸 어떡해요.”
“예예. 잘 알겠고요. 음…… 던전 전문가님?”
“하하, 네.”
“지금 분위기를 봐서는 귀환자님이 마수들을 모아서 한 번에 사냥하는 것. 그러니까 헌터들 은어로는 몰이 사냥을 할 것 같거든요? 맞습니까?”
“그럴 수밖에요. 던전핵이 깨졌으니 마수들은 불안감에 흥분할 겁니다. 지능은 낮아도 본능은 오히려 지능이 높은 보스몹들보다 훨씬 더 강하니까요.”
“지금까지 귀환자님의 전력을 봐서는 몰이 사냥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트롤들을 쓰러트린 광역 능력을 이미 본 바가 있기 때문에 블던의 마수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고 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일반 던전도 아닌, 블루 던전에서의 몰이 사냥이라니.”
“아무래도, 파천 길드에서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해서 블루 던전을 준비한 게 최선이었던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사실 레드 던전 솔플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그래도 블루와 레드 던전의 갭 차이는 상당히 클 텐데요?”
“예 그렇죠. 하지만 더 월드에서 리더보더의 주 사냥터가 레드 던전이라 알려져 있죠.”
“하지만 스트리밍 라이브로 공개된 적은 없잖아요?”
“예 아무래도 그 정도 수준의 각성자는 사생활을 알기 힘든 영역이니까요.”
“우선 귀환자님이 어떤 방식으로 블루 던전 몰이 사냥을 끝마칠지 기대해야겠습니다.”
MC최현호의 무대 쪽과 시청자들 모두 준혁이 어떤 식으로 마수들을 상대할지 기대감이 만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