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2화
“진짜 없는 게 없구나 여긴.”
준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 정도면 테마파크 수준이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청사로 지정했으니 규모로 치면 사실상 테마파크와 다를 바가 없긴 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만들 수도 있어요. 여긴 오직 귀환자님만의 성전이니까요.”
“됐고 일단 서류부터.”
“금고에 넣어 놔서 잠시 다녀올게요. 5분 정도만 기다려 주세요!”
매니저가 금고로 뛰어가는 사이 준혁은 TV를 틀었다.
“파천 길드에서 귀환자를 공개한 당시의 현장 모습입니다!”
삐빅-!
“위크데이 패션입니다. 귀환자님의 패션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요. 제가 봤을 때는 어느 모로 봐도 기성으로 나온 명품이 아닌 이태리 최고급 맞춤…….”
삐빅-!
“런닝메이트 귀환자 특집편! 오늘 여러분들의 임무는 귀환자가 되어서 마수들을 처치하는 건데요. 실패하시면 오늘 저녁 식사는 마늘과 쑥으로만…….”
삑-!
준혁은 결국 TV를 껐다.
어떻게 된 게 채널을 돌릴 때마다 귀환자 얘기가 빠지질 않는다.
‘내일이면 바로 던전으로 갈 수 있을까?’
마계에서 늘 칼을 쓰던 습관은 기억의 한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준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칼자루는커녕 청소기 한 번 돌려 본 적 없는 곱디고운 손.
딱히 던전을 위해 준비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천 년간 방치했던 육체를 되찾았으니 마계에서의 감각과는 실제 상당히 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질적인 인간 육체의 감각이 익숙해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다녀왔습니다. 귀환자님.”
매니저가 대리석 테이블 위로 사인해야 할 서류들을 하나하나 펼쳐서 나열했다.
사인해야 할 서류들은 수십 장이었다.
“무슨 계약서가…….”
“아무래도 통장부터 새로 만드셔야 하다 보니 사인할 서류가 좀 많으세요.”
매니저가 만년필을 건네주었다.
동생이 말한 대로 서류를 꼼꼼히 체크한 후에, 하나하나 사인을 했다.
사인이라고 해봐야 한준혁이라는 이름을 휘갈겨 쓰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대충 급조해서 만든 사인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끝난 거지?”
“잠시만요.”
매니저가 서류를 한 차례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되셨어요. 이 중에 중요한 서류가 섞여 있다 보니 귀환자님께서 직접 파천 길드의 길드마스터에게 서류를 넘기셔야 해요.”
딱히 매니저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이 서류를 전달하러 움직이는 과정이 그녀에겐 꽤 무거운 책임이 될 수 있다.
서류를 전달하는 중간 과정에서 방해 공작으로 외부 개입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어차피 던전에 대해서도 확실히 해야 할 게 있으니까 내일 파천 길드로 가면 되겠네. 동생한테 일정 확인해 보고 스케줄 잡아.”
“네 알겠습니다. 저기, 연무장은 바로 가 보시겠어요?”
매니저가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그래야지.”
“그럼 저는 금고에 좀 다녀올게요! 중요한 문서다보니 내일 출발하기 전까지 다시 채워둬야 해서요.”
“다녀와.”
매니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짹짹-!
준혁은 넓은 잔디 위에 참새 몇 마리가 앉아 있는 걸 돌아보았다.
마계가 겹쳐 보인다.
삭막하고 말라 비틀어진 폐허의 땅.
그 위로, 악마들의 피와 시체가 뿌려진다.
24시간 잠들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악마들을 죽여 온 시간들.
준혁의 눈이 아주 먼 곳을 좇던 때.
“귀환자님.”
매니저가 돌아왔다.
“연무장 위치가 정확히 어디쯤이야?”
“같이 가세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캐슬 본관 밖으로 나왔다.
운전기사가 대기 중이었지만 준혁은 걸어가겠다고 전하고 매니저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혼자 가도 되겠네. 따라올 것 없어.”
“그럼, 전 캐슬에서 대기하고 있을 게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무전 주세요.”
매니저 지우가 무전기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가벼운 트레이닝 차림으로 연무장 쪽으로 향했다.
조금 거리가 있긴 했지만 저 멀리 커다란 단층 건물이 한눈에 보여서 헤매고 싶어도 헤맬 수가 없는 위치였다.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자 오래 걸리지 않아 연무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준혁은 건물을 올려다봤다.
멀리서 볼 때도 꽤 감각적인 건축이라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베이지 톤의 블록 형태의 건물은 마지 단순한 건축 구조이면서도 고급스럽고 우아함을 풍겼다.
출입구 위로 전쟁의 신 아테나가 조각되어 있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동적이었다.
끼릭!
나무로 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편백향과 함께 넓은 연무장이 준혁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굉장히 넓은 공간의 도장이었으며 벽화는 예술적으로 용의 역사를 잘 담아 놓았다.
얼마나 기세가 잘 표현되었는지 벽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끓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 역시 백인호라는 군단장의 아버지가 만든 것일까?’
큰 청룡이 새겨진 천장 아래 모든 실내에는 마나석을 통해 보호벽이 설치되어 있다.
때문에 연무장 내부는 아무리 날카로운 것이나 무거운 것에 의해 충격을 받더라도 보호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처음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정면의 벽면에는 병장기가 있었는데 준혁은 그중 칼 한 자루를 꺼냈다.
칼집에서 나온 칼날이 상당한 예기를 뿜어냈다.
연무장의 벽면에 나열되어 있던 검들 중 하나인데 어디서 구한 건지는 몰라도 훌륭했다.
이 칼이 가진 예리함과 강도는 굳이 사용해 보지 않아도 그 힘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평범한 사람이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위력을 낼 만한 검.
마력을 사용한다고 하면 사실상 인간계에서 칼은 필요 없다. 하지만 몸을 쓰지 않으면 당연히 그만큼 감각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혼으로 존재하는 게 아닌 피조물이 만든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쓰지 않으면 퇴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필멸자의 운명.
육체는 쓰지 않으면 그만큼 무뎌질 수밖에 없다.
갑작스러운 기습이나 장치에 둔감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만큼 훈련을 통해 육체의 감각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해야 했다.
더욱이 외신에 대항하기 위해선 마력뿐만이 아니라 육체 자체도 강화시켜야 했다.
물론 그에 필요한 준비물들은 예정되어 있다.
‘멸마의 서로 찾을 수 있는 건 비단 신수들뿐만이 아니지.’
각종 희귀한 물질로 장비를 만들 수 있으며 필멸자의 운명을 초월할 육체를 만들 신비한 물약 역시도 준혁이 찾는 어비스에 존재했다.
준혁은 칼을 놓고, 상의를 벗었다.
인간계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무인다운 육체로 재탄생 시켰다. 그리고 약 한 달간 틈틈이 육체를 다듬기 위해 근력 운동을 해 놓았던 터라 준혁의 몸매는 현재 가히 신을 조각한 듯 완벽했다.
불필요한 지방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무인의 육체였다.
환골탈태를 거친 것도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준혁이 가지고 있는 마력이 필요 없는 지방을 분해하는 덕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계가 있다.
아우터 갓의 손길 한 번에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육체란 점은 여전히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훈련량으로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니 우선은 감각을 키우는 훈련 정도가 좋을 듯했는데, 연무장에는 마침 그에 딱 맞는 기가 막힌 물건이 있었다.
“연무장 홀 중앙부 우측 벽면을 보시면 인공지능 로봇이 하나 있어요. 혹시나 사용하고 싶으시면 허리 쪽 전원만 온오프 하시면 되세요.”
매니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대로 홀 중앙 벽면 쪽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로봇 하나가 서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감각 훈련을 하기에는 로봇을 쓰는 게 가장 좋아보였따.
준혁은 로봇을 흥미롭게 보면서 로봇의 허리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엘리베이터 문처럼 작은 공간이 열렸다.
기계음이 나더니 전원을 켜고 끌 수 있는 버튼이 나타났다.
달-칵!
전원을 켜자마자 백지 같은 새하얀 로봇의 얼굴에 두 눈이 번쩍였다.
‘된 건가?’
뚜벅. 뚜벅.
로봇이 제멋대로 홀 중앙으로 걸어갔다.
준혁은 순수하게 감탄한 표정으로 로봇을 바라봤다.
로봇은 전혀 로봇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감정이 없다는 게 느껴지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움직임이 말도 안 되게 자연스러웠다.
마치 평범한 인간이 움직이듯 관절의 움직임이 사실적으로 부드러웠다.
“난이도를 결정해 주십시오.”
로봇이 말했다.
로봇 상체에 난이도가 5단계로 분류되어 불빛이 반짝였다.
준혁은 그중 3단계를 터치했다.
“난이도 확인.”
로봇이 뒤로 세 걸음 물러나더니 빠르게 무도인의 자세를 잡았다.
“재밌네.”
천천히 로봇과 맞은 편 쪽으로 이동했다.
준혁은 어깨 관절을 풀면서 육체에 스며들어 있는 모든 마력을 해제했다.
단 한 줌의 마력도 소유하지 않고, 외부로 유출시켜 두자 몸은 마치 태산이 누르듯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마력을 강제로 해제하지 않으면 훈련을 하는 의미가 없으니까.
로봇을 상대로 훈련하는 건 순전히 인체의 감각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마력을 해제하지 않는다면 저 비싼 로봇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가루가 되어 버릴 것이다.
훈련의 의미가 사리지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 3단계가 어느 정도인지 볼까?”
준혁이 로봇을 향해 비스듬히 자세를 잡고 섰다.
로봇은 천천히 낮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더니 곧바로 거리를 좁혀 주먹을 내질렀다.
준혁의 눈은 정확히 뻗어 오는 로봇의 주먹을 보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마력을 해제한 탓에 뇌의 명령보다 몸은 한 템포 늦게 반응했다.
그 탓에, 로봇의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준혁의 뺨을 스쳤다.
3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속도였다.
뒤이어 날아드는 로봇의 발차기.
가드를 들어 막자 꽤 무거운 타격감이 팔 끝으로 전해졌다.
오랜만에 겪는 통증이었다.
“4단계.”
준혁이 팔뚝의 먼지를 털어 내며 말했다.
“훈련 강도를 4단계로 업그레이드합니다.”
잠시간 대기하고 있던 로봇이 일순 예기치 않은 타이밍으로 공격해 왔다.
마계에서 악마를 괴롭히고 죽이는 게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라고 해도,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건 숨을 쉬는 것처럼이나 익숙한 일.
어차피 마력을 운용하면 신체를 가속할 수 있지만 본 육체에 대한 이해도가 없으면 실수가 생길 수 있으므로 준혁은 최대한 신체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머리를 쓰면서 로봇을 상대했다.
로봇의 공격을 막아 낼 때마다 커다란 소리가 체육관을 울렸다.
확실히 로봇을 상대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지만, 반대로 로봇은 준혁과의 전투를 인공지능으로 학습함에 따라 대전 훈련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로봇의 학습보다 준혁의 감각이 로봇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뻗어져 들어온 주먹을 피해 로봇의 팔을 잡고 바닥에 업어 쳤다.
쿵.
“5단계.”
준혁이 로봇을 내려다보며 난이도를 최고 난이도로 상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