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9화
다음 날 아침.
1층 거실로 쪽으로 내려가자 집사와 메이드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메이드들은 준혁 앞에서 급하게 속도를 늦추고 고개를 조아린 후에 살금살금 지나갔다.
“잘 주무셨어요?”
밝은 표정으로 아침 인사를 하는 매니저 이지우는 여전히 빈틈없는 모습이다.
어제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검은 목폴라에 검은 치마 슈트. 그리고 뾰족구두는 프로페셔널한 느낌을 전해 준다.
“뉴스에 뭐 나온 거 없어?”
매니저 지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없었습니다. 필요한 자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알아볼게요.”
“전 협회장에 대한 뉴스가 뜨면 바로 알려 줘.”
“네. 알겠습니다. 다른 사항은요?”
준혁은 고개를 저어 보인 후, 거실 소파에 앉았다.
매니저가 다가와 테블릿을 켰다.
“일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일정은 11시에 파티복을 맞추신 후에 오후 3시 메이크업. 그리고 오후 5시 인터뷰 예정이에요. 스케줄 직전에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준혁은 TV 채널을 돌리며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씀하신 전 협회장에 대해서는 오늘부터 집중 체크하겠습니다.”
매니저가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해야 할 업무와 관련 없는 것에 대해선 시간을 뺏지 않는다.
처음엔 매니저가 있다는 게 영 불편하게 느껴질 거라 생각했지만 겪어 보기도 하고 막상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니 동생 말대로 정말, 없으면 불안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필요한 일들을 잘 처리했다.
무엇보다 지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불편할 일들을 모두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신수만 찾으러 다닌다면 매니저 같은 건 전혀 필요 없겠지만 한선우의 형으로서 그리고 인간 한준혁으로서 살기에는 매니저의 역할이 의외로 꽤 중요했다.
평범한 인간 생활이 의외로 준혁에겐 어려웠기 때문이다.
준혁은 테블릿을 들고 가는 매니저의 뒷모습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메이드들. 그리고 통유리 밖 마당에서 정원을 가꾸고 있는 일꾼들을 봤다.
늘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했던 마계와 정반대로 이곳은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을 케어하기 위해 존재했다.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것들이 벌써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 * *
“이 원단으로 하는 게 좋겠어요. 색상은 블랙. 타이는 보타이로. 심플하지만 화려하도록”
슈트 테일러가 신체 사이즈를 잰 지 얼마 되지 않아 기계에 원단을 넣더니 놀랍게도 오래 걸리지 않아 곧바로 피팅이 시작됐다.
AI 기계의 발전 덕분에 가능한 속도였다.
더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것이 출장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준혁은 현재 아주 넓은 거실에서 기자회견장에 입고 갈 슈트를 피팅 중에 있었다.
“굉장한 몸매에요! 군더더기 없는 데다 적당한 근육량. 거기에 완벽한 외모까지! 간단한 피팅만으로 파리 패션쇼를 연상시키는 당신! 꺄아아 대체 정체가 뭐냐고오오!”
여성 호르몬이 철철 넘쳐 흐르는 이 테일러는 국내 최고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테일러였다.
남자임에도 여성적인 말투와 몸짓이기도 했고 뭣보다 큰 목소리로 과할 정도로 칭찬하는 건 민망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그가 이토록이나 시끄럽게 요란을 떨 수 있는 건 아직 이 테일러가 준혁이 귀환자라는 사실을 몰라서였다.
누가 좀 말려 주면 좋겠건만 샵으로 온 매니저는 미리 준비해 둔 명품 액세서리를 체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체 피부 관리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어깨 넓은 것 좀 봐. 슈트가 완성되면 정말 예술적으로 소화하겠어요!”
디자이너가 깍지를 끼며 완벽하다는 듯 몸을 배배 꼬았다.
매니저가 준혁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진행하죠.”
테일러가 직접 가져온 커다란 기계 안으로 피팅이 끝난 옷을 넣자 신기하게도 1분도 걸리지 않아 완벽하게 슈트 한 벌이 뚝딱 만들어졌다.
“벌써 된다고?”
준혁이 놀란 얼굴로 기계를 보며 말했다.
“마나석을 제조 기술에 쓰게 된 지 벌써 5년이에요. 마나석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던전 물질이 문명 발전을 위해 눈부신 성장 속도를 만들어 냈죠.”
던전의 존재는 인류의 위협이자 문명 발전의 핵심 원자재 대부분을 공급한다는 게 매니저의 설명이었다.
던전을 통해 엄청난 돈이 돌고 있었고 전 세계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그 사업의 영역에 뛰어들고 있었다.
전문적인 헌터들이 계속해서 던전에 유입되고 시장이 형성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지막 체크로, 슈트 입어 보실게요!”
준혁은 옷 입는 걸 도와주겠다는 메이드들을 쫓아내고 탈의실로 쓸 만한 방 안에서 혼자 슈트를 대충 입고 나왔다.
매니저가 타이를 매주고, 매무새를 체크했다.
짝짝짝짝짝!
테일러가 손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쳤다.
“퍼펙트!”
테일러가 보타이를 매 주며 눈물이 맺힌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어나 이렇게 보람이 있었던 적은 없어요. 내가 만든 슈트를 이렇게나 완벽하게 소화하시다니. 정말 꿈만 같단 말이에요오오!”
“테일러님. 소리 조금만 낮춰 주세요.”
매니저가 눈을 찡끗하며 부탁하자 테일러는 새침한 표정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매니저가 미리 골라 놓은 액세서리를 가지고 다가왔다.
액세서리는 은색 명품 팔찌와 명품 시계였다.
액세서리까지 모두 착용을 마치고 나자 피팅을 끝낼 수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귀환자님. 저는 그럼 오후 3시에 메이크업 일정 때 돌아올게요.”
매니저가 보타이를 풀어 주며 말했다.
준혁이 지루했던 듯 짧은 한숨을 뱉으며 재킷 단추를 풀 때 테일러가 말을 붙이려고 은근슬쩍 어깨를 같다 부일 때 매니저가 그의 팔을 잡아 강제로 끌고 나갔다.
그 사이 준혁은 거울을 보며 혀를 찼다.
“어떻게 된 게 악마 때려잡는 것보다 옷 하나 맞춰 입는 게 더 어렵네.”
준혁은 눈살을 구기며 답답하게 채워져 있는 셔츠 단추를 풀었다.
의상 피팅이 끝났으니 오후에 메이크업만 하면 기자회견장으로 가야 했다.
* * *
“……그러니까. 차가 아니라 헬기?”
기자회견장으로 갈 시간이 되자 매니저가 캐슬 건물의 후문 쪽으로 이동했는데 왜 이쪽으로 가나 싶었더니 그곳에 헬기장이 있었다.
“지금 시간대엔 헬기로 이동하는 게 훨씬 편하세요. 예나 지금이나 서울의 러시아워는 여전해서요.”
매니저와 함께 헬기 쪽으로 다가가자 헬기 운전수가 준혁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준혁도 인사를 하고 헬기에 올랐다.
옆으로 앉은 매니저가 소음 차단으로 쓰는 헤드폰을 건넸다.
“귀환자님. 사진 찍어도 될까요?”
매니저가 헤드폰을 쓰면서 물었다.
“사진은 왜?”
준혁이 당황한 눈으로 매니저를 보았다.
“길마께서 앞으로 귀환자님의 SNS를 마케팅팀에서 집중 관리하겠다고.”
“나중에. 그런 건 나중에 하자.”
멀미를 하는 듯한 준혁의 얼굴을 보고 매니저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투투투투!
헬기에 시동이 걸리고 프로펠러 소음이 강하게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강한 진동과 함께 헬기가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 * *
파티장에 기자들이 하나둘 입장하기 시작했다.
남양주에 위치한 대저택의 마당에는 엄청난 양의 고급 음식들이 즐비해 있었고 참석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전문 레스토랑 인력 직원들이 바쁘게 서빙하거나 중앙에 설치된 무대의 마무리 작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작은 오케스트라 무리는 무대 부근에서 자리를 잡고 연주를 시작했다.
조금 비어 있는 듯했던 파티장은 금세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듯 기자들이 서로 인사를 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한선우가 나타났다.
기자들의 시선이 파천 길드의 마스터 한선우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회견장 자리를 마련한 터라, 기자들은 영문을 모른 채 이 자리에 왔다.
하지만 파천 길드 쪽에서 반드시 와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주었기 때문에 기자들은 기대감이 만연한 눈길로 선우를 응시했다.
이 정도 자리를 마련했으면 그만큼 특종이 있을 거라는 확신에서였다.
그때.
투투투투!
멀리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다.
헬기가 접근함에 따라 기자들이 시선이 점차 한선우가 아닌 프로펠러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선우는 샴페인을 마시며 기자들의 반응을 살피다 서서히 다가오는 헬기를 응시했다.
헬기가 곧 착륙함에 따라 프로펠러에 의해 바람이 불면서 잔디가 쓸려 나갔다.
헬기가 곧 안전하게 착륙했고, 곧 프로펠러가 멈춤에 따라 기자들의 시선이 헬기로 완벽히 집중되었다.
자리에 참석한 기자들은 물론 일하는 직원들까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헬기를 응시했다.
문이 열리고 헬기 안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슈트 차림의 남자가 점점 무대 쪽으로 가까워졌다.
“비율이 무슨…….”
“파천 길드의 새로운 광고 모델인가?”
“처음 보는데?”
찰칵찰칵-!
기자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헬기를 타고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존재감 자체가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는 남자였다.
셔터를 누르면서도 중간중간 넋이 나간 얼굴로 준혁을 보는 기자들.
이내 준혁이 선우에게 다가가 가벼운 포옹을 하자 회견장에 모인 기자들은 호기심과 궁금증이 점점 터 커졌다.
특종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하나둘 카메라로 빠르게 찍기 시작하자 뒤이어 곧 기관총처럼 카메라 세례가 쏟아졌다.
기자들의 카메라 불빛이 준혁과 선우를 향해 일제히 화살처럼 쏘아지고 있는 가운데.
“스탠바이 됐습니다.”
스탭 직원들이 무대 점검을 확실하게 끝마쳤고,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한다고 선우에게 알려 주었다.
“간단히 약식으로 하면 돼. 진행은 내가 끌고 갈 거니까 긴장하지 말고.”
선우가 먼저 무대로 자신감 있게 올라갔다.
그사이 스탭이 준혁에게 다가왔다.
“제가 신호 드리면 무대 위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서서히 해가 지면서 가로등에 불이 밝았다.
회견장은 이제 곧 본격적인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 * *
“안녕하십니까. 파천 길드의 마스터 한선우입니다.”
오래된 기억 속의 동생은 자신과 달리 센터에서조차 지독하게 공부만 파고들었던 우등생이었다.
그런 녀석이 저렇게 무대 위에서 길드 마스터가 되어 수많은 인원들 앞에서 눈을 빛내며 얘기하는 모습이 참 대견스러웠다.
‘저게 진짜 내 동생의 모습이 맞나?’
늠름하게 커 버린 동생은 지금 이렇게 다시 봐도 의젓하다.
“비공식적으로 비밀리에 여러분들을 이곳에 초청한 것은 그간 파천 길드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를 써 주신 분들에 대한 제 성의였습니다.”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을 예감한 기자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어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싶다는 듯 근질거리는 손을 주물렀다.
“전 협회장 최무성은 협회장 자리에 물러났으며 협회장의 후임으로는 저 한선우가 선출되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엄청난 소식.
서둘러 기사를 쓰면서도 기자들은 쉽사리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알파 길드와 적안 길드만이 독점 권력을 누리던 시대였다.
독점 권력을 가진 그들 아래.
상위 랭킹의 길드를 운영한 고랭크 헌터들은 늘 눈치를 살피며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 오래였다.
전 협회장이었던 최무성은 집권 당시 국내 최강의 권력을 가진 보스였다.
그런 그가 현 협회장 자리를 내어놓고, 그걸 랭크 5위 길드인 파천의 마스터 한선우에게 자리를 넘겼다?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사였다.
여기저기서 손을 들어 질문을 요청했지만 선우는 대답 대신 무대 아래쪽을 돌아봤다.
그곳엔 귀환자 한준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