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200화
65. 갑질의 신
성진수가 정신을 차렸을 무렵,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은 바로 밝은 전등의 불빛이었다.
“여긴 도대체…….”
남서진의 일격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것까지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성진수의 읊조림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쪽은 바로 옆에 나란히 묶여 있는 동료이자 공범, 사카모토 류였다.
“이제 일어났냐.”
“……너도 잡혔냐?”
“보다시피.”
“하하…….”
예상된 결과였다.
사카모토 류와 마지막 통신을 하기 전, 그로부터 아이티와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기 위해 나설 것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성진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이 녀석도 잡히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만큼 아이티의 능력도 무시무시했다.
자신을 때려눕힌 남서진과 마찬가지로.
한편, 두 남자가 눈을 뜨자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채 앉아 있던 김민혁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안녕, 친구들.”
“……김민혁인가.”
사카모토 류가 눈을 흘기며 그를 응시했다.
우석이 이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한 이후, 그와는 처음 대면한 셈이었다.
물론 성진수는 아니었다.
남서진과의 일격을 주고받는 동안, 김민혁의 활약으로 인해 결국 빈틈을 보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성진수는 남서진에게 일격을 당하게 되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다들 나름 잘 지내고 있었나 보구만.”
김민혁이 조롱이 가득 담긴 어투를 들려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진수와 사카모토 류는 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애초에 화조차 낼 기운이 없었다.
작전이 실패했는데, 여기서 에너지를 쏟아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반란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세계의 주인을 모실 생각을 하지 그랬어. 이번 세계의 주인님은…… 우석 님은 나름 괜찮으신 분이거든.”
민혁의 말에 사카모토 류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렇게 말하는 너야말로 처음 이우석이라는 남자와 조우했을 때, 어쭙잖은 거짓말로 세계의 주인 자리를 연기하지 않았더냐. 이 사기꾼 녀석아.”
“이런…… 알고 있었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냐. 이래 봬도 나 또한 정보 검색 능력에 특화된 사람이다.”
“하긴, 그랬었지.”
조금만 조사하면 다 나온다.
우석에게 소속되어 있는 비서들의 이력, 과거의 행적 정도는 이미 사카모토 류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다.
하나 그것도 이제는 쓸모없는 데이터들이 되어버렸다.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시점부터 사카모토 류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물론 그건 성진수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제아무리 남서진과 비등비등한 싸움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우석에게 반기를 들은 시점에서 이미 우석한테는 성진수란 남자가 쓸모없는…… 역으로 걸림돌만 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이런 능력들을 가지고 있기에 우석의 목숨을 노리는 귀찮은 일까지 벌였다.
그런 두 남자를 우석이 과연 살려둘까?
천만에.
사카모토 류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이 목숨을 건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우석이라는 남자의 성격을 따진다면, 쓸데없는 희망은 일찌감치 버려두는 게 좋았다.
두 남자와 잠시 수다를 떨던 와중에 김민혁이 스마트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 난데. 지금 두 녀석이 막 눈을 떴거든…… 어, 알았어.”
통화를 마침과 동시에 작은 공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른쪽에 릴리아나, 왼쪽에 남서진을 대동하며 등장한 남자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성진수와 사카모토 류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군, 반항아들.”
“이우석……!”
성진수가 이를 갈기 시작했다.
현(現) 세계의 주인.
그리고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당시에는 돈의 왕이라 불리던 남자.
라울 더 그레이너, 이우석의 등장이다.
* * *
손과 발이 묶인 채 속박되어 있는 이들.
성진수가 능력을 발동시키면 이 정도는 가볍게 끊어낼 수 있었지만, 세계의 주인인 이우석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석의 결재 없이 능력을 사용하는 건 비서들에게 있어서 금기시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 금기를 이들은 수차례나 어겼다.
성진수와 사카모토 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우석이 내리는 ‘천벌’뿐이었다.
“설마 천벌이라는 것을 내리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큭……!”
“…….”
우석의 말에 성진수와 사카모토 류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지금 당장에라도 우석의 목숨을 빼앗고 싶다는 표정의 성진수.
그러나 사카모토 류는 그와 다르게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상반된 두 남자를 응시하던 우석.
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결재를 받지 않은 채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능력을 사용한다면…… 세계의 주인은 비서에게 천벌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군. 설사 그게 나와 끝을 같이 하기로 결심한 비서든, 아니든 간에 상관없이. 릴리아나. 내 말이 맞는가.”
“예, 우석 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했던 초창기 시절.
우석은 릴리아나에게 비서란 존재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들을 안내받은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천벌 시스템.
세계의 주인을 절대 갑(甲)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핵심이 바로 이 천벌 시스템이었다.
비서들이 능력을 사용하고 싶다면 우석으로부터 결재를 받으면 그만이었다.
대신, 우석의 뜻을 거스르거나 혹은 결재 받은 능력 이상의 것을 사용한다면 우석은 이들에게 천벌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성진수와 사카모토 류. 두 남자는 우석의 결재 없이 멋대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이 사실을 안 이상, 우석은 두 남자에게 천벌이라는 응징의 철퇴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천벌의 강도, 내용은 우석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원한다면 이들의 목숨까지도 가져가는 게 가능한 존재.
그게 바로 비서들에게 있어서 절대 갑이라 불리는 세계의 주인이 지닌 권한이었다.
“세계의 주인에게 반기를 든 이유가 뭐지?”
우석의 직설적인 물음에 사카모토 류가 먼저 입을 열어 대답했다.
“언제까지 을(乙)로서 지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카모토 류의 말에 릴리아나가 잔뜩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말조심해라, 사카모토 류. 세계의 주인님에게 감히 말을 놓다니. 무례한 것도 정도가…….”
“아니, 됐다.”
우석이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릴리아나의 말을 막았다.
지금 중요한 건 존댓말, 반말의 여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을에서 벗어나고 싶다? 단지 그뿐인가?”
“…….”
“실은 네가 갑이 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가.”
우석의 말을 듣는 순간, 사카모토 류의 눈썹이 한 번 크게 꿈틀거렸다.
우석은 을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도 예전에는 을이었으니까.
을인 이상, 한 번이라도 갑의 자리에 올라 그의 권력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져보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우석도 그런 생각을 해봤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석은 갑이 되었다.
하지만.
사카모토 류는 갑이 되지 못했다.
이들의 시도는 실패했다.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갑이 되고 싶어 하는 을의 기분을 나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지. 하지만 말이다…… 상대가 나빴어.”
우석이 한 말 그대로였다.
그는 확실히 과거에 이들이 섬겼던 세계의 주인보다도 영리하고 현명했다.
그리고…… 영악했다.
하지만 그런 면도 있는 반면에 챙겨줄 건 확실히 챙겨주는 남자였다.
을의 입장인 비서들에게 결코 홀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을이 자신들의 능력을 펼칠 수 있게끔 뒤에서 지켜봐 주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그리고 필요할 때, 갑인 우석이 직접 나선다.
을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도 갑이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다.
그런 신념을 지니고 있는 우석이었기 때문에 지금 그를 따르는 비서들은 하나같이 충성도가 높았다.
사카모토 류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잔말 말고 빨리 죽이기나 하시지!!”
성진수가 여전히 성질을 억누르지 못하고 날카로움을 드러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우석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이티를 비롯해서 다른 비서들에게 들어보니, 네 녀석들은 그래도 나름 쓸 만한 비서라고 하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카모토 류가 조소를 내비쳤다.
“알량한 동정심이 허울 좋은 말로 포장되어 들린 것일 수도 있을 텐데.”
사카모토 류와 성진수도 그래도 한때는 우석의 비서들과 한솥밥을 먹었던 식구였다.
비록 우석에게 반기를 든 전과가 있지만, 그래도 이들을 죽이는 건 전 직장 동료로서 꺼림칙한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카모토 류는 그들의 이러한 마음을 알량한 동정심이라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석은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이제부터 국내뿐만이 아니라 세계로 진출할 예정이라서 인력이 꽤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너희 둘을 보자마자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
“설마 우리를 네 비서로 삼을 생각인가.”
“물론.”
“그러다가 또 다시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천벌이라는 게 존재하는 거 아닌가.”
“설마……!”
사카모토 류의 표정이 굳어졌다.
천벌의 내용은 세계의 주인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 말은 곧…….
이런 천벌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내 말에 절대복종하며 살도록.”
“……!”
죽음보다도 더 심각한 천벌이 두 비서에게 떨어졌다.
* * *
“하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
성진수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쇳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우석이 천벌을 선언하는 순간, 갑자기 이들의 목에서 빛이 나더니 검은색을 지닌 쇳덩이가 목에 차여지게 되었다.
천벌의 증거였다.
“만약 우석 님의 말을 거스를 경우, 그 구속구가 머리를 절단시키겠지. 안 봐도 뻔하잖아?”
미스터 리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시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말했다.
그러자 성진수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미스터리 아저씨의 말을 들으니까 더욱 기운이 안 나네.”
“미스터 리라니까, 미스터 리!!! 화염룡 녀석도 그렇고, 네 녀석도 그렇고…… 발음 좀 똑바로 해라!”
“이름에 쓸데없이 태클 거는 건 여전하네.”
사카모토 류까지 가세를 해서 미스터 리 놀려먹기에 동참했다.
오랜만에 보는 동료들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김민혁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놈이었고, 반도체는 예나 지금이나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사는 중이었다.
남서진 역시 말수가 없는 건 똑같았다.
강제적으로 같이 일을 하게 된 사카모토 류와 성진수.
두 사람의 합류를 그래도 축하는 해주자는 의견이 나와 비서들끼리 모여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우석 오빠가 네 녀석들을 살려둘 줄이야. 의외네.”
화염룡의 말에 사카모토 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우리들이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라도 했었나.”
“반란을 일으켰으면 죽어야지. 안 그래?”
“무서운 여자로군.”
어찌 보면 남서진, 아이티, 김민혁보다도 더 무서운 비서가 화염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기왕 이렇게 합류하게 되었으니, 우석 오빠한테 잘해. 괜히 이상한 마음 품다가 죽지나 말고.”
“…….”
두 남자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도 인간이었기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무하게 죽기는 싫다.
일단은 우석의 장단에 어울려주는 쪽으로 행동을 굳힌 그들이었지만, 여전히 우석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김민혁이 말했던 그대로…… 이번 세계의 주인은 확실히 뭔가 좀 이상한 구석이 있군.’
하지만 뭐라고 할까.
이우석이라는 새로운 주인이 보여준 언행에 큰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을이 지닌 능력을 인정할 줄 아는 자.
그는 확실히 갑의 자질을 지닌 남자였다.
* * *
대표 사무실 안으로 돌아온 우석이 피곤한 모양인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릴리아나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우석 님. 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걱정됩니다.”
“사카모토 류와 성진수에게 일평생 나를 따르라는 천벌을 내린 그것 때문인가.”
“예. 그들이 자칫 우석 님의 목숨을 다시금 노리게 된다면…….”
“그건 걱정하지 마라. 절대복종이니 또 한 번 반기를 들 기미가 보이는 즉시 죽음을 맞이할 테니까. 그리고 세계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녀석들의 능력은 분명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사카모토 류의 능력만 봐도 충분히 탐이 났다.
정보의 신이라 불리는 아이티. 그는 우석의 사업체 확장에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런 능력을 지닌 인재를 한 명 더 확보할 수 있다는 건 좀처럼 오기 힘든 기회였다.
어차피 천벌이 내려진 이상, 두 남자는 우석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런 경우가 발생할 경우, 두 남자의 목에 걸린 구속구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테니까.
그리고 우석은 딱히 그들에게 악독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
한 번 잃은 신뢰는 이미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가져옴으로 인해 차차 회복될 여지를 남겨뒀다.
그리고 어차피 세계의 주인이 된 이상, 이 정도 위험부담은 충분히 감수할 각오를 한 지 오래였다.
“이 세계를 손 안에 움켜쥔 남자라면…… 내 목숨을 노렸던 적에게 은덕을 베풀 줄 아는 배포도 지니고 있어야지. 안 그런가.”
“그렇군요.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릴리아나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그녀는 우석의 비서.
절대 갑인 그의 의도에 반감을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