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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신-189화 (188/201)

갑질의 신 189화

62. 다가오는 위기(1)

우석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석에게 이 세계를 팔았던 장본인인 반투명한 존재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두 번 다시 내 앞에 안 나타날 것처럼 하더니, 그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나 보군.”

“애초에 그런 약속을 한 기억도 없는데.”

“…….”

얄미운 발언이었지만, 그의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앞으로 절대 우석의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언제든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는 조용히 있었지?”

“잊었나, 라울 더 그레이너. 이곳은 너의 세계. 애초에 난 이 세계의 주민도 아니야. 그냥 전(前) 주인에 불과하지. 게다가 나에게 이 세계의 소유권도 없어. 굳이 내 앞에 주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그럼 질문을 바꾸도록 하지.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간단명료해서 좋은 질문이구만.”

반투명한 존재가 미약한 웃음소리를 들려줬다.

외형 자체를 볼 수 없었기에 그가 정말로 웃고 있는지, 아닌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여하튼 중요한 건 반투명한 존재가 미소를 짓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다시 우석의 앞에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였다.

“이 세계를 대신 구매해 준 너에게 작은 서비스를 선사해 주고자 하려는 거지.”

“서비스?”

“그래. 왜 이런 게 있지 않나. 물건을 사면 덤으로 사은품을 준다라는 느낌?”

“…….”

세계를 대상으로 사은품을 준다니.

우석의 머릿속으로는 추론이 불가능했다.

애초에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의 범주를 넘어선 존재들의 이야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감이 안 잡혔다.

“두 가지 좋은 정보를 들려줄 테니까 잘 기억하라고, 새로운 세계의 주인 양반.”

“두 가지? 그게 무슨…….”

“우선 첫 번째.”

우석이 말을 강제로 끊은 반투명한 존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비서들은 무조건적으로 세계의 주인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다는 점. 예외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도록.”

“…….”

그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김민혁의 경우를 생각해봐도 금방 답이 나왔다.

화술의 달인이라 불리던 김민혁은 우석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신분을 세계의 주인과 동급의 위치로 올려놓기 위해 우석에게 거짓말을 했다.

물론 금방 들통날 거짓말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마치 손가락으로 브이(V)자를 그리는 듯한 형태를 취하는 반투명한 존재.

“세계의 주인에게는 결재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권한이 주어진다는 것. 그것을 상기시키면 된다.”

“……그게 뭐지?”

“이 이상 말하면 월권행위로 간주될 수 있어서 말이야. 그리고 사실 이렇게 네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원래는 허용되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무리를 하면서까지 나를 도와주려는 이유가 뭔지 꼭 들어보고 싶군.”

“아까도 말했잖아? 이 세계를 사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그리고 앞서 말했던 두 가지 조언들은 그에 대한 서비스.”

“…….”

“아무튼, 내 말 잘 기억해두도록. 언젠가 또 불시에 방문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자신이 할 말만 주구장창 늘어놓던 반투명한 존재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와 만나고, 대화를 끝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채 2분이 안 될 만큼 짧았다.

그만큼 그에게 허용된 시간이 얼마 없었다는 것을 뜻했다.

어떠한 연유에서 갑자기 전(前) 세계의 주인이 우석과 만남을 주도한 것인지, 그리고 왜 그런 말들을 했는지 지금 당장으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 뭔가 단서가 될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반투명한 존재의 말이었다.

그렇다면 뭔가 깊은 뜻이 있을 터였다.

털썩.

침대에 그대로 걸터앉은 우석이 다시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든 비서가 세계의 주인에게 우호적으로 대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세계의 주인에게 허락된 건 결재뿐만이 아니다.

“……의미를 모르겠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러본다.

반투명한 존재.

그가 우석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다시금 추론을 해본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똑.

“우석 님, 접니다.”

릴리아나의 목소리가 우석의 귀에 닿았다.

“무슨 일이지?”

“그게…… 연주 아가씨가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라도 하자고 해서…….”

연주다운 발상이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걸까.

모처럼 여행을 왔는데, 모두가 다 같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 했다.

8시에 각자 호텔방에 틀어박혀서 취침 분위기로 넘어가는 건 너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연주가 그런 생각을 품을 거라고 은연중에 예상하고 있던 우석이었기에 릴리아나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알았다. 곧 가도록 하지.”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우석의 확답을 들은 릴리아나.

그녀의 목소리에서 일말의 기대감이 묻어나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우석의 머릿속은 반투명한 존재가 했던 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그자가 어째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한동안 이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 * *

일본의 도심이 잠든 저녁 10시.

비교적 늦은 시간에 캐리어를 질질 끌며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한 젊은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일본이라…… 오랜만에 오는구만.”

처음은 아닌 모양인지 작은 소감을 표현했다.

물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간만에 일본 땅을 밟게 되었다는 기쁨을 느끼기도 전이었다.

띠리리링!!

그의 호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스마트폰이 맹렬하게 신호음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무덤덤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그대로 집어 올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도착했나?

“어. 방금.”

-잘됐군. 타깃도 때마침 근처 호텔에서 머물고 있다고 하니, 한 번 미리 돌아보는 게 어때.

“돌아보기에는 이미 시간이 많이 늦은 거 같은데.”

남자의 말 그대로였다.

주변에 보이는 거라고는 셔터가 내려간 가게뿐이었다.

24시 편의점을 제외하고는 전부 영업이 끝난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관광의 기쁨을 누리라는 말을 듣는 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럼 쉴 텐가?

“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

-거사를 앞두고 참으로 태평한 말을 하는군.

“미리 쉬어두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 괜히 절호의 순간에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하면 말짱 꽝이니까. 안 그래? 사카모토 류.”

-…….

본명으로 불린 게 기분이 나빴던 것일까.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카모토 류였다.

그러더니 이내 마음을 추스르면서 말을 이어갔다.

-인근 호텔에 예약을 잡아뒀으니 오늘은 그쪽으로 가서 쉬도록.

“배려심이 넘치는군.”

-호텔명을 포함한 정보들은 이후 문자로 보내마.

“오케이.”

짧은 통화를 마친 남자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둠에 잠긴 일본 도심.

그 한가운데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남자, 성진수가 천천히 누군가의 이름을 거론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세계의 주인…… 이우석 씨.”

* * *

타국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사실 그렇게까지 특별한 느낌을 선사해주지 않았다.

그냥 단지 잠을 자신의 집에서 잤는가, 아니면 호텔 방에서 잤는가에 대한 차이점만 줄 뿐이었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킨 우석이 스마트폰으로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새벽 6시.

비교적 이른 시간이었다.

어제 계속 아키하바라 거리를 돌아다니는 강행군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있을 때와 거의 비슷한 시간이 눈을 뜨고 말았다.

“습관이라는 게 참으로 무섭군.”

여행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상 시간은 변함이 없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우석.

그러면서 어제 일을 잠시 떠올려 봤다.

연주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결국 남서진, 반도체가 머무르고 있는 호텔 방에 모이게 된 일행들.

왜 하필 남자 두 명이 머무르는 방이 모임 장소로 지정되었느냐 하는 건 몇 가지 간단한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여자들의 방에 남자들을 들일 수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

그리고 우석의 방은 6명이 모이기엔 너무 좁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남서진과 반도체가 배정받은 방이었다.

모여서 한 건 사실 그리 거창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냥 간단한 보드게임 정도.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도 동반된 술자리였지만, 그래도 맥주 가지고 취하기에는 다들 주량이 그렇게까지 약한 편이 아니었다.

연주도 대학 생활을 통해 어느 정도 술에 단련이 된 모양인지 일본 편의점에서 산 맥주로 심하게 취하거나 하진 않았었다.

여동생이 술에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통해 우석은 이 사실을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말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잠시 해봤다.

여하튼 그렇게 불타는 여행 첫날의 저녁을 보낸 일행들.

이후 각자 방으로 돌아가 취침을 하게 되었다.

“다른 녀석들은 자고 있겠지.”

적어도 반도체와 화염룡, 그리고 연주는 잠들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세 사람 다 아침에 강한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남서진의 경우에는 예전의 버릇 때문에 그런지 잠을 자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살기라든지 이런 게 느껴지면 바로 눈을 뜨는 체질이었다.

릴리아나는 우석처럼 애초에 부지런한 성향을 지닌 여성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와 비슷한 시간대에 눈을 떴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우석의 이런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아침에 눈이 떠진 겸해서 조깅이라도 할 생각으로 호텔을 나서는 우석.

그때, 입구에서 가볍게 몸을 풀던 릴리아나가 때마침 그를 발견했다.

“우석 님. 좋은 아침입니다. 잠은 편히 주무셨나요?”

“나쁘지 않았다. 그보다 일찍 일어났군.”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나와 비슷하구나. 조깅도 할 겸 근처를 돌아다녀 볼까 하는데 너도 같이 어울리는 게 어떤가.”

“네!”

릴리아나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아키하바라에 위치한 큰 도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하천이 나온다.

그 하천을 오늘의 조깅 코스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던 우석.

“어제 하천이 하나 있길래 눈여겨보고 있었지. 조깅 코스로는 딱일 거 같아서 말이야.”

“저도 그랬습니다.”

릴리아나도 때마침 괜찮은 조깅 코스를 발견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근처를 한 번 달려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우석과 나란히 달리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물론 우석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타입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조깅까지 같이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의도치 않게 일본 여행을 와서 처음으로 단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우석과 릴리아나.

그렇게 서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천 일대를 돌고 있을 무렵.

“……?!”

우석이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이상 행동에 릴리아나가 뜀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우석 님.”

“아니…… 누군가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들더군.”

“우리를…… 말입니까?”

“그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하는 우석이었지만, 방금 그가 받았던 시선의 감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상하군.’

아침부터 기묘한 일이었다.

그 순간.

어제 반투명한 존재가 했던 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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