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85화
61. 해외 탐방(3)
일본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당일 오전.
우석의 욕심대로라면 릴리아나의 순간이동 능력을 이용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일본까지 날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이유가 있었다.
국가별로 이동을 할 때에는 엄격한 통과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권이라…… 그러고 보니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때에도 이런 비스무리한 통과증 같은 게 있었지.”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석이 잠시 옛 일을 회상했다.
바로 옆에서 커피 한 잔으로 잠을 깨우던 연주가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레디너스 대륙?”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순간 내가 말이 헛나왔나 보군.”
“난 또. 오빠도 무슨 판타지 글 쓰려고 하나 생각했네.”
“하하…….”
실제로 우석은 판타지 세계에서 건너온 존재였다.
이곳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이 알지 못하는 마법과 검술, 그리고 몬스터의 존재까지.
전부 다 직접 체험을 하고 온 우석이었기 때문에 처음 판타지 소설을 접했을 당시에는 약간의 놀라움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레디너스 대륙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많은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얼추 분위기는 비슷했다.
여하튼 판타지 설정에 관한 이야기는 두루뭉술하게 둘러댄 우석.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남은 인원들의 도착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공항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우석과 연주 남매였다.
그다음으로 도착하게 된 인물은 릴리아나.
두 번째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석보다 늦게 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연신 사과에 사과를 거듭했다.
우석은 괜찮다고 했지만, 릴리아나의 마음속으로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세계의 주인이 비서보다 먼저 도착했다니.
그건 릴리아나로서 치욕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릴리아나도 해외로 여행을 처음 가는 탓이라 여러모로 잘 감이 안 잡혔다.
그래서 이것저것 신경을 쓰고 챙기느라 본의 아니게 늦어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런 점도 있었지만, 우석과 연주가 생각보다 공항에 일찍 도착했다는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본래 우석은 이렇게까지 일찍 올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항에 비교적 이른 시간이 도착한 이유는 바로 연주 때문이었다.
해외에 나갈 기회를 포함해 애초에 비행기 자체를 타본 적도 없던 연주.
그래서 연주는 갑작스럽게 공항이라는 장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작품을 위해 취재를 하고 싶다는 말에 우석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이른 시간에 공항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여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른 공항 도착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니 릴리아나가 우석의 이른 도착을 예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른 녀석들은 언제쯤 도착하려는지 모르겠군.”
모이기로 한 때까지는 아직 10분이라는 잔여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석의 물음에 릴리아나가 의욕에 불타는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직접 가서 데려올까요?”
“아니, 됐다. 제시간 되면 알아서 오겠지.”
아직 약속 시각이 되지도 않았는데, 굳이 이들을 닦달하거나 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할 말이 없어서 언제쯤 오나 하고 물어봤을 뿐, 별다른 깊은 뜻은 없었다.
우석과 릴리아나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연주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공항 이곳저곳을 촬영하고 있었다.
“영감이 마구마구 솟는 거 같아……!”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짝이는 눈동자를 선보이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연주를 향해 우석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강도 낮은 경고를 들려줬다.
“그러다가 길 잃어버릴지도 모르니 너무 먼 곳까지는 돌아다니지 마라.”
“오빠는 무슨…… 내가 애인 줄 아나 보네.”
“애 맞잖아.”
“오빠랑 몇 살 차이 안 나거든?!”
물론 표면적으로는 연주의 말대로 크게 차이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면으로 놓고 보자면 우석의 나이는 이미 연주와 꽤나 많은 차이를 보였다.
연주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기에 우석은 그저 옅은 웃음으로 그녀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렇게 연주의 때아닌 공항 조사가 펼쳐질 무렵.
“……먼저 도착하셨군요, 우석 님. 죄송합니다.”
반도체를 끌고 오다시피 한 남서진이 먼저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우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괜찮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신경 쓰지 마라. 그보다…… 반도체의 얼굴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컨디션에 문제라도 있는가.”
“실은…….”
남서진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바로 옆에 초주검이 되어 있는 반도체를 바라봤다.
“신작 애니메이션 보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고 합니다.”
“하하하. 그렇군.”
반도체다운 모습이었다.
서브 컬쳐 마니아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과도한 열정을 보여주는 반도체.
그의 열정은 여행을 가기 전날에도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남서진과 반도체가 도착했으니, 이제 남은 멤버는 한 명뿐이었다.
“화염룡은 역시 예상대로 지각인가.”
약속 시각을 기준으로 5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화염룡.
우석의 우려에 릴리아나가 곧장 반응을 보였다.
“지금 당장 집에 가보겠습니…….”
릴리아나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익숙한 여성의 음성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안 가도 돼. 이미 여기 있으니까.”
허벅지가 여과 없이 드러나는 짧은 미니스커트.
딱 달라붙는 타이트한 흰색의 반팔 티에 선글라스까지.
여행 준비에 박차를 가한 모양인지 제대로 꾸민 티를 내며 도착한 화염룡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다가왔다.
“좋은 아침!”
“약속 시각은 가급적 지켜라, 화염룡. 네 덕분에 우석 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잖아.”
“그래 봤자 5분 정도밖에 안 늦었잖아. 그렇지? 우석 오빠.”
화염룡이 애교를 부리듯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를 선보였다.
윙크가 제대로 통한 걸까.
그녀의 모습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우석이 화염룡의 손을 들어줬다.
“그래. 평소에 비해서 오늘은 많이 선방한 편이니 너무 나무라진 말자.”
“하지만 우석 님…….”
“게다가 오늘은 처음 해외로 여행을 가는 날이니까. 괜히 시작 전부터 기분을 잡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석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결심한 릴리아나였다.
그녀가 서열 1위라고는 하나, 진정한 서열 0순위인 우석이 존재하는 한 그녀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비서에 불과했다.
* * *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통로 입구 바로 앞에 마주 서게 된 우석 일행.
그 순간, 화염룡이 뭔가 재미있는 발상이 떠오른 모양인지 연주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연주야, 연주야.”
“네?”
고개를 갸우뚱하며 화염룡을 쳐다보는 연주.
순진무구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염룡이 싹 얼굴을 바꾸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비행기, 타본 적 없다고 했지?”
“아…… 네.”
“비행기 탈 때는 신발을 벗고 타야 하는 거야. 혹시 알고 있니?”
“……정말요?!”
순간 연주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화염룡은 연주를 골려주기 위한 거짓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엄! 설마 연주, 너…… 몰랐던 거니? 대학생이나 되었는데?”
“모, 모를 리가 없잖아요! 물론 잘 알고 있죠! ……그래도…….”
허세를 부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말에 릴리아나가 순간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화염룡. 거짓말도 적당히…….”
연주를 그만 놀리라고 말을 하려고 했던 찰나였지만.
이 만류는 어느 한 인물에 의해 망쳐지고 말았다.
“화염룡이 제대로 알고 있군.”
“우, 우석 님……???”
순간 릴리아나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가 봐도 거짓말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석은 화염룡의 장난에 같이 어울려주고 있었다.
화염룡과 우석, 두 연상이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하자, 연주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랬었…… 나?”
“비행기도 실내로 취급하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건 당연하지.”
“으으…….”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사뭇 다른 지식들이 우석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석의 말이었기 때문에 좀처럼 장난으로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한편.
우석의 이런 행동에 화염룡과 릴리아나는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화염룡은 연주 몰래 엄지를 추켜올리며 ‘나이스!’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반면, 릴리아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하는 말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릴리아나도 비행기를 타본 적은 없지만, 그건 잘 알고 있었다.
연주가 너무 순수한 나머지, 그리고 사람들의 말을 너무 잘 믿는 나머지 속아 넘어가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것을 막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런 내적 갈등을 보이는 사이에, 이들의 뒤를 따르던 남서진이 반도체에게 물었다.
“오늘의 우석 님은 왠지 개방적인 거 같은데.”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여행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하니까.”
“……하긴.”
반도체와 남서진은 우석의 비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장난을 치기로 결심한 우석의 말에 어울려 주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점점 통로를 지나 드디어 스튜어디스들이 기다리고 있는 비행기 입구 쪽에 도달하게 된 일행들.
그사이, 연주가 천천히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
“저기…… 손님?”
스튜어디스들의 눈빛에 난감함이 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 손님은 왜 이러는 걸까?
그런 생각이 그녀들의 머릿속에 가득 들기 시작했다.
“네?”
“기내는 신발 신고 들어가시면 됩니다만…….”
“굳이 벗으실 필요는…….”
“……!!!”
스튜어디스의 말에 순간 얼굴이 급격하게 상기되기 시작하는 연주.
그사이, 화염룡이 뒤에서 작게 키득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어, 언니!!!”
“미안해. 사실은 거짓말이었어.”
“어린 애 아니라고 하더니, 결국 애 맞군.”
우석도 한 마디를 보탰다.
그의 말에 연주가 창피함과 분노를 동시에 터뜨렸다.
“오빠까지……!!! 둘 다 한통속이었지?!”
“하하하. 자, 뒤에 다른 손님들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일단 타자.”
창피함 덕분에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연주였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차마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 * *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게 된 우석과 릴리아나.
남은 인원들은 각각 오른쪽에, 그리고 뒤에 탑승을 하게 되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이륙 전에 스마트폰을 비롯해 전기 제품들을 잠시 꺼놓는 우석.
“…….”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릴리아나가 잠깐 말을 망설이더니, 이내 다른 일행들에겐…… 특히나 연주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를 유지하며 말을 걸어왔다.
“우석 님이 설마 연주 아가씨에게 그런 장난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뭐, 여동생 놀리는 오빠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잖나. 크게 신경은 쓰지 말도록.”
“그래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이우석이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건 릴리아나에게 있어서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얼음장과도 같았던 우석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훤히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의 우석은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뭐라고 할까. 예전의 모습이 차가운 얼음 덩어리였다면 지금은 융통성 있는 따스한 물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래도 릴리아나는 따지고 본다면 현재의 우석이 더 보기 좋았다.
왜냐하면.
웃는 횟수가 과거에 비해 지금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