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84화
61. 해외 탐방(2)
“오케이! 촬영 끝!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영화 촬영장 여기저기서 스태프를 비롯해 연기자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는 식으로 말을 건넸다.
사람들과 대충 인사를 주고받은 화염룡도 오늘 예정되어 있던 촬영이 전부 끝이 났으니,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다른 스태프들과는 다르게 따로 장비를 챙기거나 의상 같은 준비물을 가져가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비교적 빠른 퇴근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비? 일기예보에선 비 온다는 이야기가 없었는데.”
온다 하더라도 내일 오전에 내린다는 말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쏴아아 소리를 내며 매섭게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
일시적인 소나기성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중충한 하늘을 보니 지금 당장 그칠 기세로 보이진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는 수밖에.”
이럴 때 차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아니면 릴리아나처럼 순간이동 능력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문제없이 장소를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지금의 화염룡과 소봉예화가 지니고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겠지만 말이다.
매섭게 내리는 굵은 빗줄기를 보며 이런 생각을 품고 있을 무렵, 한 여성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뭐 해.”
“응? ……네가 무슨 일이야? 여기에를 다 오고.”
화염룡이 놀라움을 표현했다.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머릿속에 잠깐 등장인물로 모습을 드러냈던 여인.
금발의 미인, 릴리아나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화염룡의 물음에 대답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들렸다가 오늘 이곳에서 영화 촬영이 있다는 말이 떠올라 잠깐 오게 되었어.”
“오, 그럼 나, 데려다줄 거야?”
“상관없지만…… 약속 같은 건 따로 없나 보네.”
“응. 이대로 집에 가서 쉴 예정이거든.”
“네가 좋아하는 뒷풀이는?”
“어제도, 엊그제도 하도 달려서 오늘은 좀 쉬려고.”
“……적당히 좀 달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뒷풀이 자리를 생략하고 이른 귀가를 하나 내심 감탄했던 릴리아나였지만, 역시 화염룡은 화염룡이었다.
“집까지 데려다주면 되는 거지?”
“응.”
“근처에 인적 드문 구간 있어.”
“뭐야. 너, 설마 나 꼬시는 거야? 미안하지만 난 동성 쪽에는 취미 없다고.”
“……말장난도 적당히 쳐. 그러다가 안 데려다줄 수도 있으니까.”
“농담도 못 하겠네, 정말.”
화염룡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 보였다.
순간이동을 진행하기 위해선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괜히 순간이동 하는 모습을 들켰다가 큰 소란 거리를 제공하기라도 한다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비서들의 능력은 가급적이면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해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서의 존재라든지 세계의 주인 같은 정보 자체도 극비사항이었다.
“이쪽으로.”
화염룡의 말에 따라 천천히 장소를 이동하는 릴리아나.
외길을 지나 막다른 골목으로 도달한 뒤,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이 일대라면 몰래 염탐하는 사람도 없겠네.”
“그렇지? 좀 더 칭찬해도 된다고.”
“오늘 날씨를 예상해서 미리 우산을 가져왔더라면, 더한 칭찬을 해줬을 텐데.”
“자꾸 아픈 곳을 찌르지 말라고, 릴리아나.”
“됐어. 아무튼 손이나 잡아.”
두 미인이 나란히 손을 잡는 순간.
밝은 빛의 입자가 두 여성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윽고 크게 번쩍이더니, 어느 순간 소봉예화의 집에 도착을 했다.
“드디어 집이구나~!”
힐을 벗고 난 뒤, 거실로 입성한 화염룡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그녀와 반대로 릴리아나는 곧장 다시 순간이동 준비를 서둘렀다.
“그럼 난 바로 갈게.”
“기왕 온 김에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그래. 오늘 연주 아가씨 만나서 할 이야기도 남았고.”
“무슨 이야기? 원고에 대해서?”
“아니, 일본 여행에 관해서.”
“일본…… 여행?”
화염룡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일본 여행이라니.
“연주랑 같이 여행이라도 가기로 했어? 둘이서만?”
“…….”
잠시 입을 굳게 다문 릴리아나였다.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속으로 있는 그대로 사실을 들려주는 게 좋을까 말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본 결과.
마지못해 진실을 들려주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괜히 숨기고 있다가 후에 무슨 징징거림을 들을지 몰라서였다.
“아니, 우석 님하고…….”
“우석 오빠랑?! 설마…… 가족 여행 가는 거야?!”
“가족 여행 가는데 왜 내가 끼겠어.”
“미래의 아내잖아.”
“그…… 런 건 너무 시기상조라고.”
아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릴리아나의 심장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아직 아내라고 언급되기에는 시기가 너무 빠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우석은 아직 20대였다.
게다가 콘텐츠 사업도 이제는 해외 진출을 목전에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결혼이니 뭐니 하는 그런 걸 추진하는 건 릴리아나로서 우석에게 괜한 폐를 끼치는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언젠가는 했으면 좋겠다는 열망은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가족 여행은 아니야. 나하고 우석 님, 연주 아가씨, 그리고 반도체하고 남서진까지 갈 거니까.”
“통역사에 보디가드까지 가는구나. 좋은 파티 구성이네. 근데 목적이 뭔데? 딱 봐도 그냥 놀러 간다는 느낌은 안 오는데.”
“해외에 진출하기 전에 우석 님께서 직접 해당 시장을 눈으로 보고 체험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일본 여행을 계획하게 된 거야.”
“아하, 그렇구나.”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화염룡.
이윽고…….
릴리아나로선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제안을 꺼내왔다.
“나도 같이 가도 돼?”
“안 돼.”
“왜! 일본 문화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내가 같이 따라가 준다면, 별걱정 없잖아!”
“반도체가 있잖아.”
“그 녀석 분야는 언어만이잖아? 나는 문화를 관장하는 비서라고!”
“일본 문화는 반도체 스스로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자부를 하던데.”
“그거야 오타쿠 문화 한정이겠지.”
“…….”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다.
화염룡은 서브 컬쳐를 넘어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 자체를 폭넓게 알고 있는 비서였다.
그녀를 데리고 간다면, 한국과 다른 관습 덕분에 고생할 문제는 없을 터였다.
“하아…… 알았어. 명단에 포함시킬게.”
“얏호! 고마워, 릴리아나!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제발 그냥 잊어줘.”
화염룡의 동행으로 인해 벌써부터 여러 가지 골칫거리들이 양산되는 그런 앞날이 예상되어서일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러보는 릴리아나였다.
* * *
퇴근하자마자 캐리어 안에 다수의 짐들을 쌓아놓기 시작하는 우석.
이 세계로 건너와서 대한민국을 떠나는 건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설레임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될 이웃나라, 일본.
“일본이라…….”
가까우면서도 문화적으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정도는 이론상으로 숙지를 해놓은 우석이었지만, 그래도 직접 가서 몸으로 체험을 하며 느끼는 점은 분명 머릿속의 이미지와 많이 다를 것이다.
“이런 설레는 감정은 실로 오랜만이군.”
레디너스 대륙에서 국경과 국경을 넘나들 때도 이렇게까지 설레였던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겪는 첫 경험이라 그런 것일까.
여러모로 긴장도 되긴 했다.
그렇게 짐을 꾸리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우석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오빠, 짐 잘 챙기고 있어?”
연주의 목소리였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어주자, 곧장 방 안으로 들어온 연주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오빠가 걱정돼서 순찰 왔어.”
“네가 걱정할 단계까지는 아니야.”
“그치만 오빠, 예전부터 어디 여행가거나 할 때 항상 뭔가 하나씩은 빠뜨리고 갔었잖아. 예전에 가족 여행 갔을 때는 여분의 속옷도 깜빡했었고.”
“……그랬었나.”
물론 우석의…… 아니, 라울의 기억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이전의 우석이 어떠한 삶을 보내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와 미래가 중요했다.
그래서 우석은 과거의 잘잘못에 연연하지 않았다.
앞으로가 중요하니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하긴, 릴리아나 언니도 붙어 있으니까 문제는 없겠지.”
“넌 나보다 릴리아나를 더 높게 평가하는군.”
“당연하잖아! 릴리아나 언니만큼 멋지고 상냥한 여성이 또 어디 있다고.”
연주의 마음속에선 릴리아나라는 여성이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듯했다.
우석으로선 좋은 현상이기도 했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연주의 새언니가 될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는가.
가끔 오빠를 빼앗겼다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일부러 새언니가 될 사람에게 심술과 투정을 부리는 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나 연주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고민을 해본 적이 있는 우석이었지만, 지금의 연주를 봤을 때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연주는 상당히 착한 여동생이었다.
우석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연주라면 분명히 릴리아나와의 새로운 관계도 잘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