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82화
60. 야망을 가져라!(4)
소봉예화의 집으로 순간이동을 해온 릴리아나.
그녀의 고운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일 줄이야…….”
오늘부터 영화 촬영일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 말인즉슨.
촬영 현장에 참가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화염룡도 곧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봉예화가 살고 있는 집은 어둠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캄캄한 내부를 자랑하는 소봉예화의 자택.
전등의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자, 릴리아나의 한숨이 더욱 짙어졌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소봉예화.”
“우으응…….”
침대도 아닌 소파에서 이불을 돌돌 말은 채 단잠에 빠져 있던 소봉예화가 이상한 신음을 냈다.
근처에 놓여 있는 게임 패드와 비디오 게임 CD들.
이것들을 보자마자 릴리아나는 소봉예화가 늦잠을 자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밤새도록 게임하다가 아침에 겨우 잠든 건가.”
“……정답.”
소봉예화가 손을 뻗어 엄지를 추켜올렸다.
정확한 추측을 선보인 릴리아나를 향한 칭찬의 일부였다.
그러나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시간이 있다면 빨리 나갈 준비나 하는 게 릴리아나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늦장 부릴 시간 없어. 일어나서 준비나 해.”
“……무슨 준비?”
“촬영장 갈 준비.”
“아하…….”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소봉예화가 눈을 감았다.
이윽고 머지않아 갑자기 눈을 추켜뜬 소봉예화…… 아니, 화염룡이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본 화염룡이 할 말을 잃었다.
“소봉예화 녀석…… 또 귀찮은 일은 나한테 떠맡기고 도망치다니.”
할 말이 없었다.
외부 용무를 보는 건 화염룡의 일이라곤 하지만, 지금까지 늦잠을 잤다가 뒷일을 전부 화염룡에게 떠넘기는 건 골치 아픈 일이기도 했다.
“어휴, 정말.”
결국 견디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난 화염룡이 때마침 거실에 멀뚱히 서 있는 릴리아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어머,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너 데려다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
“촬영장?”
“그래.”
“아하…… 미안해. 최대한 빨리 준비할 테니까 잠깐 기다려줘.”
“이번에는 20분 이내로 끝내.”
“무슨 소리야! 적어도 1시간은 걸린다고!”
“뭐 하려고 시간이 그렇게까지 많이 걸리는 거야.”
“화장이 한 40분 정도 잡아먹고, 샤워도 해야 하고, 머리도 꾸며야 하고, 그리고…….”
‘차라리 소봉예화를 끌고 갈 걸 그랬나.’
소봉예화는 겉모습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다가 일어난 모습으로 촬영장에 데리고 가더라도 괜찮을 정도로 말이다.
대신 소봉예화 말고 제3자들이 신경이 쓰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릴리아나의 닦달 끝에 1시간에서 40분으로 준비 시간을 단축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얼굴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화염룡을 데리고 인천에 위치한 촬영 장소로 향하는 릴리아나와 화염룡.
순간이동을 하기 위해 화염룡의 손을 잡은 뒤,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성공적으로 순간이동을 마친 이후에 화염룡을 데리고 촬영 장소에 도착한 릴리아나가 먼저 오필두 감독을 찾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오, 작가님! 오늘은 안 늦으셨군요.”
“아하하…….”
뒤에 서 있던 화염룡이 멋쩍은 웃음을 선보였다.
소봉예화의 게으름 때문에 본의 아니게 화염룡은 촬영진들 사이에서 지각쟁이로 익히 소문이 자자했다.
그 덕분에 릴리아나만 고생하고 있었다.
그녀를 촬영 장소까지 데려오기 위해 일일이 순간이동으로 여기저기를 오며가며 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첫 촬영부터 늦으면 안 되니까요.”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작가님. 앞으로도 그 결심이 오래갔으면 좋겠습니다.”
“노력해 볼게요.”
물론 화염룡의 노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촬영 스태프들.
그 사이에서 어느 한 인물을 포착한 릴리아나가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지혜 씨.”
“어머, 릴리아나 씨!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저번에 뵈었을 땐 촬영 장소에 얼굴 잘 안 비출 거라고 말씀하신 걸 들었는데…….”
“지각쟁이 한 명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오게 되었어요.”
릴리아나가 말한 지각쟁이이란 단어가 화염룡을 가리키는 말이란 사실은 이미 지혜도 잘 알고 있었다.
“릴리아나 씨가 고생이 많네요.”
“어쩔 수 없지요. 그보다 촬영 준비는 잘 되어가나요?”
“네. 문제없어요.”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지혜.
드라마에서 같이 일했던 배우들 대다수가 영화판에서도 동일하게 캐스팅되었기 때문이 호흡을 맞추는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예상되었다.
한 번의 경험이 그녀에게 크나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셈이었다.
“다행이군요. 아, 그리고 우석 님이 지혜 씨에게 영화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 달라 말씀하셨어요.”
“우석 씨가…… 네! 열심히 할게요!”
이우석이라는 말에 잔뜩 기합을 넣어보는 지혜의 모습에 한편으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석은 현재 릴리아나와 사귀고 있는 사이였다.
그 사실을 지혜는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기에 더더욱 무서웠다.
지혜가 우석과 릴리아나,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
“촬영…… 힘내세요.”
“고마워요, 릴리아나 씨.”
지혜로부터 도망치듯 멀어지는 릴리아나.
그녀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런 상황은 이제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구나.’
* * *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친 철수가 사무실 내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충 이것으로 끝난 건가?”
“예, 그런 거 같습니다.”
철수와 함께 일하게 된 부하 직원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가 대표직에 이름을 올리게 된 회사, 리틀 데몬(Little demon).
이곳에서 철수는 우석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될 예정이었다.
반드 미디어에 비해선 제법 규모가 작은 사무실이었다.
넓은 곳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좁은 곳으로 오니 뭔가 기분이 뒤숭숭했지만, 그래도 규모가 축소된 대신에 철수의 직위에 상당히 많은 변동이 있었다.
일개 사원에서 대표까지 성장하게 된 그.
‘설마 내가 회사의 대표가 될 줄이야.’
우석과 만나고 난 이후부터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 연속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회사를 차릴 여력도, 생각도 없었던 철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한 업체의 대표가 되었다.
“세상사, 참으로 희한하단 말이야…….”
다시 한번 자신의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하는 철수.
보면 볼수록 정말 신기했다.
이곳이 자신의 회사라는 사실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
물론 자금이라든지 이런 건 우석이 다 대주고, 실질적인 운영 역시 우석이 진행할 예정이라서 바지사장이라는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철수의 역할도 중요했다.
“좋아, 열심히 해보자고!”
기합을 넣어보며 파이팅을 다지는 철수.
그때였다.
“대표님.”
짐 나르기를 마치고 난 뒤, 바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직원 중 한 명이 철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표님 찾아온 손님이 계십니다만.”
“손님?”
“네. 들여보낼까요?”
아직 정식 개업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손님이라니.
사뭇 긴장한 철수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줬다.
그러자 직원이 잠시 바깥으로 나갔다가 철수를 찾아왔다고 하는 손님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서 있었다.
“고생 많았다, 철수야.”
“오, 왔구나!”
우석의 방문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겨주는 철수였다.
뒤에는 릴리아나가 선물로 사 온 과일 바구니를 전달해 줬다.
“이거, 우석 님께서 주시는 개업 축하 선물입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릴리아나에게 선물을 건네받은 철수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동안 우석이 사무실 내부 인테리어를 살펴보며 자신의 소감을 들려줬다.
“잘 꾸몄네.”
“근무 환경도 중요하니까.”
“좋은 마인드야.”
직원들의 근무 환경이 좋아야 업무에 대한 능률도 오르는 법이었다.
괜히 철수가 우석의 곁에서 지금까지 일을 같이해 온 게 아니었다.
어깨너머로 보고 듣고 배운 게 있었기에 그 방식을 자신의 사업에도 도입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우석은 본인만의 방식으로 반드 미디어를 기하급수적으로 성장시켰으니 말이다.
철수에게 있어서 우석은 절친한 친구이자 동시에 그의 스승이기도 했다.
배울 점이 많은 친구는 언제나 좋은 본보기가 되기 마련.
우석이 딱 그러한 경우였다.
“그래. 좀 할 만하냐.”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얌마.”
“하긴, 그렇지.”
이제 막 사무실 정리를 마쳤는데,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그래도 정식으로 사업자 신고까지 했으니, 이제 정말 철수만의 회사가 생긴 셈이었다.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상담하고.”
“어차피 거리도 가까우니까 뭔가 문제 생기면 바로 찾아갈게.”
“굳이 그런 일 아니더라도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와도 돼. 어차피 사무실 사람들도 너를 다 알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자주 가야지!”
반드 미디어와 리틀 데몬의 사무실은 상당히 가까웠다.
같은 부천 지역이 위치해 있으며 도보상으로도 5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기에 철수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자리에 없으면 김민혁 실장한테 말 전해두고.”
“김민혁 실장? 민혁 씨, 결국 승진했구나. 잘됐네.”
“그동안의 공로도 컸으니까. 안 그래도 승진시켜 주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
“승진이라…….”
“생각해 보면 네가 가장 빠르게 승진했지. 한 회사의 대표가 되었으니까.”
“이 자식이…….”
우석의 농담에 철수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맞는 말이면서 동시에 뭔가 모순이 되는 듯했다.
철수는 리틀 데몬이라는 회사를 차리기 전에 먼저 반드 미디어에서 퇴사를 해야 했었다.
그러고 난 이후에 리틀 데몬을 만들게 되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승진과는 다른 의미였다.
“아무튼 나하고 김 실장이 적극적으로 도와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라.”
“오케이, 알았어.”
그 말은 이미 예전부터 쭉 들어오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철수도 안심하고 리틀 데몬의 대표 자리를 역임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만약 이들이 없으면 이런 것들은 애초에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
우석의 힘이 컸다.
“당분간 번역 일 같은 경우에는 이쪽으로 넘길 테니까, 철수 네가 잘 알아서 해줘라.”
“물론!”
본래 눈물 비 번역 작업은 반드 미디어 내부에서 반도체에게 외주를 주는 방식으로 처리를 하려 했었다.
그러나 도중에 사정이 바뀐 탓에 이곳 리틀 데몬으로 외주를 주는 형식으로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어차피 번역 전문 인력으로 써먹으려 했던 반도체는 리틀 데몬의 사원으로 소속되어 일을 할 예정이었다.
리틀 데몬이라는 사업체의 이력도 쌓을 겸해서 기존의 번역 작업 방법을 약간 수정하게 되었다.
그래도 반도체에게 일을 넘기는 건 변함이 없으니, 결과적으로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철수도 반드 미디어에서 근무하는 동안 종이책, 이북 출간 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미 습득을 해뒀기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업무를 소화할 수 있을 거라 예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