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76화
58. 오빠의 마음(4)
대표 사무실로 다시 돌아오게 된 릴리아나가 연주의 속마음이 어떤지에 대한 보고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직 아가씨도 본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잘 모르시는 거 같습니다.”
“모른다?”
“네.”
우석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릴리아나의 보고가 마음에 안 들어서였다.
“옳으면 옳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모른다는 건 무슨 뜻이지?”
“아직 아가씨께서는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신 적이 없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애초에 사랑이란 감정 자체도 느껴본 경험이 없는 탓에 본인의 감정이 애정인지, 아니면 단순히 남자에 대한 호기심인지 제대로 구분을 못 하시는 거 같습니다.”
“……그렇군.”
물론 우석으로선 연주의 그런 마음에 도통 공감할 수 없었다.
하기야,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몰랐다.
우석이 비록 여러 분야에서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막 성인이 된 꽃다운 처녀의 마음까지 이해한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생물학적으로도 판이하게 다른데, 어찌 공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하긴, 연주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빠인 우석이 더더욱 연주를 지켜주고 싶었다.
듣도 보도 못한 늑대 한 마리가 연주의 주변에 어슬렁거린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진심으로 남서진에게 사주를 넣어 뒷산에 묻어버리고 오라고 명령을 내릴까 생각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때는 목숨을 위협받는 일도, 그리고 목숨을 앗아가는 일도 너무나 당연시하게 여겨졌다.
이상철이라는 남자 한 명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도 있었던 우석이었지만, 그렇게 될 경우 자칫 잘못하다가 연주에게 안 좋은 기억을 남기게 될 수도 있었다.
여자의 마음은 보다 세심하니 말이다.
“어렵군…….”
여태까지 회사를 운영하면서 이렇게나 고민에 휩싸인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던 우석이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대표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우석 오빠! 잘 지냈어?”
갑작스러운 화염룡의 등장에 릴리아나가 눈을 흘기며 충고했다.
“적어도 노크라는 걸 해줬으면 하는데.”
“뭐야. 나 없는 사이에 둘이서 뭔가 야한 짓이라도 했어?”
“이, 이상한 말 하지 말고!”
릴리아나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보다 우석 오빠.”
“무슨 일이지? 난 지금 바쁜데.”
말만 그렇지, 사실은 그렇게까지 바빠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연주 생각 때문에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건 화염룡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가 이곳까지 방문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한번 들어볼래?”
“정보?”
“응. 아이티가 나보고 우석 오빠에게 전해달라고 했어.”
“왜 나한테 직접 연락하지 않고 너한테 우회해서 정보를 전해달라고 한 거지?”
“글쎄, 연주 때문에 감정적으로 변하는 우석 오빠와 그다지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런 거 같은데.”
“……하긴. 아이티한테 몹쓸 짓을 하긴 했지.”
아이티 기준으로 한창 자고 있을 이른 오전 시간에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리면서 깨운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거 봐.”
손가방 안에서 다수의 종이들을 꺼내는 화염룡.
한 장 한 장씩 천천히 내용물을 읽어가던 우석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건…….”
“우석 오빠의 고민을 말끔하게 해결해 줄 정보지. 어때?”
“…….”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우석.
이윽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릴리아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남서진을 데려오도록. 지금 당장.”
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낮고, 섬뜩했다.
* * *
강남역 인근에 위치한 어느 클럽.
화려하게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 밑에 한창 낯선 여성들과 춤을 추던 한 남자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이티가 신상명세를 공개했던 남자, 이상철.
그가 얼굴에 탐욕이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가 상철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전화번호 땄냐?”
“물론이지. 내가 누구냐? 이 정도야 껌 아니겠어?”
“역시 이상철! 꽃제비답다.”
“얌마, 꽃제비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왜. 요즘 썸 타는 그 연주인가 하는 계집한테 들킬까 봐?”
연주의 이름이 나오자 이상철이 피식 웃음을 토해냈다.
“얌마. 걔는 그냥 호구야, 호구. 그냥 오빠가 사업으로 잘나간다고 들어서 꼬셔본 거지, 내 타입은 아니다.”
“걔네 오빠 사업이랑 그 여자랑 무슨 상관인데?”
“혹시 또 모르잖냐. 잘되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하하하! 이 새끼, 순 양아치네!”
이상철의 본성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호쾌하게 웃는 그의 친구.
이상철. 그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여기저기서 여자를 꼬시고 다녔다.
주 타깃은 돈이 많아 보일 거 같은 여자.
그 때문에 연상이 주로 많았지만, 연주의 경우에는 좀 예외적이었다.
“로맨스 작가라고 하더라. 순진한 면이 얼마나 많던지…… 아무튼 가지고 노는 맛이 있어.”
지금까지 연상의 여인들에게서 맛보지 못했던 순수함이 마음에 들었다.
금전적인 이유도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꾸준히 로맨스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었기에 또래들보다도 주머니 사정이 어느 정도 나은 편이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사업으로 대박을 터뜨린 우석이 그녀에게 꾸준히 용돈도 주고 있으니, 학과 내에서 그녀의 소문은 무성하게 나 있었다.
그 소문을 접하고 곧장 연주에게 작업을 개시한 이상철.
아무것도 모르던 연주는 이상철의 거짓 배려에 호감을 느끼고 말았다.
“조금만 더 꼬시면 완전히 내 여자로 데려올 수 있을 거 같다.”
“그렇게 되면 클럽 생활도 끝이냐?”
“무슨 개소리야! 내가 어디 한 여자로 만족하는 거 봤냐?”
술잔을 그대로 원샷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이상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양다리는 기본이었기 때문에 연주 말고 다른 여자와 만남을 가진다 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저기 저 여자 있잖아.”
손으로 어느 한 여성을 가리키는 이상철.
그의 손을 따라 이동한 곳에는…….
“우와…….”
탄식이 절로 나올 법한 미인이 혼자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딱 달라붙는 붉은색의 초미니 원피스.
육감적인 허벅지가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나 남심을 유혹하는 듯했다.
몸매 역시 모델급이었다.
“오늘 클럽 물이 상당히 좋은데?”
“그러게 말이야.”
“어때. 도전해 볼까?”
“너라면 훅하고 넘어오지 않을까? 연상 킬러니까.”
“크큭, 그렇지.”
이상철이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표는 붉은 원피스의 여성.
수많은 인파들을 재치고 여성을 향해 걸어간 이상철이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차지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혼자 오셨어요?”
“……?”
양주 한 잔을 기울이던 여성이 슬쩍 고개를 돌려 이상철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별거 아닌 듯 사소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꿀꺽!
이상철이 자신도 모르게 절로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많은 여자를 만나왔지만, 이처럼 신비한 느낌을 주는 여성은 처음이었다.
“혼자 왔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여성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도발적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상철은 이런 느낌을 싫어하지 않았다.
딱 그가 원하는 타입이었다.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거든요. 오늘 밤, 둘이서 좋은 시간 보냈으면 하는데 어떠십니까?”
“어머, 직설적이네요.”
여성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은 웃음소리를 들려줬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숨김없이 바로바로 말하는 남자……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하죠.”
“취향에 맞다니 다행이군요.”
은근슬쩍 손을 뻗어 여성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여성이 예상치 못한 발언을 들려줬다.
“근데 미안해서 어쩌죠? 저는 처음 만나는데 대뜸 제 몸부터 손을 대는 남자를 상당히 싫어하거든요.”
“……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그의 몸이 붕 뜨기 시작했다.
“어어어……?!”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제대로 된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이윽고…….
쿠웅!!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상철이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냈다.
“컥……!”
갑작스럽게 발생한 소란 덕분에 장내의 시선이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겨우 추스르고서 겨우 일어선 상철이 자신을 집어던진 남자를 바라봤다.
“너, 넌 뭐야!”
“……나?”
상철을 들어 올린 뒤 냅다 집어던진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저 여자의 남자친구.”
“나, 남자친구?!”
“……일단은.”
남자친구면 남자친구지, ‘일단은’이라는 말을 붙이는 희한한 남자.
그러는 사이에 붉은 원피스의 여성이 남자에게 자연스럽게 팔짱을 걸고서 말했다.
“어머, 자기야~ 왜 이제 왔어?”
“……아니, 네가 신호 줄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
남자가 말을 하던 도중, 오른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린 붉은 원피스의 여성.
“자기야. 입이 너무 싸네. 그냥 조용히 있지그래?”
“…….”
“그보다 나, 저 불한당한테 성추행당한 거 같아. 보복해 줄래?”
“……알았어.”
마치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어색한 말투를 뽐내던 남자가 대뜸 이상철의 뒷덜미를 잡고서 그를 질질 끌고 클럽 바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놔! 놓으라고!!”
이상철이 거칠게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클럽 근처에서 대기 중인 직원들에게 외쳤다.
“이보세요!! 이 새끼가 사람 친다구요!! 가만히 보고 있을 거예요?!”
“…….”
“…….”
이상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반응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이상철.
그때, 상철과 같이 온 무리들이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이, 형씨. 내 친구 데리고 어디 가려고 그러는 거야?”
“말로 하자고, 말로. 그리고 저런 여자 친구를 함부로 클럽에 데리고 온 쪽이 더 잘못한 거 아니야?”
“맞아, 맞아.”
3명의 남자들이 상철을 질질 끌고 가던 남자를 도리어 매도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상철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은 뒤에 몸을 풀었다.
“……싸울 거라면 빨리 덤벼라. 시간 아까우니까.”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남자.
그때,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선 이상철이 그의 친구들 무리에 합류했다.
3대 1에서 졸지에 4대 1이 된 상황.
“이 새끼…… 아까 잘도 그랬겠다?! 제대로 한 판 떠주마!!”
소란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직원들은 아직까지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이 녀석을 다굴 쳐도 상관없다 그 뜻이겠지!’
상철의 입가에 이죽거림이 새겨졌다.
숫자는 4 대 1.
이들이 훨씬 유리한 대치였다.
그러는 와중에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성, 화염룡이 남자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후딱 처리해, 우석 오빠가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으니까.”
“……알았어.”
이상철을 벌하기 위해 클럽까지 오게 된 화염룡의 동행자.
그녀의 가짜 남자친구 대역을 맡았던 남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