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73화
58. 오빠의 마음(1)
철수에게 별도로 새로운 회사를 차리라는 말을 전해놓은 뒤.
그를 보필해야 할 인재가 필요함을 깨달은 우석은 자신의 사무실로 민혁을 초대하게 되었다.
“무슨 일로 또 저를 부르셨는지…….”
요즘 들어 우석과 대화할 일이 부쩍 많아진 민혁이었다.
그러나 민혁은 이런 현상에 대해 귀찮다든지 혹은 번거롭다든지 하는 그런 생각은 품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우석과 얼굴을 자주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우석이 자신을 많이 의존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다름이 아니고, 물어볼 게 있어서 그렇다.”
“어떤 것인지요.”
“철수가 사업을 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되어줄 사람을 찾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너 같은 녀석 한두 명 정도가 붙어 있다면 철수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아는 사람이 없나 싶어서 말이다.”
“그 말씀은…… 저와 비슷한 부류로 새로운 비서를 찾고 싶다는 뜻입니까?”
“아니, 굳이 비서가 아니어도 된다. 그냥 너처럼 말 잘하고 수완 좋은 놈들이면 돼.”
“그렇다면야……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들이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자신의 인맥을 소개했다.
그의 발언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우석이 추가적인 질문을 던졌다.
“믿을 만한 사람들인가?”
“그 점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전에 저와 같이 이름 좀 날리던 사기꾼들이거든요.”
“사기꾼들이라고 하니 오히려 역으로 믿음이 뚝뚝 떨어지는데.”
“하하하! 지금은 깔끔하게 손 털었습니다. 설사 녀석들이 사기를 칠 낌새가 보인다면……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민혁의 표정이 순간 차가워졌다.
사기꾼을 처단하려면 상대 역시 같은 사기꾼이어야 적합했다.
민혁은 화술의 달인임과 동시에 세계 최고의 사기꾼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뒤처리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설사 트러블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우석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러한 과정 자체가 번거롭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충성도가 높은 인재들로 뽑고 싶었다.
“나중에 두세 명 정도 추슬러서 나한테 데리고 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우석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릴리아나에게도 말해뒀지만, 내일 모래. 비서들의 서열을 재정비할까 한다.”
“서열 정비……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그 시기다.”
“제가 어찌…… 하하하…….”
옅은 웃음을 흘리는 민혁이었지만, 그는 내심 비서 서열 재정리 일자를 고대하고 있었다.
서열 최하위에 머물고 있는 그.
하나 이번에는 제법 기대할 만도 했다.
나름 성과를 많이 보인 데다가 새로 들어온 신입만 3명이나 있지 않은가.
‘몇 위나 오를지 모르겠구만.’
민혁이 바라는 이번 순위 목표는 최소 탑3 안이었다.
우석의 연인이자 최측근인 릴리아나를 서열로 누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민혁도 하지 않았다.
또한 마찬가지로 정보의 신이라 불리는 아이티의 중요도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 두 명을 제외한다면 지금 단계에서 민혁이 넘볼 수 있는 순위는 3번째 정도가 될 터였다.
물론 나중에 가선 더더욱 순위를 높일 수도 있을지 몰랐다.
3위를 차지하게 된다면, 다음 목표는 아이티였다.
릴리아나의 순위를 노리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궁극적인 목적은 서열 2위!
‘그 정도만 되더라도 대만족이지. 후후후.’
속으로 자화자찬의 웃음을 흘리는 민혁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서열 재배치에 큰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표정 관리를 유지했다.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그래. 들어가 보도록.”
“예.”
우석이 과연 그에게 얼마만큼의 순위를 부여할지.
벌써부터 기대감이 상승하는 민혁이었다.
* * *
퇴근 이후.
집으로 돌아온 우석은 오랜만에 그의 여동생인 연주와 함께 TV 앞에 마주 앉게 되었다.
시청하고 있는 건 드라마 ‘눈물 비’.
“이거, 내일이 마지막 화라고 하던데. 진짜야?”
연주가 궁금증을 담아 물어왔다.
그녀의 질문에 우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게 되었다.”
“우으…… 조금만 더 길게 해주지…….”
“이 정도면 충분히 오래 했잖아.”
“그래도 시청자들은 더 방영해 주기를 원하고 있던걸? 아니면 시즌제로 나눠서 2기라든지 후속작 형태로라도 내줬으면 하던데.”
“그건 아직 이야기된 게 없으니까.”
눈물 비 드라마의 성적은 마지막 화를 앞둔 전편까지도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다.
연주의 말대로 반응 역시 폭발적이었다.
물론 방송과 이야기를 한다면 좀 더 연장해서 방송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제작진 측에서도 연장 방송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해왔으니까.
그러나 드라마는 여기까지였다.
왜냐하면 그 이후, 영화화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영화화를 통해 반드 미디어는 세계로 도약할 초석을 마련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떠한 프로젝트보다도 더더욱 신중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요즘은 어때. 글 잘 써지나.”
“응? 나?”
연주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래 봬도 그녀 역시 프로 작가였다.
우석의 사적인 힘이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반응을 얻으며 꾸준히 작가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또다시 슬럼프인 모양인지 글의 진도가 잘 안 나가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바가 있었다.
“릴리아나한테서 들었다. 요즘 휴재하고 있다며.”
“그, 그건…….”
순간 말문이 막힌 연주가 머쓱한 듯 자신의 긴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소봉예화한테 다시 한번 말해볼까.”
우석이 넌지시 문하생 건을 제안했다.
저번에 연주가 이런 식으로 슬럼프에 빠졌을 당시, 그녀는 소봉예화의 도움으로 한 번 위기를 극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 제안을 해본 우석이었지만.
연주가 먼저 거절의 의사를 표현해 왔다.
“아니, 괜찮아. 두 번이나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저번에 소봉예화 언니도 슬럼프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다고 들었어. 이제 겨우 다시 펜을 잡기 시작했는데, 내가 괜히 끼면 또 무슨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니까.”
“하긴…….”
이제 막 슬럼프를 극복한 소봉예화였기에 연주를 맡기거나 하는 그런 중책을 떠넘기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연주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가족에 대해 특히나 애착이 많은 우석이었기에 마치 연주의 일이 본인의 일인 것처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그때, 연주가 의외의 발언을 꺼냈다.
“나, 연애를 해볼까 하는데…….”
“……?!?!?!”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우석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 세계로 건너와서 이우석이라는 남자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던 라울이었지만, 지금까지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소중한 여동생이 연애를 해보고 싶다니.
우석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연애는 절대로 안 된다, 절대로!!”
“왜. 나도 연애할 수 있잖아. 그리고 로맨스 작가로서 연애 한 번 정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고.”
“그건 그렇지만…….”
우석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하기야. 연주의 말이 부당한 건 아니었다.
그녀도 한창 꽃다운 나이라 할 수 있는 20대 초반의 여성 아니겠는가.
아름다움이 절정을 찍는 나이에 연애 정도는 충분히 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오빠가 이우석…… 아니, 라울이라는 점이었다.
“너, 설마 사귀는 남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나, 남자라니. 아직 그런 건…….”
우석의 말을 부정하는 연주였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자마자 우석은 속으로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짐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간 수많은 부류의 사람을 접해왔던 이우석.
그런 그의 눈썰미를 피할 순 없었다.
우석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행동이라든지 상기된 얼굴, 그리고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까지.
우석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속속들이 나오는 중이었다.
“아, 아무튼 남자친구 같은 건 아직 없으니까 억측하지 마. 알았어?!”
그렇게 말하고서 자신의 방으로 후다닥 들어가 버리는 연주였다.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우석.
이윽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더니 어디론가 급하게 연락을 취했다.
“……나다. 지금 당장 의뢰하고 싶은 건수가 있다만.”
* * *
이른 아침.
출근을 마치자마자 릴리아나는 우석으로부터 호출 메시지를 듣게 되었다.
“잠깐 와보도록.”
“……?”
대표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와 보라는 우석의 말에 사뭇 궁금증이 든 릴리아나였다.
아침부터 무슨 볼일일까.
급한 용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곧장 우석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우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딸칵!
“우, 우석 님?! 갑자기 왜…….”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순간, 릴리아나의 머릿속에 이상한 상상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예전과 다른 관계가 되었다.
서로를 사랑하는 애인 사이.
그런 상황에서 일부러 그녀를 부르고 동시에 사무실을 밀폐된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은…….
‘우석 님이 설마……?!’
릴리아나도 모르게 절로 야한 상황이 떠올랐다.
혹시 우석은 이런 플레이를 좋아하는 성향의 남자였던 걸까.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릴리아나는 언제든지 오케이였다.
이미 우석에게 푹 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남들에게 언제 들킬지 모르는 부끄러움을 감내해야 한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속으로 우석에게 어떠한 짓을 당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는 결심을 굳히는 릴리아나.
그러는 사이에 우석이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릴리아나에게 다가갔다.
뚜벅, 뚜벅.
구두 소리가 날 때마다 릴리아나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점점 그녀를 몰아붙이던 우석이 대뜸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 우석 님…… 다, 다른 사람들이 볼지도…….”
“아니, 여기라면 괜찮다. 대표 사무실은 안쪽이 바깥으로 보이지 않게끔 되어 있으니까.”
“그, 그건 저도 잘 알지만…….”
“괜찮다. 별거 아니니까.”
“……우석 님…….”
그의 목소리가 이토록 달콤하게 들렸던 적이 있을까.
여러모로 위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릴리아나가 살짝 눈을 감았다.
우석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셈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런 말이 들려왔다.
“순간이동 좀 부탁하지.”
“……네?”
“못 들었나? 아이티가 있는 쪽으로 이동하자고 했다만.”
“…….”
그 말과 동시에 릴리아나는 자신의 다리에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는 다른 의미로 불타오르는 상상을 했던 릴리아나였지만, 우석이 요구하는 건 순간이동뿐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우석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왜 그러지? 얼굴이 빨간데. 감기라도 걸렸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보다…… 아이티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죠?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우석의 말을 최대한 얼버무린 릴리아나.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우석의 손을 잡고 빠르게 순간이동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