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질의 신-172화 (172/201)

갑질의 신 172화

57. 뜻하지 않은 기회(3)

두터운 종이들을 챙겨 들기 시작하는 민혁.

때마침 그의 자리를 지나가던 이임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냐? 그건.”

“아, 이거 말입니까?”

민혁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그냥 잠깐 개인적으로 조사할 게 있어서 모아본 자료들입니다.”

“자료들? 뭐길래 그런데.”

“그런 게 있습니다.”

“……?”

아무래도 이임전에게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임전도 눈치가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구태여 말해주기 싫은 걸 억지로 캐묻는 성향을 지닌 사람도 아니었기에 모르쇠로 임하기로 했다.

“뭐…… 알았다. 아, 그리고 조금 있다가 나랑 같이 외근 나가는 거, 잊지 않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차는 어떻게 할까. 내 차로? 아니면 네 차로?”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제 차로 안전하게 모셔다드려야지요.”

“하하. 그 말, 대표님 앞에서는 하지 마라. 괜히 대표님 놔두고 사원에게 갑질하는 사장이 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니까.”

“물론이지요.”

반쯤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

이윽고 다수의 종이들을 챙긴 뒤에 그대로 두 손을 이용해 들어 올린 민혁이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할 장소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반드 미디어 대표 사무실.

문 앞에 마주 선 민혁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표님, 김민혁입니다.”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우석이 곧장 출입을 허락했다.

“들어오도록.”

“……죄송합니다만 제가 문을 열 수 없는 상황이라서요.”

“…….”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이내 사무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을 열고 등장한 인물은 우석이 아닌 릴리아나였다.

아무래도 사무실 안에서 우석과 함께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도중이었던 듯했다.

“고마워.”

“……천만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기에 릴리아나가 쿨하게 그의 감사 인사를 받아넘겼다.

쿠웅!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다수의 종이 다발을 올려놓는 민혁.

그의 모습에 우석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건…… 어제 말했던 그거인가?”

“예, 그렇습니다.”

“양이 상당히 많군.”

“저도 이렇게까지 많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티에게 부탁했던 자료들을 하나하나 출력하다 보니 이렇게까지 많이 쌓이게 되었다.

자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 우석도 알고 있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난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서 말이야. 굳이 이 자료들을 보지 않아도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게끔 요약해서 말해주지 않겠나.”

“예, 알겠습니다.”

우석이 이런 말을 꺼낼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아주 직설적인 발언을 들려줬다.

“조만간 문태현 대표가 K 로지의 지분을 팔 거 같습니다.”

* * *

K 로지는 M 컬쳐와 함께 웹소설 플랫폼 양대산맥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업체였다.

그러나 최근, M 컬쳐와의 소송 분쟁에서 패배해 다수의 업체들이 K 로지에게 등을 돌리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심지어 K 로지를 믿고 따르기로 했던 업체들 역시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소송 분쟁에 패해 M 컬쳐에게 우위를 빼앗기게 된 K 로지.

그 여파는 콘텐츠 공급에도 차질을 발생시켰다.

“듣자 하니 K 로지에서 매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도 하나둘씩 눈치를 보고 빠지는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그런가.”

“예.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콘텐츠 공급에도 꽤나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래와 고래가 정면으로 맞붙었지만, 패배한 쪽은 K 로지였다.

그리고 그 반작용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아직까지는 겉으로 그렇게 많은 티가 나진 않고 있지만, 최소 3개월 뒤에는 법적 분쟁에서 패배한 반작용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올라올 거라 예상됩니다.”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지분을 팔아치우겠다…… 이런 생각인가.”

“아무래도 그렇게 예상됩니다.”

예상된 결과였다.

그러나 설마 이렇게까지 빠른 시기에 지분을 팔아넘길 생각을 할 거라는 사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태현, 그 남자도 상당히 포기가 빠르군.”

“될 거 같으면 계속하고, 안 될 거 같으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그게 문태현이라는 남자의 성향으로 보입니다.”

“하긴, 그랬었지.”

우석도 민혁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몇 번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척하면 척이었다.

게다가 우석은 레디너스 시절 때부터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겪어왔다.

이제는 낯선 사람을 봐도 그 사람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타입을 선호하는지 이미 다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의 눈썰미를 지니게 되었다.

문태현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지분을 넘기기로 한 상대 업체가 어디인지 알고 있나?”

“아직까지 딱히 팔기로 확정된 곳은 없는 듯합니다.”

“접선을 펼치고 있는 곳은?”

“총 3군데입니다.”

“나쁘지 않군.”

우석이 방금 꺼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민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참가하시겠습니까?”

민혁이 슬쩍 우석에게 제안을 해봤다.

경쟁업체 3군데에 반드 미디어도 참가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라이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우석은 민혁의 말을 듣고 나서 ‘나쁘지 않다’라고 말을 했던 것이었다.

K 로지의 지분을 하나둘씩 인수한다.

최종 목표는 K 로지와의 합병.

회사를 키워갈 수 있는 방법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자체적으로 능력껏 성장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다른 기업을 하나둘씩 흡수해 성장하는 게 있었다.

과거 민아 출판사와 합병을 한 번 진행했던 반드 미디어.

그 일을 기점으로 회사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K 로지를 인수하게 된다면, 반드 미디어가 얻는 장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요하네의 경쟁 상대가 없어진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K 로지를 요하네로 흡수시켜 플랫폼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강한 적 하나를 쓰러뜨림과 동시에 그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 아니겠는가.

게다가 반드 미디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웬만큼 수익을 내고 있는 회사이기 때문에 충분히 K 로지의 지분을 노릴 수도 있었다.

“그러는 게 좋겠지.”

“그럼 바로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대신, 반드 미디어라는 상호명 말고 다른 회사명으로 입찰하도록.”

“……혹시 회사를 하나 더 세우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석이 긍정의 의사를 드러내며 말을 이어갔다.

“반드 미디어가 K 로지의 지분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사방으로 견제를 받을 거다. 지금까지 동료였던 M 컬쳐조차도 우리를 견제하려고 들겠지. 요하네가 여태 무사히 성장세를 거듭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외부 세력에게 집중적으로 견제를 받지 않아서였어. 그런데 이제 와서 적을 늘린다는 건, 우리 손으로 무덤을 파는 격이겠지.”

“과연……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비서들을 데리고 회사를 하나 차려둬라. 최대한 반드 미디어와 연관성이 없게끔 주의하면서 말이야.”

“그렇다면…… 대표자 명은 누구로 하시겠습니까?”

“…….”

잠시 고민하던 우석이 민혁과 릴리아나를 훑어봤다.

두 사람 다 충성스러운 비서들이었다.

애초에 비서들은 우석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도문석과 같은 특이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웬만해선 우석을 따르는 이들만이 그의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비서의 이름을 새로 설립할 회사의 대표자로 추켜세워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우석은 약간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철수로 하자.”

“철수라면…… 우석 님의 친구분 말씀이십니까?”

민혁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우석이라면 분명 비서 중 한 명을 새로운 대표자로 내정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비서가 아닌 김철수의 이름이 거론될 줄은 민혁도 예상하지 못했다.

“실례지만…… 철수 씨를 고른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 봐도 됩니까?”

친인척이나 혹은 우석을 따르는 비서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회사 하나를 통째로 주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어쩌면 권력과 돈의 맛에 취해 우석을 배신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돈의 왕이라 불렸던 우석은 그러한 사례를 통해 수많은 배신을 맛봤었다.

그런 그가 철수의 이름을 올리다니.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는 민혁에게 우석이 그 이유를 들려줬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졌으니까.”

“…….”

“단지 그뿐이다.”

믿음과 신뢰.

상당히 좋은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는 악하기 마련.

제아무리 믿음과 신뢰를 보내준다 하더라도 그릇된 마음을 먹고 배신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 누구보다도 우석이 더 잘 알 터.

그러나 그는 사람을 믿기로 했다.

자신을 따라 성공이 보장된 길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와준 친구, 김철수에게 믿음을 주기로 결심했다.

그 결정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우석은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 *

“나보고…… 회사를 차리라고?”

“그래.”

간단명료하게 철수를 부른 이유에 대해 설명해 준 우석.

갑자기 사무실로 와보라고 하고선 이제 와서 회사를 차리라는 말을 하니 듣는 입장에선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거…… 몰래카메라 같은 거 아니냐? 그런 게 아니라면 깜짝 이벤트?”

“난 그런 부류의 행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너도 잘 알 텐데.”

“하긴…… 뭐…….”

성인이 된 우석……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울의 영혼이 우석의 육체에 씌워진 이후부터 그는 왠지 모르게 평소에도 진지하고 신중한 성격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철수와 알고 지냈던 고등학생 때부터 우석은 뭔가 생기발랄하거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을 감안한 결과, 네가 가장 적합한 인물로 결정됐다.”

“도대체 뭘 고려했길래…….”

“믿을 만한 사람.”

“……하하하…….”

철수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우정, 의리라는 분야에선 철수만 한 사람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부터도 그래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우석이 여러모로 힘들 때도 철수는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그를 도와줬다.

김철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석의 평생 친구가 될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도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

“이임전 부장님이라든지…….”

“플랫폼에다가 웹툰, 웹소설까지 실무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해.”

“아니면…… 민혁 씨? 사교성도 좋고 말도 잘하잖아.”

“그 녀석은 뭔가 뺀질이 성향이 보여서 제외했다.”

“그럼…… 릴리아나 씨?”

“릴리아나가 대표에 어울릴 거 같은가?”

“……아니.”

철수가 본인이 말을 해놓고도 마지막 세 번째 추천 인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대답을 들려줬다.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넌 나와 함께 이런 일, 저런 일 다반사를 겪으면서 경험이라는 걸 쌓아왔어. 이제는 그 경험을 활용할 때가 온 거지.”

“그래도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걱정하지 마라. 너 혼자 회사를 책임지라는 말은 아니니까. 내 쪽에서도 지원군을 많이 보내줄 거다. 그러니까 안심해.”

“…….”

우석이 보내주는 무한한 신뢰.

기대에 보답하는 것 또한 친구가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좋아, 까짓것 해보마!”

강한 자신감을 표명하는 철수의 모습에 우석이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