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70화
57. 뜻하지 않은 기회(1)
대표 사무실에서 나온 우석이 바로 근처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철수를 향했다.
“일은 잘되어 가냐.”
“……그냥 그럭저럭…… 근데 너, 어디 가려고?”
철수의 시선이 퇴근 복장을 갖춘 우석의 전신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걸쳐 입은 겉옷과 서류 가방이 딱 봐도 퇴근길에 오르는 샐러리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잠깐 외근 좀 가려고.”
“외근?”
“그런 게 있다. 돌아올 시간도 애매하고 해서 그냥 그 길로 퇴근하려고 일부러 나갈 준비를 서두른 거야.”
“그런 거라면야 딱히 크게 상관은 없는데…… 너 혼자 가는 거냐?”
“아니, 릴리아나도 대동하려고.”
“그럴 줄 알았어.”
우석이 가는 곳에는 웬만하면 릴리아나도 동행하곤 했다.
이미 우석의 전속 비서라는 직책을 차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 알았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고.”
“그래. 수고해라.”
철수에게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건네준 뒤 먼저 회사 바깥으로 나오는 우석.
뒤이어 릴리아나 역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번져가고 있었다.
“정말…… 거짓말하고 저희만 이렇게 따로 몰래 나와도 될까요?”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내 회사인데 뭘. 대표에게 감히 누가 ‘일 좀 하시죠?’라고 협박하겠나.”
“그것도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자, 그 일은 이제 끝났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도록.”
“……예.”
이것도 우석의 뜻 아니겠는가.
세계의 주인을 모시는 비서로서 그의 뜻을 거역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우석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릴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차에 몸을 실었다.
* * *
몇 시간 전.
MNN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와 웹툰, 웹소설 영업부 실장을 담당하고 있는 김명백과 이야기를 나누던 민혁은 한 가지 정보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소송에서 이겼습니다.”
“소송이라 함은…… K 로지와의 콘텐츠 연재 권한 분쟁 말씀이십니까.”
“예. 증거도 충분했고, 저희가 질 이유가 없긴 했었지요. 하하하!”
소송에서 이긴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김명백 팀장의 입에는 미팅하는 내내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소송에 대한 결과를 마치 처음 들었다는 듯이 리액션을 펼치는 김민혁.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무튼 이걸로 한시름 덜어놓은 기분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K 로지와 M 컬쳐.
두 플랫폼의 공방은 장르문학 업계에서 꽤나 많은 화두를 낳았다.
미팅을 가지는 상대방마다 죄다 두 플랫폼의 소송 사건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할 정도였으니…… K 로지와 M 컬쳐가 장르소설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쉽사리 알 수 있는 대목이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법적 분쟁의 결과는 아이티에게 전해 들은 바대로 M 컬쳐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그 소식만으로도 이 시장에 커다란 지각변동이 올 거란 사실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K 로지는 당분간 좀 힘든 길을 걷게 될 겁니다.”
김명백의 말에 민혁이 분위기의 흐름을 타 슬쩍 말을 이었다.
“고소 비용이라든지 그런 거 말입니까?”
“뒷감당도 그렇긴 하지만, 지금까지 K 로지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했던 업체들이 하나둘씩 그곳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려와서요.”
“……그렇군요.”
그럴 만도 했다.
M 컬쳐에게 대패(大敗)를 당하게 되었으니, K 로지에 대한 신뢰도는 한없이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이번 승소를 통해 M 컬쳐는 장르문학 업계 내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질 수 있게 되었다.
‘당분간은 M 컬쳐의 독점 체재가 되겠군.’
요하네가 K 로지를 대신해 M 컬쳐의 견제 대상이 되기에는 아직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K 로지조차 넘어설 수 없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요하네 역시 덩치를 부풀려갈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성장에 필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좀 더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민혁.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오늘 미팅은 그럼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벌써 끝났나요? 평소보다 좀 이른 감이 있는 거 같긴 하군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김명백의 말에 민혁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해줬다.
“그럼 이만 먼저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예.”
명백의 배웅을 받으며 급하게 M 컬쳐 본사를 떠나게 되는 민혁.
그러면서 동시에 스마트폰을 꺼내 어디론가 통화를 시도했다.
“어, 난데. 조사 좀 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그래, 그거. 곧 찾아가마…… 뭐? 올 때 편의점 도시락 사오라고? ……하아, 그런 건 서진이 녀석에게 맡기라고…… 알았어, 알았다. 사면 되잖아.”
거칠게 통화 버튼을 터치한 민혁이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면서 가지런히 고정되어 있는 자신의 머리카락들을 매만졌다.
“이래서 빨리 비서 서열을 높여야 한다니까.”
* * *
띵동! 하는 벨소리와 함께 아이티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열려 있으니 들어와라.”
그의 말이 바깥에 그대로 무사히 전달된 모양인지 천천히 현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이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에어컨 좀 적당히 틀어라. 순간 겨울이 다시 온 줄 알았다고.”
“……남이사. 그보다 도시락은 잘 사 왔겠지?”
“그래.”
낯선 방문자, 민혁이 작은 한숨과 함께 검은 비닐봉지 다발을 내밀었다.
“네가 부탁했던 그 편의점 도시락이다.”
“……물건부터 확인해 보지.”
“마음대로.”
마치 마약 거래상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신중하게 편의점 도시락의 구성 물품을 확인하기 시작하는 아이티.
그러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근도 없고, 오이도 없어. 채소가 덜한 고기 도시락이군. 좋아, 합격.”
“넌 채소가 그렇게나 싫으냐.”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기왕 먹을 거라면 채소보다는 고기지.”
손님맞이용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 민혁이 손사래를 쳤다.
“그래, 그래. 네 식습관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고…… 아까 내가 문자로 보내뒀던 거, 조사해뒀지?”
“일단은.”
그렇게 말하고서 뭔가를 주섬주섬 찾기 시작하는 아이티였다.
바닥뿐만이 아니라 책상 위까지.
죄다 쓰레기투성이었기 때문에 물건 하나 찾으려면 손을 몇십 번은 휘적거려야 했다.
“이거군.”
드디어 원하는 물건을 찾은 모양인지 무언가를 집어 든 채 민혁 쪽으로 던졌다.
“읏차.”
공중에서 그대로 아이티가 던진 물건을 성공적으로 받아낸 민혁이 손바닥을 펼쳤다.
“이건…….”
작은 USB였다.
민혁이 물건을 확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티의 입에서 부가설명이 이어졌다.
“네가 요구한 자료들을 담은 USB야.”
“벌써 끝난 거냐?”
“오래 안 걸리는 작업이니까.”
“역시 정보의 신. 믿음직한 구석이 있구만.”
“……딱히.”
민혁에게 이런 과한 칭찬까지 받을 의도는 없는 모양인지 사탕발림은 그만두라는 식으로 손을 휘저었다.
민혁이 아이티에게 부탁한 정보 자료는 간단했다.
K 로지에 관한 것.
그리고…….
문태현의 개인 정보까지.
“이미 M 컬쳐가 승소한 마당에 굳이 K 로지에 대한 정보를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아이티가 은근슬쩍 자신의 의견을 내비쳤다.
그러나 민혁은 지금 당장 아이티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말을 아꼈다.
대신 이런 말을 들려줄 뿐이었다.
“무럭무럭 덩치를 키워가려면, 적어도 영양가 있는 먹잇감을 먹어두는 게 좋지 않겠어?”
“……먹잇감?”
“그래.”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아이티였다.
그러나 민혁의 머릿속은 현재 상황을 역으로 이용할 대안이 마구 샘솟고 있는 중이었다.
* * *
우석과 릴리아나, 두 젊은 남녀가 향한 곳은 바로 홍대입구역이었다.
“매번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주차 때문에 고생이군.”
겨우 근처에 위치한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운 우석이 작은 불만을 내비쳤다.
그러자 릴리아나가 자신의 손을 매만지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럴 때는 제 순간이동 능력을 이용하시면 편하실 거라 생각됩니다만…….”
“아니, 매번 너에게 의존할 수는 없지. 그리고 나도 개인 차량이 있는데, 너무 안 끌고 다니면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을 테니까.”
김민혁과 이임전, 두 사람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외근 나갈 일이 많은 우석.
그런 그의 상황에서 계속 회사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시키고 몸만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근이라는 게 매번 가까운 지역에서만 미팅을 가지는 게 아니니 말이다.
기름값을 아끼기 위해 전철을 이용한다는 말을 핑계로 둘러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역으로 이런 질문을 받을 가능성도 컸다.
그럴 바에야 차는 왜 샀는가?
이런 복잡한 의심을 사기 싫어서 우석은 대체적으로 자주 자신의 차량을 이끌고 장소를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래서 오늘도 무리를 해서 차량을 끌고 오게 되었다.
“그럼 우선 저녁부터 먹을까.”
우석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릴리아나가 곧장 어느 가게의 정보를 들려줬다.
“근처에 괜찮은 일식 가게가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일식이라…… 나쁘지 않지. 근데 그런 맛집 정보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건…….”
우석의 스케줄 표라든지 반드 미디어 일정 등은 항시 숙지하고 있는 릴리아나였지만, 어느 지역에 어떠한 맛집이 위치해 있다는 것까지 항상 인지하고 다니진 않았다.
괜히 우석이 이런 질문을 한 게 아니었다.
릴리아나의 의외의 일면을 보았기에 말을 꺼낸 것이었다.
우석으로부터 대답을 강요받게 된 릴리아나가 수줍은 얼굴을 선보였다.
“그…… 동료들끼리 가끔 어울리다 보니…….”
“동료라면 직장 동료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비서?”
“……둘 다입니다.”
“과연, 그렇군.”
결국 지금의 릴리아나는 예전에 비해 친교 활동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우석으로선 충분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현상이었다.
“화염룡과도 자주 어울리나.”
“네, 가끔 같이 돌아다니곤 합니다.”
“서로 매번 티격태격하는 모습밖에 안 보여서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친하긴 친한가 보군.”
“친하다기보다는 아무래도 같이 놀러 다닐 동료 여성 비서가 없어서 그런 거 같긴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석을 따르는 비서진을 살펴보면, 젊은 여성 비서의 비율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았다.
독심술을 지닌 나모영이 합류하기 전까지는 릴리아나와 화염룡, 두 사람이 고작이었다.
워낙 두 사람의 존재감이 컸던 탓에 여성 비율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었다.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안 그런가.”
“……네, 우석 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우석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 때나, 이전의 생애인 라울의 인생을 살 때도 그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친우(親友).
믿음과 신뢰로 구성된 좋은 관계였다.
지금의 우석에게 있어서 친우라 부를 수 있는 존재라 함은 철수나 수준이 있었다.
콘텐츠 사업을 이끌어가는 데에 있어서 이들의 공로 또한 지극히 컸다.
“주변인들을 좀 더 소중하게 대하도록.”
“예, 명심하겠습니다.”
훈훈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도중이었다.
갑작스럽게 울리기 시작하는 우석의 스마트폰.
“잠깐만.”
릴리아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 통화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석 님, 접니다.
“무슨 일이지?”
-한 가지 좋은 계책이 떠올라 연락드렸습니다.
“계책?”
-예.
잠시 말을 끊은 민혁이 뒤이어 우석의 관심이 쏠릴 만한 이야깃거리를 언급했다.
-요하네의 성장세를 급격하게 높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