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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신-167화 (167/201)

갑질의 신 167화

55. 인기 작가의 슬럼프(5)

말없이 스마트폰을 매만지던 릴리아나는 어제부터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화염룡은 우석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말로는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지만, 슬럼프가 우석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었음을 나타냈다.

릴리아나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석과의 데이트를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염룡이 좋아하는 남자를 자신이 빼앗은 셈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우석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릴리아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

그나마 실연을 당한 쪽이 화염룡이라서 이 정도로 끝난 거지, 만약 입장이 뒤바뀌었다면 릴리아나는 어쩌면 비서직을 내려놓고 우석의 곁을 완전히 떠났을지도 몰랐다.

“……난 아직 어린애구나…….”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책상 위에 그대로 상반신을 엎드렸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긴 금발이 가지런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금쯤이면 우석과 화염룡이 속초에 도착했을 것이다.

혹시 몰라 우석이 독단적으로 아이티에게 릴리아나로부터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해달라는 말을 해뒀다.

그런 명령이 있었기에 릴리아나의 스마트폰으로 현재 우석과 화염룡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1시간 간격으로 정보가 전달되고 있었다.

릴리아나는 사실 그걸 원하지 않았다.

화염룡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석이 그걸 원치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아이티의 중개 역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도착한 문자 메시지에는 릴리아나가 때마침 생각했던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전 11시 반. 속초 도착.

현재 해수욕장을 구경 중임.]

“……이런 거, 필요 없는데.”

그래도 아이티의 이 행동을 자신의 마음대로 저지시킬 수는 없었다.

우석이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보기 싫으면 릴리아나가 스마트폰을 안 보면 그만이었다.

“하아…….”

이번이 몇 번째 한숨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화염룡한테 가지는 미안한 감정도 이 정도인데, 지혜의 얼굴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석과 연인 관계가 된 건 좋지만, 그에 따르는 부작용 때문에 릴리아나의 한숨은 다시 한번 더 횟수를 추가시켰다.

* * *

“바다를 배경으로 먹는 식사도 나쁘지 않네.”

화염룡의 간단한 소감에 우석은 아무런 대답 없이 회덮밥을 먹기 시작했다.

오후 5시에 먹는 비교적 이른 저녁 식사.

어차피 당일치기로 계획되어 있던 여행이었기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화염룡도 우석의 개인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을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세계의 주인을 모시는 비서인데, 고작 슬럼프 따위에 우석의 수고스러움을 재촉하는 건 화염룡의 자존심에도 상처가 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우석과의 여행을 주장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를 향한 연심을 떨쳐내기 위함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우석이 슬쩍 그녀의 마음을 떠보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던 도중, 화염룡이 피식 웃음을 토했다.

“밥 먹을 때에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던데. 우석 오빠는 매너가 없네.”

“그냥 마땅히 할 이야기도 없고 해서 한번 말해본 거야.”

“하긴, 그것도 우석 오빠만의 매력이긴 하지.”

“…….”

욕을 먹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칭찬을 받았을 때의 기분은 솔직히 말해서 그리 기쁘지 않았다.

바닷바람을 쐬며 식사를 마친 화염룡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석 오빠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좋은 비서라고 생각한다.”

“좋은 여자는 아니고?”

“……어.”

우석은 소위 말해서 썸을 타는 그런 행동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연애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이 오히려 우석의 성향에 맞는 일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여자들에게 ‘너무 차갑다’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석은 자신의 연애관을 끝까지 관철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돈의 왕이지, 연애의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그런 우석 오빠의 일면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때에는 상냥한 한 마디를 들려주는 것도 여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포인트라고.”

“미안하다. 연애에는 별로 취미가 없어서.”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

우석이 연애에 대해선 그리 능숙하지 않은 편이란 사실은 화염룡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석의 주변에는 늘 여자가 꼬였다.

그것도 하나같이 우석에게 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그런 여성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릴리아나와 화염룡, 그리고 지혜가 그러했다.

“지혜 씨한테는 아직 이야기 안 했지?”

“나와 릴리아나가 사귀고 있다는 거 말인가.”

“응.”

“비서들에게도 쉬쉬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혜 씨에게 굳이 밝힐 이유는 없지. 그리고 아직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하긴, 옳은 판단이네.”

드라마가 끝나기 전까지 우석은 지혜에게 릴리아나와의 교제 사실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혜가 우석에게 적지 않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드라마 종영 시기 이후에 모든 것을 들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혜는 능숙한 여배우가 아니었다. 이제 막 연기를 배워가는 신인인데, 괜히 신경에 거슬릴 만한 소식을 일부러 전달할 필요는 없었다.

“지혜 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글쎄.”

구태여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이미 우석의 마음은 결정되었고, 그 결과도 나왔기 때문이었다.

“지혜 씨라면 아마 축하한다고 말해주겠지.”

“그 사람도 착한 여자니까.”

화염룡도 우석의 말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물 한 잔으로 식사의 마무리를 지은 화염룡이 재차 질문을 건넸다.

“내가 만약 우석 오빠와 애인이 된다면 어땠을까?”

“……잘 모르겠군.”

“본인의 일인데도 몰라?”

“연애에 관해선 그다지 전문가가 아니라서 말이야.”

“아하하, 그렇긴 하지.”

화염룡도 여자였다.

좋아하는 남자와 이러쿵저러쿵 달콤한 로맨스 이야기 정도는 충분히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귀게 되고 난 시점부터는 그런 상상도 잘 들지 못했다.

“질문 하나 더 해도 돼?”

“상관없다.”

“우석 오빠는…… 릴리아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야?”

“무슨 뜻이지?”

우석의 되물음에 화염룡이 직설적인 말을 들려줬다.

“단순히 나보다 릴리아나와 보낸 시간이 더 오래되어서 절로 호감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군.”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 만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석의 입장에선 이런 질문에 대해서도 단호한 답변을 내려줄 필요가 있었다.

“기간의 여부로 결정한 건 아니다. 릴리아나는 예전부터…… 그러니까 내가 이 세계로 넘어왔을 때부터 나를 도와줬던 좋은 여자다. 어려운 시기 때도 몸소 짐을 나르면서 곁에서 날 보필했지. 그런 여자는 어딜 가도 쉽게 찾아볼 수는 없어.”

“하긴…… 릴리아나의 헌신과 보필은 유명하니까. 나도 그렇게까지는 못할 거야.”

어떤 형태로든, 그리고 어떠한 감정으로든 그건 명백히 사랑이었다.

그렇기에 화염룡은 더 이상 질문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바다 한 번 더 보고 갈래?”

“나쁘지 않겠군.”

화염룡의 말에 따라 식사를 마치고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이들.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는 상황이었기에 물놀이를 즐기던 관광객들의 모습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을 지는 해수면을 바라보던 화염룡이 있는 힘껏 외쳤다.

“야~~~ 호!!!”

길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우석이 작은 웃음을 선보였다.

“누가 들으면 산 정상에라도 온 줄 알겠군.”

“뭐 어때. 이렇게 소리칠 공간도 도심에는 없잖아?”

“소리가 지르고 싶었나.”

“응.”

“그러면 노래방을 추천하지.”

“우와…… 우석 오빠, 유머 솜씨가 꽝이었네.”

“크흠.”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무마시켜보는 우석이었다.

나름 화염룡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한 방도였지만, 아무래도 역효과만 난 듯했다.

“바람도 쌀쌀해지니 슬슬 가자.”

너무 늦은 시간까지 바닷가에 있는 것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당일치기로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한다면, 이제 출발할 준비를 마쳐야 했다.

우석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량으로 향하는 화염룡.

안전벨트를 착용하면서 여행의 소감을 간단하게 표현했다.

“이제 속이 좀 시원해진 거 같아.”

“다행이군.”

여행의 의미가 무용지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시동을 거는 사이에 화염룡이 다시 기운찬 목소리로 앞으로의 포부를 들려줬다.

“이제 하나만 더 마무리하면 될 거 같은데.”

“하나?”

“그 하나만 충족되면 슬럼프는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을 거 같아.”

“또 뭐가 있지?”

우석의 말이 끝나는 순간.

화염룡이 마지막 퍼즐 조각의 힌트를 요구하는 그에게 갑작스럽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대뜸 우석의 얼굴을 잡고서 기습 키스를 감행했다.

화염룡의 부드러운 입술 감촉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짧은 키스가 끝나고 난 이후.

붉게 달아오른 화염룡이 머쓱한 표정과 함께 슬럼프 극복을 선언했다.

“이제 됐어.”

“……꽤나 자극적인 조건이었군.”

“그래도 같이 밤을 지새우는 게 아니니 다행이잖아?”

“원래는 그게 목적이었나.”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그렇지만, 그랬다간 릴리아나한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셈이니까. 이래 봬도 지킬 건 지키고 사는 여자랍니다.”

“착한 여자구나, 넌.”

운전대에 손을 올린 우석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 되었든 이로 인해 화염룡은 은연중에 남아 있던 미련을 전부 털어낼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다시 반드 미디어의 간판 작가로 활동해야 할 시기가 오게 되었다.

* * *

도문석의 병원 진료실 안.

책상 위로 차트를 내려놓은 도문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이제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화염룡, 그리고 릴리아나와 함께 이곳 진료실을 찾아온 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격 교체도 예전처럼 별다른 문제 없이 전환되었다.

소봉예화의 집필 능력에도 이상은 없었다.

도문석의 말 그대로 완벽하게 치유가 된 셈이었다.

“진료 다 끝났으니까 이제 가도 되는 거지?”

그 말과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나는 화염룡.

그러자 도문석이 그녀의 말에 화답하듯 답변을 들려줬다.

“그래. 앞으로는 병원에 찾아올 일 같은 건 만들지 마라. 무엇보다도 건강이 최고니까.”

“알고 있어. 그리고 나도 이곳에 별로 오고 싶지 않거든.”

“하하,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구만.”

병원을 오가는 걸 좋아하는 환자는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물론 화염룡의 경우에는 그러한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도문석과 상성이 안 맞는다는 별개의 요소도 존재했다.

그렇게 도문석의 병원을 빠져나오는 동안.

“…….”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릴리아나가 화염룡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동을 알아차린 화염룡이 슬쩍 손을 뻗어 그녀와 손을 마주 잡았다.

순간 놀란 릴리아나였지만, 화염룡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순간이동 하려면 손 정도는 잡아야 하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

“아니면 뭐야. 나랑 손도 잡기 싫어진 건 아니겠지?”

“딱히 그런 건…….”

말끝을 흐리던 릴리아나였으나.

이내 화염룡의 미소에 마주 웃어주며 힘껏 그녀의 손을 잡아줬다.

“꽉 잡아. 순간이동 도중에 놓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알았어.”

중간에 트러블이 있긴 했었지만, 결국 두 여자는 여전히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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