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65화
55. 인기 작가의 슬럼프(3)
“내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방금 거절한다고 했나?”
“예.”
“…….”
우석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반말 대신 존댓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도문석.
존칭 사용 여부는 크게 신경 쓰일 만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도문석이 우석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게 문제였다.
설마 그가 제안을 거절할 줄은 몰랐다.
보통 비서들은 자신의 본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세계의 주인이 지니고 있는 결재 권한에 기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도문석은 달랐다.
“보아하니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병원에 환자가 없다는 건, 그만큼 사람들이 건강하다는 뜻이겠지요. 사람들이 건강하다면 의사로서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병원 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지?”
“딱 생활비 정도는 나옵니다. 먹고 사는 데에 큰 지장이 없지요.”
“……넌 별로 욕심이 없는 사람인 거 같군.”
“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굳이 세계의 주인으로부터 결재를 받지 않아도 도문석은 동네 평범한 의사 정도의 실력은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우석의 밑으로 들어가면 그의 역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문석은 구태여 자신의 능력을 한계치까지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욕심과 야망이 없었다.
김민혁과 사뭇 다른 타입이었다.
‘어렵군.’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욕심이 없는 상대방을 무슨 수로 설득하겠는가.
심지어 도문석은 의사로서의 야망도 없었다.
그나마 그가 콘텐츠 사업에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깊은 연관이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소봉예화나 미스터 리 같은 콘텐츠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비서였다면 심히 곤란했을 것이다.
속으로 어떻게 하면 도문석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난데없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의사가 필요한 겁니까.”
“그런 셈이지.”
“저를 찾아올 정도면, 특수한 환자인가 보군요.”
“…….”
그 순간, 뭔가를 알아차린 우석이 그간의 사정을 실토했다.
“소봉예화와 화염룡을 알고 있나.”
“그 이중인격 아가씨 말입니까?”
“알고는 있나 보군.”
“친하지는 않지만요. 그 아가씨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실은 그 인격 중 한쪽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여서 이렇게 직접 여기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여긴 내과입니다만.”
“세계의 주인을 따르던 비서라면, 분야 상관없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 안 그런가?”
“……정확히 보셨군요.”
도문석이 작은 웃음을 선보였다.
그는 내과 전문의였다.
그러나 우석의 결재 권한을 이용한다면, 그가 말했던 그대로 내과든 뭐든 간에 어떠한 분야라도 최고 권위자 못지않은 지식과 능력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신경외과 쪽도 마찬가지였다.
“소봉예화라…… 무슨 문제가 있길래 그러는지 아십니까?”
“그걸 모르니 이렇게 너를 찾아온 거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도문석이 들고 있던 팬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머지않아 타협점을 찾아갔다.
“새로운 세계의 주인님께서도 얼추 눈치채고 계시겠지만…… 저는 다른 비서들과 다르게 그다지 제가 지니고 있는 역량을 세상에 마음껏 뽐내고 싶다는 야망 같은 건 없습니다. 의학계 최고의 권위자가 되고 싶다는 꿈도 없고, 더욱이 금전적인 욕심도 덜하고요.”
“나와 정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군.”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저라 하더라도 남들 못지않게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무언가가 있지요.”
“그게 뭐지?”
우석의 물음에 도문석이 자신의 가슴 쪽을 가리켰다.
그러고서 이렇게 대답했다.
“양심입니다.”
“양심이라…….”
“환자가 눈앞에 있는데, 못 본 척을 하고 지나갈 정도로 매정한 사람은 아닙니다. 더욱이 그 환자가 과거에 저와 같은 직장 동료였다고 한다면 더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다면…….”
“우석 님의 밑에 들어가 활동하는 건 아직까지 고려해 보고 싶습니다만,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우석 님의 비서로서 활동할 의향은 있습니다. 환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 환자를 애써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나쁘지 않은 사상이군.”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필요에 따라 우석에게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도문석.
그의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합의를 본 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오전.
“바, 바깥…… 가증스러운 태양의 빛이 내 살점을 태우는구나…….”
바로 옆에서 강한 불만을 어필하는 소봉예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제로 태양의 빛이 그녀의 살점을 태우는 건 아니었다.
직역하자면 ‘나오기 싫었는데 억지로 끌려 나왔다’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소봉예화를 슬럼프라는 이름의 늪지대에서 꺼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선 그녀를 도문석과 만나게 할 필요가 있었다.
“도문석이라면 분명 뭔가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소봉예화를 옆에서 부축해주던 릴리아나가 우석에게 확신 가득한 발언을 들려줬다.
그만큼 의사로서 그의 능력은 뛰어났다.
게다가 우석의 결재까지 받는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어제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던 도문석이 이들을 맞이해 줬다.
“오셨습니까, 우석 님.”
우선적으로 우석에게 인사를 건넨 뒤.
같이 따라온 소봉예화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만.”
“……날라리 의사로군.”
“하하하, 날라리라니. 나처럼 성실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도문석이었다.
문석이 직접 말했던 그대로 소봉예화의 머릿속에는 도문석의 이미지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은 듯했다.
“일단 앉아봐라.”
“…….”
얌전히 의자에 자리를 잡는 소봉예화.
도문석에게 가시 돋힌 말을 하긴 했지만, 그의 실력은 진짜배기였기에 의심을 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진료용 의자에 앉은 소봉예화를 향해 도문석이 기본적인 질문을 들려줬다.
“듣자 하니 인격 교체가 안 된다고 하던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소봉예화였다.
그녀의 반응에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그랬지?”
“워크샵에 갔다 온 이후부터.”
“워크샵이라…… 거기서 화염룡에게 뭔가 충격적인 일이라도 있었나?”
“글쎄…….”
한 몸에 다른 인격이지만, 기억은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봉예화도 화염룡이 워크샵 내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봉예화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다든지 하는 그런 건 없어 보였다.
한편.
도문석이 말을 이어가는 동안, 릴리아나의 표정에는 불안감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맺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결국, 우석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우석 님. 잠깐 바깥에 나가서 쉬어도 될까요?”
“상관없다만…… 몸이라도 안 좋아진 건가.”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알았다. 나가서 쉬도록.”
“감사합니다.”
우석의 허락을 받고 나서야 병원 대기실로 나오게 된 릴리아나였다.
그녀가 나간 동안에도 문석의 상담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 낌새는 안 보였단 말이지?”
“아마도.”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조금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해 보도록 할까.”
도문석이 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 보였다.
그러더니 소봉예화의 시선 높이까지 들어 보였다.
“이 동전을 잘 보고 있어라.”
“……뭐 하려고?”
“보고 있으면 알게 될 거야.”
“…….”
도문석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는 소봉예화였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100원짜리 동전에 고정되어 있는 사이에.
도문석의 왼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이윽고…….
따악!!!
난데없이 소봉예화의 이마를 손뼉으로 쳐보였다.
찰진 소리와 함께 그대로 힘없이 뒤로 넘어가는 소봉예화.
그 순간, 도문석이 빠르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제대로 걸려들었나 보군요.”
도문석의 황당한 행동을 두 눈으로 지켜보던 우석이 곧장 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설마 최면인가?”
“예. 좀 과격한 수법이긴 하지만요.”
“확실히…… 과격하군.”
다 큰 처녀의 이마를 때려야 걸리는 최면 방법이라.
이 사실을 다른 비서들이 알게 된다면, 도문석을 안 좋게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래서 소봉예화가 도문석을 싫어하는 건가.’
수단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 소봉예화의 현재 상태로 보아선 제대로 최면에 걸린 듯했다.
상대방에게 가격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보여야 하는 반응은 고통을 동반한 아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봉예화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눈을 감은 채 얌전히 도문석의 도움으로 침대 위에 몸을 눕히게 되었다.
최면에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내과 의사가 최면도 걸 수 있다니…… 신기하군.”
“이게 다 우석 님의 결재 덕분이죠.”
보면 볼수록 신기한 비서들의 능력이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최면 상태에 빠져든 소봉예화를 침대에 눕힌 도문석이 다음 치료 방향을 언급했다.
“화염룡을 강제로 불러올 겁니다.”
“몸에 부작용이 생기거나 그러진 않겠지?”
“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인격의 교체를 거부하는 화염룡을 강제로 끌어오는 일은 다소 위험부담이 있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일을 주관하는 남자가 도문석인 이상, 그런 부작용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시작합니다.”
도문석이 오른손을 들어 다시 한번 소봉예화의 이마를 따악! 소리가 나게끔 쳐보였다.
그와 동시에…….
“으음…….”
소봉예화의 입에서 옅은 신음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머지않아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긴…….”
“이제 잠에서 깼나.”
“그 목소리는…… 도문석?!”
“정답이다.”
“설마……!!”
소봉예화가 벌떡 상반신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예상대로 흰색의 가운에 달린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연신 미소를 짓고 있는 도문석이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우석 오빠까지……!”
“오랜만이다, 화염룡. 그동안 잘 지냈나.”
“……잘 지냈을 리가 없잖아.”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님을 깨달은 화염룡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옷차림이라든지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그렇지만, 유독 신경이 쓰이는 게 있었다.
자신의 이마를 만지작거리던 화염룡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런데 왜 내 이마가 빨갛게 부어있는 거야?”
“그건…….”
우석이 슬쩍 문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도문석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화염룡에게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답변을 들려줬다.
“소봉예화가 오늘 아침에 잠을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고 하더군. 아마 그것 때문에 생긴 상처 같은데?”
“……정말로?”
“정말로.”
“그…… 래?”
아주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도문석이었다.
그의 모습에 우석은 소봉예화가 그를 꺼리는 듯한 모습을 보인 이유가 무엇인지 또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동안 잠들어 있던 또 다른 공주가 오랜만에 왕자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제는 잠이 든 이유를 캐물어야 할 때였다.
“듣자 하니 소봉예화의 인격 요청도 거부했다고 하던데. 뭔가 충격받을 만한 일이라도 있었나.”
우석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들려왔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화염룡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사귀기 시작했으니, 충격이 클 만도 하잖아.”
“…….”
“안 그래?”
그녀의 물음에 우석은 굳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