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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신-164화 (164/201)

갑질의 신 164화

55. 인기 작가의 슬럼프(2)

믿기 힘든 말이 소봉예화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인격이 교체되지 않는다니.

눈만 살짝 감았다가 뜨면 바로 인격을 교체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소봉예화와 화염룡 아니겠는가.

물론 소봉예화의 경우에는 중2병 덕분에 겉멋이 들은 모양인지 장황한 주문을 중얼거려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화염룡의 말에 의하면 그런 건 굳이 필요 없다고 했었다.

의식만 있으면 마음껏 인격을 교체할 수 있다고 본인들이 직접 말을 했으니……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 거짓은 아니겠지.”

“거짓일 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소봉예화.

하기야. 거짓말을 해봤자 그녀가 무슨 득을 보겠는가.

설사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화염룡의 성격상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않은 소봉예화의 행동을 보고 가만히 지나칠 리가 없었다.

강제적으로 인격을 교체해서라도 튀어나와 씻기라도 할 터.

그러나 소봉예화의 몰골은 우석과 릴리아나가 보고 있듯이 말로 표현할 정도의 수준을 넘어섰다.

“릴리아나.”

“예.”

“뭐 좀 아는 거 없나?”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잘…….”

릴리아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름 오랫동안 소봉예화와 화염룡 콤비와 같이 일을 해오긴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화염룡이 스스로 인격 교체를 거부하다니.

주된 인격체가 소봉예화라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화염룡은 오히려 더 많이 세상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 했다.

외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소봉예화의 인격 교체 요청을 무시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큰일이군…….”

우석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봉예화의 슬럼프도 그렇지만, 화염룡이라는 존재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도 치명적이었다.

소봉예화와 화염룡, 두 인격은 서로 각자만의 역할과 능력을 분배하고 있었다.

소봉예화의 경우에는 창작.

그리고 화염룡의 경우에는 작품을 보는 혜안(慧眼)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화염룡의 인격을 불러올 수 없다는 말은…….

작품을 볼 줄 아는 안목을 잃어버렸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소봉예화도 작품을 보는 눈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화염룡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염룡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너무 외향적이라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녀의 이러한 성향 덕분에 우석이 자주 외부 행사에 그녀들을 대동할 수 있었다.

바깥에 나가기 싫어하는 소봉예화를 대신해 외부 업무를 도맡아 처리해주던 화염룡의 부재는 생각보다 꽤 컸다.

“……알았다. 우선 푹 쉬도록 해.”

우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소봉예화.

안 그래도 졸린 모양인지 그의 제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소봉예화의 방에서 나온 우석이 릴리아나에게 추가적인 명령을 들려줬다.

“아이티가 있는 쪽으로 가자.”

“예, 알겠습니다.”

그의 명령에 따라 곧장 순간이동 준비를 서두르는 릴리아나.

빛의 입자들이 이들을 감쌀 무렵.

“…….”

릴리아나의 시선이 소봉예화가 잠을 청하고 있는 방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이들은 소봉예화의 자택에서 완벽하게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 * *

빛의 입자들이 아이티가 거주하고 있는 원룸 한 가운데에 서서히 모여들 무렵.

“……릴리아나가 온 모양인가 본데.”

민혁과 함께 아이티의 방을 찾아온 남서진이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굳이 서진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민혁도, 그리고 아이티도 릴리아나가 이쪽으로 순간이동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빛의 입자들이 사람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더니, 릴리아나와 우석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순간이동이 완료되자마자 우석이 근처에 선 채 자신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해오는 두 명의 남자를 발견했다.

“오셨습니까, 우석 님.”

민혁이 대표로 인사를 건넸다.

뒤에 있던 남서진의 모습까지 확인을 마친 우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곳엔 무슨 일로 온 거지?”

“저번에 말씀하신 K 로지와 M 컬쳐의 소송 분쟁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거기에 관한 자료를 얻고자 왔습니다.”

“그렇군.”

“그보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별거 아니다.”

볼 일이 있는 건 민혁이 아니었다.

시선을 돌려 아이티 쪽으로 다가간 우석이 방문 목적을 들려줬다.

“저번에 릴리아나가 너에게 의뢰했던 일이 하나 있을 거다. 진행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려고 왔다만.”

“그거라면 이미 끝났습니다.”

“소재지를 파악했나?”

“예.”

“역시 빠르군.”

아이티의 정보처리 속도는 우석을 미소 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다소 답답한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다 적응되어가면서 큰 불편 요소로 느껴지지 않았다.

벽에 걸린 모니터에 창 하나를 띄우는 아이티.

“저 사람입니다.”

“오호…….”

우석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한편, 그와 같이 화면을 응시하던 민혁이 이제야 이야기의 화두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

화면에 떠 있는 건 어느 한 남자의 신상명세서였다.

잘 정돈되지 않은 수염.

40대 중반의 남성으로 보이는 남성은 흰색의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마우스를 몇 번 만지작하던 아이티가 보다 자세하게 남자를 소개했다.

“이름은 도문석. 과거 전(前) 세계의 주인이 군림했을 당시에 의료 담당 비서로 활동하던 남자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군요.”

민혁도 문석의 모습을 보자마자 반가운 기색을 선보였다.

그의 모습에 우석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는 사이인가?”

“저보다는 미스터 리가 더 친할 겁니다. 두 사람이 서로 절친이었거든요.”

“그렇군.”

비서들끼리도 서로 우호적인 관계가 있고 적대적인 관계가 있었다.

우석은 사실 전(前) 세계의 주인이 이끌던 세계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비서들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몰랐다.

한 명이라도 친한 비서가 있다면, 우석의 밑으로 데려오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런데 도문석은 어째서…….”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서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실 도문석은 우석의 콘텐츠 사업 분야에 있어서 큰 역할을 소화하지 못하는 부류의 비서였다.

웹툰, 웹소설과 의사.

그다지 접점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그를 찾아 헤맨 이유가 있었던 걸까.

그런 의문점이 든 남서진이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입 바깥으로 내뱉었다.

그의 질문에 답변을 들려준 인물은 우석이 아닌 릴리아나였다.

“워크샵에 갔을 당시에 우석 님께서 건강 문제로 앓아누우셨던 일 때문이야. 그런 경우가 생기면 안 되니까.”

예전부터 릴리아나는 의료계에 종사하는 비서를 섭외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업 쪽 업무량이 워낙 많았던 터라 그동안 실천을 해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석의 건강에 적색 신호가 들어오게 되었고, 릴리아나는 진작부터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그래서 우석이 앓아누워 있는 동안, 그녀가 먼저 아이티에게 접근해 도문석을 찾으라는 말을 전해두게 된 것이었다.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릴리아나의 말이었기에 그녀의 말대로 도문석의 소재지를 파악해 두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드러나게 되었다.

나중에 되어서야 릴리아나가 아이티에게 별도로 도문석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고, 우석은 그 비서를 다른 쪽에 활용해 보려고 시도하려 했다.

바로 소봉예화의 슬럼프 치료였다.

* * *

“여긴가.”

“네.”

우석의 말에 릴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순간이동을 한 릴리아나였지만,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보다 소봉예화의 슬럼프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도문석을 우석의 밑으로 데려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들어가자.”

“예, 알겠습니다.”

곧장 우석의 뒤를 따라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릴리아나.

‘도문석 내과’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2층짜리 건물은 상당히 허름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1층은 병원으로, 그리고 2층은 거주지로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서 때마침 하품을 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간호사 한 명이 우석과 릴리아나의 방문에 화들짝 놀라며 두 사람을 반겼다.

“어, 어서 오세요. 혹시 처음이신가요?”

“예.”

“그럼 여기에 이름하고 주소, 핸드폰 번호를 기입해주세요.”

간호사에게 팬을 건네받은 우석이 끄적끄적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간단한 신상명세를 작성한 뒤.

“…….”

병세를 적어야 하는 란에서 잠시 팬의 움직임이 멈췄다.

무엇을 적을까 하다가 이곳이 내과임을 깨닫고 간단하게 ‘속이 안 좋음’이라고 적어뒀다.

“여기 있습니다.”

“네, 잠시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간호사의 말에 따라 우석과 릴리아나, 두 사람이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아직 퇴근 시간 이전이라 그런지 병원 내부에는 간호사를 제외하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우석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는 우석.

릴리아나도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진료실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어서 오…… 음?”

흰색 가운을 걸친 채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 도문석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우석이야 둘째 치더라도 뒤에 따라온 금발의 여인은 그와 인연이 있던 여자였다.

“혹시…… 릴리아나인가?”

“기억이 나나 보네.”

“잊을 리가 있겠나. 오랜만이구만. 그보다 옆에 있는 남자는…… 애인?”

도문석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순간 릴리아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진짜냐?”

“그, 그렇지 않…….”

그냥 장난으로 해본 말이었는데, 릴리아나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 순간.

“도문석이라고 했던가. 너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다.”

갑자기 우석이 두 사람의 대화를 끊고서 맞은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우석의 행동에 도문석의 오른쪽 눈썹이 위쪽으로 추켜 올라가게 되었다.

한눈에 봐도 도문석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남자가 갑작스럽게 반말을 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남자친구가 예의범절이 없는 거 같구만.”

“그런 관계 아니라니까!”

릴리아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부정했다.

거짓말이긴 하지만,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것을 당분간은 비밀로 하기로 했기에 이런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해하는 릴리아나를 대신해 우석이 자기 자신을 소개했다.

“새로 세계의 주인 자리에 취임하게 된 이우석이라고 한다.”

“세계의 주인……?!”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새파랗게 젊은 남자에 불과한 존재가 세계의 주인이라니.

그러나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내가 여기에 찾아온 이유가 뭔지 알고 있겠지?”

“…….”

도한석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 남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의사라는 직책답게 머리가 좋은 편에 속했다.

우석이 직접 릴리아나를 데리고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간단할 터.

“도문석. 내 비서가 되어라.”

직접적으로 용건을 언급하는 우석이었다.

그러나.

도문석의 입에선 우석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답변이 튀어나왔다.

“죄송하지만 그 건은 거절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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