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62화
54. 견제(3)
명단에 적혀 있는 무수한 업체들.
그것을 보자마자 우석은 절로 이런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같이 전부 다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아뒀군.’
문태현의 말대로 이름만 들으면 어느 업체인지는 알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 선밖에 되지 않았다.
알긴 알지만, 뭐라고 할까…… 업계 내에서 마땅히 큰 성공을 거뒀던 적도 없고, 내세울 만한 콘텐츠 라인도 없었다.
우석의 입장에서는 당나라 군대를 모아두고 보라고 한 격과 같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 김원일 부장.
마음에 들 리가 있겠는가.
“뭔가 대단한 업체들이 껴 있을 줄 알았더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라인업의 위력이 별로인 거 같아서요.”
“그건…….”
“그리고 한 가지 더. 아까 이런 말씀을 하셨던 거 같은데…… 요하네 측에 콘텐츠들을 독점적으로 줄 수 있게끔 말씀해 보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렇단 말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라고 해석해도 되겠지요?”
“…….”
“이야기를 진행하려면 적어도 이들의 담합을 확정받은 다음에서야 진행시키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만.”
우석의 날카로운 일침.
그의 말에 문태현과 김원일, 두 남자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우석의 주장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제 말이 틀렸나요?”
“……아닙니다.”
문태현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순서대로라면 업체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난 뒤에 우석에게 딜을 걸었어야 했다.
그러나 문태현은 급한 마음에 일단 우석부터 먼저 찾아오고 나서 무작정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주장을 펼쳤다.
아니, 주장 정도도 아니었다.
그저 떼를 쓴 것에 불과했다.
“이 이야기는 접어두고 난 다음에 다음 기회에 다시 해둘 필요가 있겠군요.”
“다음이라면 흡사 언제쯤 예상하시고 계시는지…….”
김원일 부장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왔다.
우석의 시선이 릴리아나에게로 향하자, 그녀가 작은 수첩을 꺼내 스케줄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일정이 비어있습니다.”
“시간은?”
“2시부터 4시까지입니다.”
“그럼 그때 잡도록 하죠. 어떻습니까?”
날짜와 시간을 정하는 건 우석의 일이었다.
아쉬울 거 없는 자의 여유였다.
반면, 반드 미디어를 어떻게든 자신들의 세력 쪽으로 포섭하고 싶어 하는 문태현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자신의 일정을 우석에게 맞출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쪽이 을(乙)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제가 회사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거리가 꽤 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하! 이곳 휴양지까지 왔는데 반드 미디어 본사로 가는 일쯤이야 우습지요.”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우석과의 딜을 성사시키기 위해 일부러 김원일과 먼 곳을 달려왔는데, 까짓것 반드 미디어 사무실을 찾아가는 게 뭐가 그리 대수겠는가.
지금 문태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우석의 비위를 맞춰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다음 주 월요일에 있을 2차 협상 테이블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전까지 우석이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 K 로지가 해야 할 일이었다.
* * *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지고 먼저 서울로 돌아가게 된 문태현과 김원일.
두 사람을 배웅한 뒤,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우석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민혁에게 말을 걸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거의 말을 안 하던데. 너답지 않더군.”
“하하, 우석 님께서 알아서 잘 판단을 내리시고 말씀까지 직접 다 하시는데 굳이 제가 나서서 흐름을 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귀찮아서 말을 안 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환한 미소를 선보여주는 김민혁.
그의 웃음이 가식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K 로지와 M 컬쳐, 두 거대 플랫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문 대표를 보아하니…… 이번 사건으로 어떻게든 M 컬쳐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거 같아 보이던데. 너는 어떻게 봤나.”
“저도 우석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얼추 알고 있겠군.”
“물론이지요.”
김민혁의 머릿속에는 이미 모든 정황이 그려지고 있었다.
“반드 미디어는 M 컬쳐든 K 로지든 어느 한 쪽에게 힘을 실어줘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편이 좋겠지요.”
“방관자라…….”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는 저희 회사 측에선 결국 두 기업 다 라이벌입니다. 그런데 수고를 들이지 않고 둘 중 한 곳을 묵사발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굳이 저희가 힘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가만히 놔두면 약한 쪽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겁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로군.”
K 로지나 M 컬쳐, 둘 중 한 곳의 입지가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반드 미디어의 요하네 같은 신생 플랫폼에게 기회가 찾아오는 법이었다.
이번이 절호의 찬스였다.
“네가 보기엔 누가 이길 거 같지?”
“정황상으로는 M 컬쳐가 승리할 거 같습니다.”
“M 컬쳐라…….”
민혁도 영업 파트에서 일을 하다 보니 여러모로 주워들은 게 많았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선 아이티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으니…… 종합적으로 판단을 해본다면 이번 소송 사건은 K 로지보다 M 컬쳐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M 컬쳐가 K 로지를 짓밟는 걸 최대한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는 편이 좋겠군.”
“예.”
두 사람이 말을 맞추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릴리아나가 자신의 생각은 좀 다르다는 식으로 의견을 들려줬다.
“기왕 한 쪽이 떨어져 나갈 거라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업체 쪽이 힘을 실어줘 잘 보여두면 좋지 않겠습니까?”
릴리아나도 이쪽 업계에 나름 오랫동안 몸을 담아 일을 해오면서 보는 안목이 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일도 예전에 비해 많이 늘은 편이었다.
하나 이번만큼은 민혁의 판단이 옳았다.
“설사 K 로지가 M 컬쳐에게 짓밟힌다 하더라도 문태현을 포함해 K 로지에 몸을 담고 있던 사람들은 분명 다른 형태로든 간에 이 업계에 남아 활동을 계속 이어갈 거다. 한 우물만 파던 사람들이었으니 그만큼 미련도 많이 남을 테니까. 언젠가 나중에 얼굴을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을 생각한다면, K 로지의 적이 되는 것보다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해두는 편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르지. 그래야 뒤탈이 적을 테니까.”
“……그렇군요.”
우석이 사업체를 이끌어갈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제의 적이 내일의 동료가 될 수도 있는 법.
그렇다면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두는 편이 좋았다.
반드 미디어가 여태껏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플랫폼 사업을 꾸려갈 때에도 견제를 최대한 덜 받으며 꾸준히 성장을 시킬 수 있었다.
적을 만들지 않는다.
그게 우석의 철칙이었다.
지금 당장은 K 로지가 불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일부러 그들과 척을 지어둘 필요는 없었다.
“김민혁.”
“예, 우석 님.”
“줄타기 잘하나?”
그의 질문을 들은 민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우석이 가리키는 ‘줄타기’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저의 전매특허입니다.”
“월요일 미팅까지만 내가 같이 참가할 터이니,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맡겨만 주시기 바랍니다.”
유능한 부하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세계의 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 * *
워크샵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 일상.
출근길에 오른 철수가 책상에 앉아 계속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기력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우석이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하며 말을 걸어왔다.
“왜 그러냐.”
“……그냥.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푸른 계곡을 보면서 휴양을 즐기던 게 떠올라서 그렇다.”
“벌써 휴가 후유증인가 보군.”
“뭐…… 그런 셈이지.”
한 번 달콤한 휴식을 맛본 이에겐 그만큼 후유증도 크게 작용하는 법이었다.
하기야. 사무실 안에 틀어박혀 업무만 보는 것보다 자연을 벗 삼아 휴양을 즐기는 게 훨씬 더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휴가도 이제는 끝이었다.
슬슬 업무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왔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원들 역시 철수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휴가에 대한 후유증이 남아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할 때는 해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억지로 업무를 소화하는 중이었다.
오늘 있을 K 로지와의 두 번째 미팅만 소화하고 나면 금일의 스케줄은 전부 끝이 날 예정이었다.
‘간만에 집에 일찍 들어가 볼까.’
가족들과 외식한 지도 꽤나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가족에 대한 애착이 짙은 우석이었기에 오랜만에 부모님과 연주의 얼굴도 보고 싶었다.
일찌감치 이른 퇴근을 직감하고 있던 우석.
그때, 마침 그의 스마트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걸어온 이의 이름을 확인하던 와중에 우석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새겨졌다.
서덕우 이사.
바로 얼마 전, 우석에게 눈물 비 영화화를 제안했던 사람이었다.
‘조기 퇴근은 물건너갔군.’
K 로지와의 미팅에 이어 서덕우 이사와의 만남까지.
철수가 느꼈던 후유증이 우석에게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 * *
문태현 대표와의 미팅은 우석이 예상했던 그대로 어정쩡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가 자신 있게 내걸었던 7군데 업체와의 콘텐츠 독점 계약이 의외로 난항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일이 잘 안 풀리네요.”
“세상만사 잘 될 때고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그러는 거죠.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마세요.”
김민혁이 영업용 미소를 지어주면서 문태현을 격려했다.
한편, 옆에 앉아 있던 우석은 문태현과의 이야기보다 다른 쪽에 더 관심이 많이 쏠리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서덕우 이사와의 통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눈물 비 영화화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드라마가 워낙 성공적인 사례로 남게 된 탓에 AP 엔터테인먼트 내에서도 영화화를 추진하자는 의견에 더더욱 많은 힘이 실리게 되었다.
우석의 입장에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드라마에 이어 영화까지.
콘텐츠 중에서도 최종 테크트리라 할 수 있는 영상 사업에 진출할 건수를 마련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놓칠 수 없는 기회라 판단을 했기에 당분간 우석은 그쪽에 전력을 다할 셈이었다.
그런 그에게 K 로지와 M 컬쳐의 기세 싸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좀 더 시간을 주신다면 어떻게든 확답을 받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대표님.”
민혁이 문태현을 달래는 동안, 우석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럼 오늘 미팅은 여기까지 하는 편이 좋겠군요.”
“다음에 또 시간 되실 때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미팅을 마무리 짓고 난 뒤.
대표 사무실로 돌아온 우석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제 더 이상 추가적인 업무는 없으리라.
그렇게 판단을 하던 그였지만, 릴리아나의 방문이 그의 기대를 망치게 되었다.
“우석 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만…….”
“또 뭐지?”
어느 곳에서 또 미팅하자고 연락이 온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해보던 우석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전혀 다른 방향을 지닌 보고가 들려왔다.
“소봉예화가…… 슬럼프라고 합니다.”
“……뭐?!”
우석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