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61화
54. 견제(2)
“경치 하나는 좋구만.”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기 위해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보이며 주변 경관을 둘러보기 시작하는 문태현.
휴가도 아닌데 굳이 이곳 휴양지를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다 보니 바로 옆쪽에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
K 로지에서 편집팀 부장직을 맡고 있는 김원일의 보고가 들려왔다.
이들이 괜히 허투루 이곳까지 온 건 아니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우연한 만남을 조장하고자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타깃은 명확했다.
반드 미디어의 대표, 이우석.
그를 만나기 위해서 먼 길을 달려왔다.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말을 거느냐인데.”
반드 미디어는 현재 워크샵을 나온 상태였다.
한 마디로 사원들과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 그리고 잠시 찌들었던 회사 업무에서 벗어나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데, 문태현이 일 관련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과연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천만에.
문태현이라도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큼 급한 일이란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씀드렸던 그대로…… 저희도 휴가를 나왔다는 설정을 덧붙이면 어떨까요?”
김원일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 봤다.
어제저녁.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면서 두 남자는 어떤 식으로 우석과의 우연한 만남을 조성할 것인지에 대한 열띤 토론을 펼쳤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좀 억지 설정 아니냐. 가족들끼리 휴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이럴 줄 알았다면 마누라한테 휴가나 가자고 말이나 해둘 걸 그랬네.”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김원일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문태현의 말을 받아줬다.
확실히 가족들과 함께 이곳 휴양지를 찾아왔더라면 우연한 만남을 가장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오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 모양인지 문태현의 손이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올 거였으면 처음부터 이곳에 오면 될 일이었을 텐데, 그의 생각이 짧았다.
“아무튼 다른 방법을 찾아보…….”
“대, 대표님……!”
갑자기 김원일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저, 저기……”
“뭔데 그러냐.”
“저쪽에…… 이우석 대표 아닙니까?”
“뭐?!”
문태현이 그가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을 보자마자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눈부신 금발을 지닌 미녀, 릴리아나와 낯이 익은 젊은 남자, 김민혁과 함께 터벅터벅 걸어오기 시작하는 이우석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걸어오는 방향도 정확하게 문태현이 서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듯이 멀리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이우석이 목소리를 살짝 높여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문 대표님.”
우석이 먼저 인사를 건네오자 문태현 역시 덩달아 어색한 표정으로 마주 고개를 숙였다.
“이, 이 대표님! 이거 참…… 우, 우연입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우연은 개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품은 우석이었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
상대방의 말을 부정하면서까지 감정을 상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우선은 이 자들이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구태여 휴양지까지 찾아왔는지에 대한 것부터 파악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두 분이 나란히 놀러 오신 것처럼 보이진 않군요.”
“그게…….”
“…….”
우석의 직설적인 발언에 이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우석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에 그를 찾아온 건 맞는 말이니까.
당황해하는 두 사람과 다르게 우석은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계곡 근처에 카페 하나가 있습니다. 풍경 보면서 커피 한잔하기 참으로 좋은 가게죠. 어떻습니까?”
“조, 좋습니다!”
“바로 가시죠!”
문태현과 김원일이 이때다 싶어 장소를 이동하기를 권유했다.
과정이 여러모로 이들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론 만사 오케이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 * *
우석이 말했던 그대로 계곡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의 풍경에 문태현과 김원일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
“생각보다 꽤 좋군요.”
“어제 봐둔 카페인데, 풍경이 괜찮아서 기억해 두고 있었지요. 그보다 자리를 어디로 할지…….”
우석의 말을 듣자마자 먼저 행동에 임한 이가 있었다.
“이쪽이 괜찮을 거 같습니다.”
김민혁이 먼저 자리를 선점해 이들을 안내했다.
카페 내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계곡물에 빠져 놀기에 바빠하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
물론 카페에 앉아 커피를 음미하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긴 하지만, 계곡에 놀러 온 가장 큰 목적은 바로 계곡물 아니겠는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사람들의 소리에 절로 귀를 기울여보는 우석.
확실히 도시의 소음에 묻혀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여유로움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후.
눈앞에 마련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기울인 귀에 곧장 본론을 언급했다.
“두 분의 얼굴을 보아하니 저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듯합니다만.”
“…….”
정확하게 지적했다.
하기야, 우석을 보기 위해 이곳 휴양지까지 찾아왔는데, 할 말이 없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김원일이 문태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 쪽은 김원일보다 문태현이었다.
당사자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우석의 말을 긍정으로 받음과 동시에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예, 맞습니다.”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최근에 저희 K 로지와 M 컬쳐 쪽에 법적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사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법적 분쟁이라…….”
우석이 말끝을 흐리자, 민혁이 곧장 부연 설명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웹소설을 공급하는 매니지먼트 업체 중 한 곳이 K 로지와 M 컬쳐, 두 군데에서 동시에 이중 계약을 체결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콘텐츠 연재 권한에 대한 분쟁이 발생했다고는 들었었는데…… 법적 공방까지 가게 될 줄은 몰랐네요.”
“과연, 그렇군.”
우석도 K 로지와 M 컬쳐 사이에 터진 문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우석이 이끄는 반드 미디어뿐만이 아니라 웹소설 콘텐츠를 공급하는 매니지먼트, 유통사, 그리고 출판사들도 이러한 사실은 이미 다 알 것이다.
웹소설 업계에서 가장 큰 덩치를 지니고 있는 두 플랫폼 아니겠는가.
그곳들이 서로 정면충돌을 하게 되었는데, 모르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러나 민혁의 말대로 법적 문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석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이런 건 결국 기 싸움이니까요.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선례로 남아 뒤에 발생할 또 다른 문제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거 같아 저희도 일부러 강하게 나가기로 했습니다.”
문태현이라는 남자의 성향에 어울릴 만한 맞대응이었다.
그는 강직했다.
그리고 우직했다.
그래서 혈혈단신으로 K 로지라는 플랫폼을 웹소설 연재 사이트 최고봉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방식이 모든 일에 통하란 법은 없었다.
때로는 실패를 맛볼 때도 있었다.
웹툰 사업처럼 말이다.
K 로지도 반드 미디어처럼 웹툰 사업까지 발을 넓히려 했었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다.
그 때문에 회사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반면 우석은 요하네라는 플랫폼을 가지고 웹소설과 웹툰, 두 분야에서 성공적인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그의 행보가 문태현에게 있어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반드 미디어가 저희 편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태현이 먼저 칼을 뽑아 들었다.
그의 칼은 실로 매서웠다.
그리고…….
동시에 위험했다.
남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도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만큼의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 날카로움에 베이지 않기 위해선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했다.
“우리가 K 로지에게 도움을 준다고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원하는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반드 미디어는 법적 분쟁을 다루는 업체가 아니었다.
콘텐츠 공급 업체이면서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는 종합 미디어 회사였다.
그런 업체에게 무엇을 어떻게 도와달라고 한단 말인가.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우석에게 문태현이 재차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앞으로 M 컬쳐와 거리를 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은…….”
“콘텐츠 공급은 가급적이면 M 컬쳐보다 저희 K 로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것만으로 M 컬쳐에는 많은 타격이 생길 터…… 이 대표님이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됩니다.”
“…….”
실제로 M 컬쳐에서 매출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작품 중 과반수 이상은 반드 미디어에서 공급한 콘텐츠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반드 미디어가 M 컬쳐에게 손을 뗀다고 하면, 분명 커다란 타격을 입힐 수 있게 될 것이다.
거기에 연이어 그 콘텐츠들을 K 로지에 공급한다면, M 컬쳐의 피해는 가중될 터.
자신의 이득과 실리를 취하면서 동시에 라이벌 업체를 견제하고자 하는 문태현의 방식은 실로 옳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준다고 한들, 과연 K 로지가 반드 미디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가 협상의 가장 큰 관건이었다.
“문 대표님도 아주 잘 알고 계시겠지만…… M 컬쳐에서 얻고 있는 수익은 저희 반드 미디어에서도 꽤나 무시할 수 없는 수입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희에게 그런 이익을 포기하라는 건 외람된 말이지만 M 컬쳐와 동시에 반드 미디어도 같이 죽으라는 뜻이 아닌가요.”
살짝 과격한 표현법을 사용하는 우석이었다.
하나 그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그만큼 문태현의 제안은 반드 미디어에게도 어느 정도 위험부담을 감수하라고 강요하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이대로 문태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면 큰일이었다.
반드 미디어는 콘텐츠 공급 업체임과 동시에 요하네를 운영하고 있는 플랫폼 회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반드 미디어와 M 컬쳐를 둘 다 죽이게 되면 이점은 누가 얻겠는가?
K 로지일 것이 뻔했다.
남 좋은 일을 시켜주겠다고 자신이 죽는 꼴을 가만히 볼 리가 있겠는가.
우석의 성격상 절대로 그렇게 놔둘 리는 없었다.
M 컬쳐와 관계를 단절하는 대신, 그만큼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했다.
우석이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문태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석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반응을 선보였다.
“저희와 파트너십을 맺은 유통사가 7군데 정도 됩니다. 이들은 이미 저희 K 로지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만약 반드 미디어가 저희에게 동참을 해주신다면…… 이 업체들이 지니고 있는 콘텐츠들을 요하네 측에 독점 연재하도록 말을 꺼내보겠습니다.”
“어느 곳이 있는지 명단 좀 볼 수 있을까요.”
“여기 있습니다.”
미리 준비해 왔다는 듯이 종이 하나를 내미는 문태현.
그러면서 옆에 있던 김원일이 부가적인 설명을 들려줬다.
“하나같이 전부 다 유명한 업체들입니다.”
“…….”
“어떠신지요?”
명단을 내려다보던 우석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새겨졌다.
머지않아 간결한 답변을 들려줬다.
“별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