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60화
54. 견제(1)
모두가 거의 잠든 새벽 5시.
“그럼…… 저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라.”
“네, 우석 님.”
늦은 새벽 시간.
우석에게 인사를 건넨 뒤, 릴리아나가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의 눈빛에는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설마 그녀가 우석과 연인 관계가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심적인 고통에서 해방되었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진정하자, 진정해. 이러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들킬지도 몰라.’
사귀기로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당분간은 두 사람만의 비밀로 삼기로 합의를 봤었다.
하기야. 릴리아나가 ‘나, 우석 님과 사귀기로 했어.’라는 말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것도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우석이라면 시원스럽게 말을 할지도 몰랐지만, 미스터 리라든지 반도체, 나모영 등 새롭게 우석의 비서로 합류하게 된 비서들도 있어서 비밀을 유지하기로 했었다.
언젠가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속으로 그렇게 희망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봐?”
“……!!”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릴리아나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던 화염룡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왔다.
설마 화염룡이 아직까지 잠들지 않은 채 깨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릴리아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져갔다.
그러나 이내 표정관리를 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그런 거 없어.”
“정말?”
“…….”
“넌 예전부터 거짓말을 잘 못 하더라. 얼굴에 티가 다 나거든.”
“……!”
순간 릴리아나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화염룡의 말 때문에 우석과 주고받았던 애정행각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릴리아나는 민혁과 다르게 거짓말에 능통하지 않았다.
딱히 말을 잘하는 타입의 비서도 아니었기 때문에 화염룡이 조금만 떠보기를 시도해도 이렇게 금방 들통이 나기 일쑤였다.
“설마 우석 오빠가 너와의 교제를 받아들일 줄이야.”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가슴에 손을 얹고 이야기해 봐. 정말 우석 오빠랑 아무런 일이 없었는지. 그러면 대답할 수 있겠어?”
“그건…….”
“거짓말 맞네.”
“…….”
화술의 달인, 김민혁만큼은 아니지만, 화염룡도 나름 말재간이 있는 편이었다.
자유자재로 릴리아나의 심리를 쥐고 흔드는 그녀의 화술에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석에게 ‘비서와 사원들에게는 비밀로 하도록’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약속의 유지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돼. 알았어?”
“우석 오빠가 비밀로 하자고 했어?”
“……어.”
“뭐,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이래 봬도 우석 오빠의 말은 내게 있어서 절대적이니까.”
“…….”
“그리고 난 남의 연애사를 내 입으로 떠들고 다니거나 하는 그런 취미 같은 건 없어.”
게다가 화염룡은 진심으로 우석을 좋아했었다.
하나 우석이 선택한 여자는 결국 화염룡이 아닌 릴리아나였다.
승자와 패자.
굳이 따진다면 승자는 릴리아나였고, 패자는 화염룡이었다.
소봉예화의 경우는 다르지만, 화염룡은 그래도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상당한 편이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선택했는데, 그 사실을 일부러 떠들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그건 화염룡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릴리아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화염룡의 입이 무겁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그녀가 우석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안해.”
릴리아나의 입에서 진심을 담은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화염룡이 의아함을 자아냈다.
“왜 사과하는데?”
“그야…….”
“우석 오빠의 선택이야. 그러니까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물론 속으로는 엄청 배알이 꼴리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두 사람은 내가 질투가 날 정도로 잘 어울리는걸.”
“…….”
“분명 좋은 커플이 될 수 있을 거야. 응원할게.”
오랫동안 화염룡과 같이 일해 왔기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짜증이 나는 면모도 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화염룡의 그러한 행동들이 의미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도 아직 한참 멀었구나.’
릴리아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미소를 본 화염룡이 질색을 하기 시작했다.
“뭐야, 그 웃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다른 사람들도 다 자고 있어.”
“알았어.”
그렇게 두 명의 여자들은 알게 모르게 한 걸음 더 사이가 돈독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 * *
워크샵 이틀째.
일정이 짜여 있긴 했었지만, 어제 늦은 밤까지 술자리를 가졌던 인원들 탓에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슬슬 늦은 점심 식사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미리 계획해 놓고 있었던 일정 그대로 수행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했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이른 아침에 기상을 한 릴리아나가 난감하다는 듯이 사원들의 현황을 체크했다.
그러는 도중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난 이임전이 당혹감에 휩싸인 릴리아나를 발견했다.
나름 많은 워크샵 경험을 지니고 있는 이임전 부장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헛웃음을 삼켰다.
“본래 워크샵이라는 게 다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그냥 자유 시간으로 하지요.”
“그래도…….”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릴리아나.
그때, 우석이 이임전의 편을 들어줬다.
“이 부장님 말도 일리가 있네요.”
“오, 대표님!”
이임전의 시선이 절로 우석에게 향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생기가 감돌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기색으로 인사를 건넸다.
“감기는 다 나으셨나 보군요.”
“이임전 부장님 덕분이지요.”
“하하하! 건강하신 게 어찌 제 덕분입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게 감기를 떨쳐내셨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내일이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데, 회사 대표인 우석이 그때까지 앓아누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 부장님은 괜찮으십니까? 어제 철수 말을 들어보면, 꽤나 늦은 시간까지 마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술이라면 이제 완전히 단련이 되어 있어서요.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그보다 한 가지 문제가 터져서 그거 좀 해결해야 할 거 같습니다만…….”
“문제요?”
“네. 실은 말입니다…….”
이임전 부장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키더니, 어플 하나를 실행시켰다.
그 어플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우석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반드 미디어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웹툰, 웹소설 연재 플랫폼, 요하네였다.
“갑자기 메인 화면에 있는 배너가 깨져서 나온다는 말이 있어서요. 이것 좀 빨리 수정해야 할 거 같은데…….”
“흐음, 그렇군요.”
매우 급한 일이었다.
괜히 이임전 부장이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을 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표인 우석에게 상담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석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알겠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대표님이요?”
“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일단 세수부터 하세요. 슬슬 밥 먹을 준비도 해야죠.”
“아, 알겠습니다…….”
우석이 과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온갖 의구심이 드는 이임전이었지만, 그래도 우석에게 반기를 가할 수도 없었기에 그가 한 말대로 세수를 하러 걸음을 옮겼다.
한편, 어플을 실행시키면서 본인의 스마트폰으로 직접 문제를 확인한 우석이 어느 특정인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릴리아나 역시 우석과 같이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외부적으로 보여야 하는 모습은 애인 관계가 아닌 대표와 비서의 모습이어야 했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릴리아나는 별다른 투정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바로 워크샵을 온 뒤,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얌전히 방에만 처박혀 있는 사람이 머무는 방이었다.
“열도록.”
“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릴리아나가 곧장 열쇠를 이용해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풀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곳에는 태양빛 대신 어둠이, 그리고 무더운 온기 대신 차가울 정도로 빵빵하게 틀어져 있는 에어컨 바람이 가득 차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다수의 모니터와 아직도 돌아가고 있는 컴퓨터 본체가 놓여 있었으며, 반대쪽에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잠을 자고 있는 한 인물이 보였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아이티라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아차린 릴리아나가 발로 툭툭 그를 건드렸다.
“아이티. 우석 님께서 오셨다. 지금 당장 일어나.”
“……뭐…… 우석 님……?”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이들의 주인인 우석이 직접 이곳까지 행차를 했다.
계속 누운 채 잠을 청하고 있으면, 릴리아나가 또다시 그의 모니터를 박살 낼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제적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신지요.”
우석이 허투루 그를 찾아오진 않았으리라.
평소에도 뭔가 특정한 목적이 있지 않은 이상, 웬만해선 아이티가 있는 곳까지 직접 잘 찾아오지 않는 우석이기에 곧장 방문 목적을 물었다.
우석도 왈가왈부 시간을 끌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곧장 그가 찾아온 이유를 들려줬다.
“요하네 어플 쪽에 문제가 생겼다. 메인 배너가 깨져서 나온다고 하더군. 바로 해결할 수 있겠나?”
“그거야 뭐…… 어렵지 않습니다.”
“소요 시간은?”
“3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예.”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모니터 앞에 자리를 잡은 뒤에 곧장 작업에 들어갔다.
딸칵딸칵! 하는 키보드, 마우스 소리만이 아이티가 머물고 있는 방을 가득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티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건너건너 펜션 건물에 어제 늦은 시각에 이곳을 찾아온 여행객이 있습니다만.”
“누구지?”
평범한 여행객이라면 굳이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석의 앞에서 이 말을 할 정도라면, 분명 우석이 벌이고 있는 사업 분야와 큰 연관이 있는 사람이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K 로지의 문태현 대표입니다.”
“……K 로지라고?”
“예.”
아이티가 직접 언급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K 로지란 말에 우석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초반에 우석이 반드 미디어 사업을 진행할 당시에는 소설 플랫폼을 주로 삼으며 성장을 거듭해 갔었다.
그 과정에서 반드 미디어와 많은 협업을 했던 기업은 누가 뭐라 해도 M 컬쳐였다.
K 로지와도 접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소봉예화의 대표작인 눈물 비도 M 컬쳐 이후 K 로지에도 서비스를 했었으니 말이다.
“문태현이 혼자 이곳으로 온 건가?”
“아니요. 편집팀 김원일 부장과 함께 왔습니다.”
“……그래?”
노골적으로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한 방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장소 중에서 반드 미디어가 워크샵을 온 이곳으로 온 걸까.
그것도 두 사람이 같이.
“우연한 만남을 가장한 미팅이 되겠군.”
우석도 눈치 9단이었다.
문태현이 할 일 없이 이곳에 왔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무슨 목적이 있을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