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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신-158화 (158/201)

갑질의 신 158화

53. 움직이는 마음(3)

우석이 쉬고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된 릴리아나.

이미 불이 다 켜진 상황에서 우석은 평상복으로 환복을 마친 상태였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릴리아나가 그의 안부를 묻자, 우석이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여줬다.

“나쁘지 않다. 자고 일어나니까 많이 괜찮아진 거 같구나.”

“다행이에요.”

“이번 경우는 내가 컨디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니까…… 너희들에게 면목이 없군.”

“아닙니다. 저희 비서들이 우석 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좀 더 부지런히 움직였어야 했는데…… 저희의 책임입니다.”

우석의 말을 부정하는 릴리아나였다.

실제로 그녀의 말마따나 우석은 한 명이 하기에는 많아 보이는 업무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회사 대표이면서 동시에 각종 미팅에 참가를 하고, 새로운 사업 프로젝트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우석의 손이 안 닿는 곳이 없었다.

물론 우석의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반드 미디어라는 사업체가 빠른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의 덩치가 점점 커지면 커질수록 우석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분명 넘어설 터였다.

그때가 된다면, 릴리아나의 말대로 비서들이 제 역할을 확실하게 해줘야 했다.

이제 막 합류하게 된 미스터 리라든지 반도체, 그리고 신입인 나모영까지.

한 명 한 명이 일당백(一當百)의 마음가짐으로 우석을 도와줘야 했다.

실제로 비서들은 남들이 지니지 못하고 있는 뛰어난 능력들을 가지고 있으니, 분명 앞으로 날이 갈수록 우석에게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물론 릴리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우석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는 열정적인 비서 중 한 명이었다.

우석을 따르는 비서들 중에서도 충성심이 가장 높은 비서.

그게 바로 릴리아나였다.

“냉장고에 맥주 캔이 두 개 있다. 하나씩 마실까?”

“네.”

고개를 끄덕이며 우석의 술자리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릴리아나였다.

화염룡과의 술 내기가 트라우마로 남은 탓에 그다지 술을 좋아하지 않게 된 릴리아나였지만, 우석과 함께하는 술자리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술자리뿐이랴.

우석과 함께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것이 릴리아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안주는…….”

냉장고 안을 둘러보던 릴리아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맥주캔을 건네받은 우석이 그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마른안주 같은 걸로 대신하지, 뭐.”

“제가 간단하게 뭐라도 만들까요?”

“만들 수 있나?”

“네. 안 그래도 우석 님에게 직접 요리를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제 나름대로 장을 봤습니다.”

“어느새 그런 걸…… 그렇다면 맛을 안 볼 수가 없겠군.”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반드 미디어 사업 초창기 당시.

비교적 평수가 큰 가정집을 사무실 대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점심시간만 되면 릴리아나가 자주 요리를 도맡아 한 적이 꽤나 많았다.

그때는 릴리아나의 손수 만든 요리를 어렵지 않게 먹었지만, 반드 미디어 사업체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사무실 전용 공간으로 인테리어를 바꿨고, 그 덕분에 릴리아나가 주로 애용하던 주방 공간이 사라지게 되었다.

따로 식사 제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원들은 점심시간만 되면, 근처에 위치한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그 때문에 우석은 릴리아나가 손수 만든 요리를 맛본 지 꽤 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그러했으니 말이다.

빠르게 재료들을 손질해가는 릴리아나.

한편, 뒤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우석이 릴리아나에게 의외의 발언을 들려줬다.

“이렇게 보면…… 너한테도 가정적인 면모가 많이 묻어나오는군.”

“그, 그런가요?”

“음식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고. 내가 원하는 이상형이기도 하지.”

“……!!”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릴리아나의 행동이 그대로 정지했다.

행동뿐만이 아니라 사고 역시 정지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우석이 무슨 말을 한 건가.

이상형?

그 말인즉슨…….

릴리아나가 우석의 취향에 맞는 여성이란 뜻일까?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 품기 시작하는 릴리아나의 표정이 급격하게 홍조를 띄웠다.

그녀의 두근거리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석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때도 나와 부부의 연을 맺었던 여인도 너와 같이 가정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여인이었지. 지금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지만 말이야. 후후.”

“…….”

“운명이란 참으로 재미있어. 일개 졸부에 불과했던 내가 다른 세계로 건너와서 또다시 돈의 왕을 노리게 될 줄이야. 아니지…… 세계의 주인이 되었으니 라울 시절에 비해서 스케일이 훨씬 더 커진 셈인가.”

우석의 옛 아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릴리아나는 속으로 복잡한 심경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예전의 삶에서 다른 여인과 혼사를 맺어 가정을 꾸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라울 더 그레이너가 아닌 이우석이라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남자 역시 세계의 주인 이우석이었다.

“우석 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봤다.

그녀의 물음에 우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질문은 무슨 뜻이지? 비서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 건가? 아니면 여자로서?”

“그건…….”

거기까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비서로서 도를 넘는 행동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그녀를 억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먼저 칼을 빼어든 건 다른 우석이었다.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고 한다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저를……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전…… 우석 님에게 딱히 도움도 못 되었고…… 처음에는 어벙한 모습만 보여드렸었는데…….”

“분명 그랬지. 근데 그런 모습도 귀엽더군.”

“……!”

귀엽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칭찬에 릴리아나의 얼굴이 더더욱 화끈거렸다.

릴리아나의 약점은 의외로 예쁘다, 귀엽다 등과 같은 칭찬들이었다.

그런 칭찬을,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우석에게 듣는다면…….

릴리아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늘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내려왔던 릴리아나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유일한 인물.

그가 바로 이우석이었다.

“요. 요리가 완성됐습니다.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부끄러운 감정을 감추기 위함이었을까.

황급히 손놀림을 재촉하는 릴리아나였다.

* * *

릴리아나가 만든 제육볶음을 안주삼아 맥주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두 젊은 남녀.

우석과 릴리아나가 처음 만났던 이야기를 비롯해서 그간 겪어왔던 일 등을 또 다른 안주로 삼아 술과 함께 음미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에 우석이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이런…… 벌써 자정이 넘어갔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보여주는 릴리아나였다.

그녀는 시간이 그렇게까지 빠르게 간 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슬슬 자고 있을까요?”

“군데군데 술판을 벌이는 곳도 아직 있는 모양인가 보군.”

“……그렇군요.”

워크샵하면 밤샘 술파티를 빼놓을 수 없었다.

물론 반드 미디어에서는 그런 술 문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억지로 술을 권유하는 그런 관습은 없었다.

회식 문화 역시 무리하게 2차, 3차, 4차까지 끌고 가지 않고 1차에서 끝낸 이후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 혹은 뭔가 아쉬운 사람들만 개별적으로 모여 2차를 가거나 하는 게 반드 미디어의 평소 관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 이미 각자의 방에서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있을 터.

우석이 위치한 이곳은 그에게만 개별적으로 할당이 된 독방이었기 때문에 누가 함부로 들어오거나 할 일은 없었다.

사원의 신분으로 어떻게 대표가 머무르고 있는 방에, 그것도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대에 함부로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곧 그 말은…….

동이 틀 때까지 우석과 릴리아나, 두 사람만의 시간이 확보되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조심스럽게 침을 꿀꺽 삼키는 릴리아나가 우석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건 어찌 보면 두 번 다시 없는 절호의 찬스였을지도 몰랐다.

몇 시간 전, 우석은 분명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릴리아나가 이상형이라고.

우석은 여자 문제로 문란한 성생활을 보낸 적이 없었다.

레디너스 대륙의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 이 세계에서도 그의 여성관은 확고했다.

그래서 다른 업체들로부터 성접대의 유혹을 받아도 우석은 깔끔하게 뿌리쳤다.

그게 이우석이라는 남자의 태도였다.

“우석 님은…….”

“나 말인가?”

“……아닙니다.”

뭔가 말을 하려다가 도중에 관둬버렸다.

분위기에 취해 괜히 이상한 말을 내뱉어 우석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예의주시하던 우석이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너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네?”

“예전에 우리가 부산으로 출장 갔을 때, 혹시 기억나나.”

“예, 기억합니다만…….”

어찌 잊으랴.

부산에 내려갔을 당시, 릴리아나는 우석과 같은 호텔방을 썼던 적이 있었다.

물론 이렇고 저렇고 할 만큼의 커다란 사건은 없었다.

그저 릴리아나 혼자서 당황하고, 혼자서 걱정하고, 혼자서 들떴던 것으로 끝이 났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우석 본인이 그 부산 출장 시기를 언급하다니.

“사실은 네가 자고 있을 때.”

우석이 머쓱한 미소로 그때의 일을 회상하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너에게 키스했었다.

“……네에?!?!”

너무 놀란 나머지 새된 비명을 지르는 릴리아나였다.

만약 근처에 누군가 있었다면, 무슨 일이냐며 이 방 안으로 뛰쳐 들어왔을 게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릴리아나가 곧장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우석에게 딱히 위해를 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키, 키스라니요……?!”

“말 그대로다. 네가 잠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해버렸지. 그 일에 대해서 쭉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못 잡고 지금까지 질질 끌게 되었구나.”

“그, 그건…….”

릴리아나의 입장에선 사과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뭐라고 할까.

그녀에겐 축복과도 같았다.

“아무튼 내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 너에게 사과도 할 겸해서 뭔가 원하는 게 있다면 다 들어주도록 하마. 말해보도록 해라.”

“전 딱히…….”

우석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순간.

릴리아나의 마음속에 이름 모를 욕심이 샘솟았다.

우석과의 키스.

얼마나 달콤했을까.

그 행복감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는 욕망이 릴리아나를 지배했다.

하나 그 부탁은…….

분명 세계의 주인과 비서라는 두 사람의 관계를 부숴 버릴 수도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도 컸다.

화염룡의 응원.

용기를 내보라는 그녀의 한 마디가 릴리아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럼 저에게…… 다시 한번 그 잘못을 저질러주세요.”

“…….”

그녀가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한 것인지 우석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우석이 그녀에게 다가가 가녀린 허리를 감쌌다.

조심스럽게 우석에게 안긴 릴리아나가 살짝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 위로 우석의 입술이 겹쳐졌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키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그 달콤함에 취한 모양인지 릴리아나의 눈가에 기쁨이라는 감정이 눈물로 형상화되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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