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56화
53. 움직이는 마음(1)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
시간이 시간대인 만큼 아마도 다들 모여서 저녁 식사라도 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을 한 우석이 누운 채 쓴웃음을 지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나 보군.”
회사 사장으로서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내심 이번 워크샵을 계획하면서 사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도 해봤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면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우석이 현재 감기몸살로 인해 누워 버렸으니…… 안타까운 상황이기도 했다.
우석도 나름 사원들과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번 여행을 즐기려 했었다.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그런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부하 된 입장에서 보자면, 한창 놀고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을 때 상관이 갑자기 난입을 해오면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때가 종종 있었다.
심지어 우석은 일반 사원도 아닌 회사 대표 아니겠는가.
그가 대뜸 고개를 내밀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나요?’라는 말 한마디만 하더라도 사원들은 격식을 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파티의 흐름을 끊는 일이 된다고 한다면, 우석은 차라리 이렇게 누워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오히려 사원들에게 더 달가운 상황을 선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뭐…… 세상만사라는 게 꼭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상반신을 일으키며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보는 우석.
열이 많이 내려간 듯했다.
제아무리 바쁜 스케줄이 있다 하더라도 평소에도 꾸준히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건강상으로는 사실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지금 감기몸살에 걸린 것도 그저 쌓여 있던 피로가 일시적으로 몰려와 감기몸살이라는 형태로 다가오게 되었을 뿐.
평소에도 병약하거나 그런 타입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감기몸살도 조금만 쉬면 금방 물리칠 수 있었다.
“후우.”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해보는 우석이었다.
확실히 오후에 비해 몸이 많이 좋아졌다.
그저 잠 한 번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그 한 번의 잠으로 제법 컨디션 회복을 많이 한 느낌이었다.
“물이나 한 잔 마실까.”
땀을 많이 흘린 탓인지 옷도 젖어 있었고, 갈증도 느껴졌다.
입고 있던 반팔티를 탈의한 다음에 냉장고를 향해 다가갔다.
안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유리컵에 따르는 순간, 우석이 머물고 있는 독방의 문이 조금씩 열렸다.
“우석 님. 저 왔습니……!”
말을 하던 도중에, 릴리아나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얌전히 누워 곤히 잠을 취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우석이 지금은 멀쩡히 일어나서 물을 마시려고 하고 있었다.
그 부분도 물론 놀랄 만한 요소이긴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곳은 정작 따로 있었다.
바로 우석이 상의를 탈의한 상태라는 점이었다.
잔근육으로 인해 제법 탄탄한 상체를 자랑하는 우석의 모습에 릴리아나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비쳤다.
“이, 일어나셨군요.”
“방금. 그보다 무슨 일이지?”
“죽 덥혀드리려고 왔습니다.”
“죽이라…….”
이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식사를 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본래 감기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이제 막 나은 다음에 또 걸리는 감기가 제일 무서운 법이었다.
감기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괜히 컨디션 관리에 실패하면 더 심한 후폭풍을 맞이할 수 있었다.
괜히 그게 걱정이 된 릴리아나가 우석에게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건넸다.
“우석 님.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신 건 아니시니 일단 얌전히 누워계심이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러는 게 좋겠군.”
우석도 릴리아나와 같은 생각인지 이제 막 비운 물컵을 부엌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누워 있던 침구류 위로 향했다.
그러나 다시 반팔티를 입으려 해도 영 찝찝해서 도무지 입을 맛이 나지 않았다.
“이 옷은 땀으로 너무 많이 젖어 있어서 다시 입으면 오히려 춥기만 할 거 같군.”
“그럼 바로 새 옷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등에 있는 땀도 닦아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하마.”
“예.”
릴리아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우석이 이불 위에 앉아 정자세를 취했다.
한편, 우석이 입을 새로운 반팔티를 가져온 릴리아나가 그의 몸을 닦아주기 위해 미지근한 물에 수건을 적셔 가져와 그의 등과 마주하며 무릎을 꿇은 채 앉았다.
“…….”
탄탄한 등근육.
그리고 균형 잡힌 몸매에 릴리아나가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의 육체를 이렇게 직접 자세하게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게다가 다른 남자도 아닌,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의 몸 아니겠는가.
‘안 돼…… 이상한 마음 같은 건 괜히 우석 님에게 방해만 될 뿐이야.’
다시 한번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데에 성공한 릴리아나가 수건으로 그의 등에 맺힌 땀방울들을 정성스럽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여자에 비해 훨씬 넓은 남자다운 등에 릴리아나의 시선이 더더욱 고정되었다.
생각을 해보면 우석은 참으로 매력적인 남자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차가운 면모도 있었지만, 그래도 속은 다정한 남자였다.
자신의 가족들을 아낄 줄도 알고, 불의를 보면 때에 따라서 직접 나서기도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능력 있는 남자.
그리고 다정한 남자.
그런 우석의 면모에 릴리아나는 비서라는 직책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사랑.
그리고 애정.
이제 릴리아나는 자신의 그런 속마음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석을 향한 이런 마음이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인 줄도 몰랐었다.
하나 릴리아나도 결국 여자 아니겠는가.
점점 시간을 거듭할수록 그녀는 이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임을 알아가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눈을 돌리기 힘들었다.
우석이 다른 여자의 곁에서 미소를 지어주는 걸 보기만 하더라도 질투가 났다.
그래서 저번에 지혜와 우석이 단 둘이서 따로 약속을 잡아 움직일 때에도 미행 아닌 미행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마음을 밝히게 된다면…….
분명 우석에게 크나큰 민폐를 끼치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릴리아나는 함부로 대놓고 우석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었다.
물론.
우석은 릴리아나의 감정을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릴리아나는 아직 우석이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그렇게 말없이 우석의 등을 묵묵히 닦아주기만 하는 릴리아나.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우석이 결국 먼저 말문을 열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왠지 조용하군.”
“그, 그게…….”
우석이 먼저 입을 열자, 당혹감에 휩싸인 릴리아나가 일시적으로 말을 더듬었다.
평소에 보여주든 똑 부러진 비서의 모습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그런 행태였다.
그런 릴리아나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 탓일까.
우석이 옅은 웃음소리를 들려줬다.
“후후…… 너도 당황할 줄도 아는구나.”
“저도…… 알고 보면 많이 당황하곤 합니다. 아직 한참 부족한 비서니까요.”
“그래도 다른 이들에 비한다면, 난 네가 제일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전…….”
능력적으로 따진다면 릴리아나는 우석에게 그리 많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우석의 사업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비서라고 한다면 단연코 화염룡과 소봉예화 콤비, 그리고 정보의 신인 아이티를 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석은 릴리아나보다 두 사람의 능력을 더 필요로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릴리아나는 ‘난 도움이 안 되는 존재인 걸까?’ 하는 자책감에 시달릴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우석에게로 향한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런 자책감의 크기는 더더욱 그 덩치를 부풀렸다.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녀의 고민을 눈치챈 모양인지 우석이 추가적인 발언을 들려줬다.
“내가 판단하는 우수한 비서의 기준 척도는 쓸모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충성도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게 좋다. 아무리 쓸모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봤자 내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말짱 꽝이잖나.”
“……그것도 맞는 말씀이신 거 같습니다.”
“그래서 너에게 서열 1위라는 자리를 준 거다. 충성도가 높았기에, 그리고 그만큼 너를 믿는다는 뜻이니까 1위 자리를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도록. 그리고 나를 도와 앞으로도 비서들을 잘 제어해 줬으면 좋겠다.”
“……감사합니다, 우석 님.”
우석이 그녀를 높게 평가해준다는 말을 들은 것 때문일까.
릴리아나의 눈동자에서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묘하게 떨리는 몸.
그리고…… 얼굴에 새겨지는 눈물 자국.
우석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살아왔던 그녀에게 있어서 방금 그가 들려준 그 말은 가히 릴리아나 인생을 통틀어서 최고의 칭찬임에 틀림이 없었다.
우석이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 말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우석은 지금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 말에 릴리아나가 생각하는 이성 관계에 대한 감정은 포함되어 있지 않겠지만 말이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릴리아나가 다시 수건으로 우석의 등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녀가 방금 눈물을 보였다는 것을 우석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석도 보통 눈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들려온 미묘한 떨림.
그리고 일시적으로 정지했던 손놀림을 통해 그녀가 우석의 말에 눈물을 흘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우석은 일부러 모른 척을 하기로 했다.
괜히 우는 이유를 캐물어 봤자 좋을 만한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릴리아나도 참 순수하군.’
겉은 어른이지만, 속은 아직 어린아이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요즘 들어 참으로 보기 드문 여자 중 한 명.
그게 바로 우석의 최측근 비서인 릴리아나였다.
“식사 마치고 이후에 따로 일정 같은 게 있나?”
“우석 님의 스케줄을 여쭤보시는 겁니까?”
“아니, 네 스케줄을 묻는 거다.”
“저는…….”
마땅히 할 건 없었다.
본래대로라면 우석을 따라다니면서 이런저런 워크샵 일정을 보냈어야 했는데, 우석이 감기몸살로 인해 환자 취급을 당하게 되었으니…… 우석과 같이 행동하는 데에 모든 스케줄이 맞춰져 있는 릴리아나가 별도의 스케줄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던 우석이 잘 됐다는 식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럼 10시 즈음에 이곳으로 와라.”
“10시…… 말입니까?”
“그래. 철수의 말을 들어보니, 아마 9시 반쯤부터 시작해서 사원들끼리 각자 술파티를 가지게끔 일정을 짤 거라고 하더구나. 그때 네가 따로 같이 술 마실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야 그 파티에 가서 마셔도 상관은 없다만…… 별다른 일정이 없다면 이곳으로 와줬으면 좋겠구나.”
“네, 알겠습니다. 우석 님 말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화염룡과의 후유증 때문일까.
내기 술자리 사건 덕분에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된 릴리아나였지만, 우석이 같이 마시자고 제안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셈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릴리아나의 주인, 이우석이 제안한 술자리 아니겠는가.
설사 다른 이와 술자리 약속이 잡혀 있다 하더라도, 만사를 제치고 우석의 제안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게 릴리아나로서는 도리이자 이치였다.
그녀로부터 꼭 오겠다는 대답을 받은 뒤에 우석이 새로운 반팔티를 다시 입고 자리에 누웠다.
“그럼 그때 보도록 하자.”
“네.”
그렇게 다시 잠을 청하는 우석.
무엇 때문에 릴리아나와 단 둘이 술자리를 가지고 싶다고 말한 걸까.
릴리아나의 입장에선 도무지 그의 진의를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