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54화
52. 워크샵(Workshop)(4)
짐 정리를 끝낸 뒤, 사원들이 모인 곳은 바로 해당 펜션 내에서도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방이었다.
15여 명이 무리 없이 잘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6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이려고 하니 아무래도 장소의 협소함은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의 앞에 마주 선 철수가 인원 체크부터 먼저 시작했다.
“우선은…… 다 모이셨죠?”
“예!”
“각 부서의 팀장분들께서 인원 체크부터 먼저 하시고 저한테 보고해 주세요.”
숫자가 많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인원 체크를 해야 했다.
혹시 또 모르지 않는가. 괜히 워크샵 갔다가 혼자 동떨어져서 여기저기 헤맬지도.
즐겁자고 온 워크샵이 최악의 워크샵으로 기억에 남으면 안 되었기에 각 부서의 팀장들 역시 인원 체크에 보다 신중을 기했다.
곧 모든 사원들이 다 한자리에 모였음을 확인한 철수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 이우석 대표님의 한 말씀부터 들어 보도록 할까요.”
졸지에 바통을 넘겨받게 된 우석이 곧장 일어서 이들 앞에 섰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반드 미디어 대표, 이우석입니다.”
대표로서 자기소개에 임하는 우석의 인사에 모두가 환호성을 보내왔다.
소란스러움이 조금 잦아들 무렵, 우석이 재차 말을 이어 갔다.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 단기간 내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회사를 운영하게 될 줄은 예상 못 했습니다. 그만큼 반드 미디어의 성장세가 빠르다는 긍정적인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반드 미디어의 성장 속도는 상당히 가팔랐다.
아마 대한민국 장르문학 업체를 전부 통틀어 봐도 반드 미디어처럼 짧은 시간 내에 이 정도로 성공을 거둔 업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간 저희는 많은 일들을 해 왔습니다. 웹소설로 시작해 웹툰, 그리고 영상화와 요하네라는 플랫폼의 정립까지. 후에는 라이트 노벨 프로젝트도 남아 있고, 해외 진출의 숙원 역시 반드 미디어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오늘 워크샵을 통해 여러분과 앞으로 함께할 동료 사원들과의 친목도 다지시고, 그간의 피로도 푸신 뒤에 앞으로 미래를 위해 더 나아갈 추진력을 채워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할 말을 끝낸 우석이 마지막으로 말을 마쳤다.
“그럼 즐거운 일정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을 끝으로 사원들이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우석의 짧은 인사가 끝난 뒤, 철수가 이들에게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알려 줬다.
“저녁 식사 전까지는 자유 시간입니다. 강 근처를 둘러보셔도 되고…… 아, 펜션 주인분한테 듣자하니 강 너무 깊숙한 곳까지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아무리 수영에 자신이 있어도 괜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니 안전선 너머로는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
“그럼 저녁 식사 전까지 마음껏 휴양을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철수가 안내한 대로 사원들은 제각각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혹은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방을 나섰다.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우석에게 한 명의 미인이 접근을 해왔다.
“우석 오빠는 뭐 할 거야?”
“……글쎄. 딱히 생각해 놓은 건 없다만.”
“그럼 나랑 데이트할래? 아까 오면서 봤는데 강이 엄청 깨끗하더라고.”
“음……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아싸! 결정했으면 지금 당장…….”
화염룡이 우석의 팔을 잡아끌고 나가려던 찰나였다.
“우석 님, 저도 합류해도 되겠습니까.”
릴리아나의 깜짝 등장에 화염룡이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는 또 왜.”
“우석 님의 비서로서 행동을 같이하는 건 당연하니까.”
“그건 회사 내에서나 통할 법한 말이지. 지금은 놀러 온 거잖아.”
“그렇다면 더 잘됐네. 나도 업무 관계를 떠나서 그냥 내 기분대로 합류하는 거니까 상관없겠지?”
“…….”
한마디도 지려 하지 않는 릴리아나의 발언이었다.
정말로 김민혁에게 화술 교육이라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화염룡의 머릿속에는 그런 의구심이 가득 찼다.
두 여자의 말다툼은 이제 거의 일상 수준으로 돌아설 정도였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괜한 신경전이나 벌인답시고 제대로 휴가를 보내지 못하는 건 명백히 손해였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우석이 직접 중재를 맡게 되었다.
“두 사람 다 같이 간다. 그러면 되겠지?”
“네.”
“…….”
릴리아나와 다르게 화염룡의 얼굴에는 불만이라는 감정이 가득 내포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우석의 결정 아니겠는가.
그의 의사를 존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우석을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화염룡과 릴리아나.
두 여인의 말다툼을 지켜보던 철수가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우석이 녀석…… 인기 있어서 좋겠구만.”
때마침 옆에서 탄산음료 캔 하나를 딴 오태준이 그의 말을 받아 줬다.
“이번 기회에 좋은 여자 한 명 꼬셔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되면 사내 연애잖아요.”
“사내 연애가 어때서요? 저도 지금 와이프, 민아 출판사에서 만나서 결혼했는데요, 뭘.”
“정말요?”
“몰랐었군요.”
오태준은 자신의 가정 이야기를 남에게 잘 들려주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오태준이 사내 연애를 통해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는 건 철수에게 있어서 금시초문이었다.
“와이프는…… 저한테 1년 선배였지요. 처음 만났을 때 전 이제 막 인턴 딱지를 뗀 초보 편집자였고, 와이프는 그때 주임 직급이었습니다.”
“오태준 팀장님이 막내라니……. 상상이 잘 안 가네요.”
“개구리도 올챙이 적 시절은 있는 법이니까요. 저한테도 막내 시절은 당연히 있었지요. 아무튼 그렇게 처음 만나게 되었고…… 회사 생활을 하다가 2년 정도 열애를 한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사모님께서는 전업주부로 돌아서신 건가요?”
“아무래도 편집자라는 직업이 회사 내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일이다 보니 두 사람 다 편집자를 하면 가정을 돌볼 사람이 없어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와이프가 한발 양보했습니다.”
“양보라…….”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듯 오태준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와이프도 편집자 일을 계속하고 싶어 했었죠. 물론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와이프에게 고마워할 수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와이프가 저를 위해 하고 싶었던 일을 포기해 준 셈이니까요.”
“팀장님이 공처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요.”
“어허, 공처가라니요. 그래도 세게 나갈 때는 세게 나갑니다.”
“제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이임전 부장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지 어느새 훌쩍 다가와 입을 열었다.
“와이프한테 엄청 잘해야겠구만, 너.”
“아, 이 부장님.”
이임전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현실을 위해 꿈을 포기하는 그 감정에 대해서.
“너희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한때는 그림 작가가 꿈이었거든. 밥벌이를 하기 위해 지금은 회사원이 되었지만…… 꿈을 포기한다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드물어. 그러니까 제수씨한테 무조건 잘해 줘라.”
“하하, 물론이죠.”
“하지만 너무 잡혀 살면 그것도 좀 문제가 있겠지.”
“뭐든지 적당히가 좋습니다, 적당히.”
그렇게 유부남들 사이에 끼게 된 철수.
겉으로는 이들과 의기투합을 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 *
우석과 릴리아나, 화염룡처럼 강 주변을 맴돌거나 혹은 낚시를 하는 사람들, 아니면 펜션 근처에 마련되어 있는 간이 운동장에서 구기 종목을 펼치는 사원들 등 각양각색으로 이번 휴가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다른 쪽으로 휴가를 즐기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다.
“어이쿠. 힘들다, 힘들어.”
모임이 끝나자마자 곧장 방으로 돌아온 반도체가 스스로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티와 소봉예화처럼 그렇게까지 외향적인 활동을 즐겨 하지 않았다.
그냥 집에 틀어박혀서 외국 영화나 보는 게 그의 취미이기도 했다.
물론 언어 마스터답게 자막 없이 감상한다.
“패드를 가져오길 잘했구만.”
미리 다운을 받아 둔 영화, 애니메이션 목록들을 살피면서 오늘은 어떤 걸 감상할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휩싸이는 반도체.
그때, 또 다른 인물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구만.”
김민혁이 자신의 비서 동기이기도 한 반도체를 보며 말했다.
바닥에 눕기 일보 직전이었던 반도체가 의아한 표정으로 민혁을 바라봤다.
“너, 왜 안 나가 놀고 일로 오는 거냐.”
“나?”
“여기에 너 말고 또 누가 있다고.”
반도체의 말이 맞았다.
이 방에는 지금 반도체와 김민혁, 둘밖에 없었다.
친구의 질문을 받게 된 민혁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냥 좀 쉬려고. 2박 3일 워크샵 때문에 저번 주부터 일주일 내내 밀린 업무를 죄다 미리 해놓느라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으니까.”
“미스터리와 똑같네. 그 양반도 며칠 동안 밤새워서 미리 작업 다 끝내 놨다고 하던데.”
미스터 리가 들으면 띄어쓰기 제대로 하라는 태클을 걸어올 법도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지금 이 방에 없었다.
“나도 그래서 잠이나 좀 자려고. 너는…… 애니메이션 보게?”
“어. 이번 분기에 나온 신작들 중에서 재미있는 게 꽤 있더라고.”
“그러냐.”
민혁도 나름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부류에 속했다.
그러나 일부러 직접 찾아보거나 챙겨 볼 정도로 열의가 있진 않았다.
“아무튼 난 잘 거니까, 애니메이션 볼 거면 스피커로 하지 말고 이어폰으로 하고 들어라.”
“그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크게 신경 안 써도 되긴 하는데…… 그보다 너 말이다.”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던 민혁이 반도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듣자하니 우석 님을 속이려고 하다가 역으로 된통 당했다며.”
“그건 누구한테 들었냐.”
“화염룡한테.”
“하여튼 그 여자…… 입 하나는 엄청 싸다니까.”
굳이 화염룡이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도 새로 합류하게 된 비서들이라면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합류한 3명의 비서보다 김민혁의 서열 순위가 더 낮게 설정되었다는 것이 사실은 말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우석이 시킨 일에 대해 근무 태만의 태도를 보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오히려 역으로 열심히 일을 해왔던 그인데, 꼴찌 서열을 받게 되다니.
그때 당시 반도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친구가 그런 대우를 받았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화염룡으로부터 김민혁의 지난 과오를 듣게 된 것이다.
“너도 참 대단하긴 하다. 비서 주제에 세계의 주인으로 올라서려고 했던 거냐.”
“뭐, 시도 자체는 좋았지.”
“하지만 그 실패의 리스크가 너무 컸어.”
“그건 인정하마.”
이미 김민혁도 많이 반성하고 있었다.
애초에 덤벼들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이우석.
그는 결코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레디너스 대륙에서 돈의 왕으로 이름을 떨쳤던 라울 더 그레이너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사실 릴리아나밖에 없었다.
우석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함부로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졸지에 좌천을 당해 버린 김민혁의 신세는 동시에 비서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우석이 비서들을 잘 대우해 주긴 하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서면 안 된다.
만약 넘어서게 될 경우에는 김민혁처럼 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우석 님이 나를 좋게 봐주기 시작했으니까 다행이지. 다음 서열 순위 때 가보면 그래도 서열 랭킹이 조금이라도 올라갈 거야.”
“그러다가 또 꼴찌 하면?”
“그러면 또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구만.”
“그러게 말이야.”
이미 지나간 과거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 덮은 민혁이 수면을 취하기 위해 조용히 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