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52화
52. 워크샵(Workshop)(2)
부천역 근처에 마련된 미스터 리의 작업장.
그곳을 찾게 된 우석과 릴리아나가 문을 열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이들의 인상을 구기게 만든 건 술 냄새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우석은 그에게 알코올 섭취 금지 명령을 내렸다. 만약 우석의 명령을 어기고 알코올을 섭취한다면, 우석에게 적지 않은 보복을 당할지도 몰랐다.
설령 그게 ‘천벌’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미스터 리는 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주인의 명을 어긴 셈이니까.
그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미스터 리는 간신히 술의 유혹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추가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바닥에 잔뜩 널려 있는 건 다름이 아닌 포도주 페트병들이었다.
수많은 페트병들을 헤치고 거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다수의 과일 주스 페트병에 둘러싸인 채 타블렛으로 웹툰 작업을 하고 있는 미스터 리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다 뭐냐.”
우석이 페트병 하나를 들어 보이며 미스터 리에게 자초지종을 요구했다.
그제야 우석과 릴리아나가 자신의 작업실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인지 이어폰 착용을 해제하고서 이들에게 다가왔다.
“이건…… 보시다시피 과일 주스 병들입니다.”
“왜 이렇게 많이 주스를 섭취하느냐에 대해 묻고 있는 거다.”
“그건…….”
어색한 표정과 함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빙빙 돌리던 미스터 리가 결국 진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술 대신 뭔가 저를 채워 줄 만한 게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과일 주스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방 상태가 이 지경까지 되었군.”
“그랬습지요…….”
“술 중독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더니만, 이제는 과일 주스 중독이라……. 넌 뭔가에 중독되지 않으면 안 되는 습성이라도 지니고 있는가 보군.”
“예술인으로서 항상 겪는 창작의 고통을 이런 걸 통해서라도 해결하지 않으면 곤란하니까요.”
사실 우석은 창작에 그다지 재능이 없었기에 미스터 리의 말에 제대로 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어찌하랴. 우석이 금지한 건 알코올이었지, 주스는 아니었다.
이런 형태로 본다면, 미스터 리는 우석의 명령을 확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셈이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을 항상 염두에 둬라. 주스도 마구잡이로 마셔 봤자 너에게 큰 도움이 안 될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우석 님.”
“웹툰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우선 10화 분량 정도는 쌓아 뒀습니다.”
“어디 한번 볼 수 있을까.”
“예. 서브 모니터에 띄워 놓도록 하겠습니다.”
미스터 리에게 할당된 웹툰 코드는 ‘일상’이었다. 즉, 일상 소재의 웹툰을 그리라는 그런 뜻이었다.
딱히 대인 관계가 넓은 것도 아니고, 천재 화가의 지위에서 내려오고 난 이후에는 하루하루를 술로 보냈던 암울한 나날밖에 없는 미스터 리가 과연 어떻게 일상 웹툰을 그려 냈을지 우석도 궁금했다.
“소재는 제가 한창 현역 화가로서 활동할 당시의 이야기들을 일상툰처럼 가공해서 표현을 했습니다.”
“음…… 아이디어는 좋군.”
다시 말하자면 ‘화가의 일상을 다른 웹툰’이란 소리였다.
릴리아나도 미스터 리의 소재 선택 능력에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게다가 화가의 일상은 사실 일반인들이 접하기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화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으며, 특히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한때는 대한민국이 낳은 천재 화가라 불리던 미스터 리가 직접 들려주는 체험담 아니겠는가.
이 정도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중요한 건 내용적인 면이었다.
1화를 시작으로 해서 10화까지.
미스터 리가 그린 완성작들을 쭈욱 훑어보던 우석이 만족스러움을 표현했다.
“괜찮게 잘 나왔군.”
“감사합니다.”
재미도 충분히 있고, 특히나 전직이 화가였다 보니 화풍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였다.
일상 웹툰라는 타이틀이 아까울 정도로 디테일하고 섬세하며 절제된 화려함을 지니고 있었다.
역시 화염룡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비서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우석과 릴리아나가 놀란 또 다른 점은 바로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웹툰이 전부 다 ‘완성작’이라는 점이었다.
미스터 리가 반드 미디어 측에 1화부터 10화까지의 흐름을 대충 나열해 그린 콘티를 보여 준 게 1주일 전이었다.
그런데 1주일 후.
미스터 리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완성작을 보여 주고 있었다.
소봉예화도 그랬지만, 미스터 리의 손도 상당히 빨랐다.
‘보면 볼수록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군…….’
그저 탄성만이 나올 뿐이었다.
어쨌든 미스터 리의 웹툰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제 또 다른 용무를 해결해야 할 차례였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따로 할 일은 없나?”
“예, 없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요.”
별도로 스케줄을 물어본다는 말은, 분명 자신에게 뭔가 시킬 일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생각이 문득 든 미스터 리가 조심스럽게 우석의 말에 반응했다.
그러자 우석이 별거는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
“다음 주 중에 반드 미디어 사원들끼리 워크샵을 떠날 예정이다.”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너도 같이 데려갈 거다.”
“……네?”
순간 미스터 리가 본인의 귀를 의심했다.
아니, 반드 미디어 워크샵 행사인데 일개 작가인 그가 왜 따라가야 하는 건가.
그때, 릴리아나가 우석을 대신해 미스터 리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줬다.
“우석 님께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비서들도 대면식과 더불어 단합을 하고자 워크샵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시고 있는 중이다.”
“권유가 아니라 강압이겠지.”
“지금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니야.”
미스터 리의 딴지에 릴리아나가 매서운 눈길로 응수했다.
우석이 기획해 놓고 이런 말을 하기도 그랬지만, 사실 미스터 리의 말이 맞았다.
권유가 아니라 강압이었다.
어차피 비서들은 평소에 별다른 할 일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번 기회에 우석도 비서들의 몰랐던 단면을 알고 싶었기에 이들의 참가를 강력하게 권유…… 가 아니라 강압했다.
“그럼 너도 참가하는 걸로 알고 있겠다.”
“……알겠습니다.”
결국 승낙의 의사를 밝히는 미스터 리였다.
* * *
반드 미디어 사원과는 별개로 비서들의 워크샵 참가 희망 여부를 체크하던 릴리아나가 추가적으로 우석에게 보고를 해왔다.
“화염룡도 참가하겠다고 합니다.”
“뭐…… 그쪽은 거절할 생각도 없었겠지.”
이런 재미있는 일에 화염룡이 빠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실은 우석도 크게 화염룡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다른 비서들 역시 참가 의사를 보내왔기에 8명이 전부 다 워크샵에 참가하는 걸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남은 것은 반드 미디어 사원들의 워크샵 참가 여부였다.
그쪽은 릴리아나가 아닌 철수가 직접 조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와 이야기를 나눠 봐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똑똑.
“나다, 우석아.”
“들어오도록.”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때마침 철수에게 사원들의 참가 여부를 물어보려고 했던 시점에서 오히려 철수가 먼저 우석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참가 희망 조사, 다 확인했어.”
“빠지는 인원은?”
“대략…… 3명 정도?”
“참가율이 나쁘진 않군.”
워크샵 불참을 선언한 다른 3명도 사실은 불가피한 일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을 뿐이지, 개인적인 사정이 없었다면 아마 워크샵에 참가했을 것이다.
그만큼 회사를 향한 사원들의 충성도 역시 높았다.
“그러고 보니 조사하는 동안, 사원 몇몇이 혹시 이거 불참 때문에 뭔가 불이익을 보는 건 아니냐고 걱정하더라. 혹시 그런 거 있어?”
“아니, 전혀.”
“그렇다면 다행이네.”
만약 반드 미디어 사원들이 비서였다면, 우석은 다른 대답을 들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세계의 주인을 모시는 비서도 아닌 일반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우석의 강제력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무방했다.
그리고 우석도 이런 일 가지고 사원들에게 압박을 주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수에게 다시 한번 더 이야기를 들려줬다.
“혹시 모르니 만약 너한테 물어오는 사원들이 있다면, 방금 내가 했던 말처럼 똑같이 들려주도록.”
“알았어, 알았어. 그보다 다음 주라고 했지?”
“그래.”
“나도 슬슬 워크샵 준비나 해야겠네. 여행이라.”
철수 또한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에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 * *
워크샵을 떠나는 당일.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를 서두르던 우석의 귀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직까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여동생, 연주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우석을 바라봤다.
“오빠…… 어디 가……?”
“오늘 워크샵 간다.”
“워크샵……?”
“그래. 내일모레 돌아올 테니까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한다.”
“웅…….”
연주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연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취했다.
그렇게 기습적으로 연주와의 인사를 나누고 난 이후.
차량을 몰아 일찌감치 회사에 도착을 하게 되었다.
현재 시각, 오전 8시.
워크샵을 떠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도 더 일찍 도착한 꼴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워크샵을 떠나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들이 제대로 다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지 확인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총 참가 인원수, 69명.
대형 버스 2대로 이동을 하기로 결정되었으며, 이 중에서 후발대로 출발할 몇몇만이 자차를 타고 펜션으로 향하기로 했다.
우석은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발대 멤버에 포함되어 있었다.
선발대 멤버로는 우석을 대신해 철수가 들어가 있었다.
빵빵!
가볍게 몇 번의 경적을 울리는 차량 한 대.
그 차량을 보자마자 우석이 가볍게 손짓했다.
“왔냐.”
“그래. 그보다 버스 준비는?”
“운전기사들 이미 출발했다. 한 30분 후면 이곳에 도착할 거야.”
“오케이. 근데 정말 너, 선발대로 먼저 안 가도 되냐?”
철수는 사실 우석이 뭔가 일이 있어서 후발대로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자발적으로 후발대로 나서게 되었다고 하자 무언가 찝찝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준비란 준비는 다 해놓고 정작 이번 워크샵을 계획하는 데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우석이 후발대라니.
그러나 우석은 오히려 후발대인 자신의 현재 상황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괜찮다는 식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괜찮다. 어차피 나는 다른 녀석들이랑 따로 가는 게 더 좋을 테니까.”
“다른 녀석들?”
“같이 가는 작가 두 사람 있잖아.”
“아하…….”
반드 미디어 사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번 워크샵에 참가하는 외부인이 몇몇 있었다.
바로 화염룡과 소봉예화, 그리고 미스터 리였다.
이들은 반드 미디어에 소속되어 있는 사원이 아닌 같이 일을 하는 파트너 격이었기 때문에 따로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반드 미디어 내부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비서들과도 친분이 있기 때문에 고립되거나 그러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모양새라는 게 있지 않은가.
직접 초대한 작가 두 사람을 우석이 신경 쓰지 않고 일반 버스에 탑승시켜 보내는 것도 왠지 보기 좋은 형태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따로 작가들을 데리고 후발대로 참가하는 형태를 고수하게 된 것이다.
“그래, 알았다. 아무튼 그쪽에 가서 보자고.”
“현장 지휘 잘 부탁한다.”
“나야 뭐…… 어렵진 않지.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임전 부장님도 계시고 그러니까.”
그들이 알아서 철수를 도와줄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기에 우석도 철수에게 선발대를 맡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