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38화
47. 사랑에 빠졌을 때(3)
눈물 비 드라마 제작 소문이 퍼짐으로 인해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죄다 스폰서로 참가하기 위해 먼저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 덕분에 고준서 PD의 얼굴에는 연신 미소가 어려 있었다.
제작비에 난황을 겪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지만, 빠방한 스폰서들의 존재 때문에 한시름을 덜게 되었다.
하지만 제작비 지원을 이미 받았다고 막무가내식으로 드라마를 제작해서는 안 된다.
계속적으로 스폰서들을 만나 드라마 제작이 원활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어필하고, 이들을 안심시켜 주는 것도 제작진 측에서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물론 오늘 있을 사전 모임 파티에서도 그러한 역할을 도맡아 해야 했다.
입구 근처에서 황희진 작가와 함께 잔을 기울이고 있던 고준서 PD의 시선에 익숙한 인물들이 보이고 있었다.
“아이고! 한지혜 양 아닙니까!”
“안녕하세요, PD님. 오랜만에 봬요.”
“하하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는 신인의 티를 완전히 벗어난 거 같던데요.”
“아직까지 그런 단계는 아니에요. 좀 더 많이 배워야죠.”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는 한지혜.
그녀를 필두로 해서 한두 명씩 배우들이 모임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파티가 시작되기로 예정되어 있는 시간은 저녁 7시.
서서히 주역들이 등장하는 가운데에, 오늘 파티에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부류 중 하나가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입구 쪽에서 대기 중이던 여성 스태프가 남자 한 명과 여자 2명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먼저 나서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반드 미디어에서 온 김철수라고 합니다.”
“김철수…… 잠깐만요. 반드 미디어라고요?”
“네.”
“그럼 뒤에 계신 분들은 설마…….”
혹시나 하는 의구심을 드러내며 묻는 그녀에게 화염룡이 먼저 가볍게 오른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했다.
“눈물 비의 원작자인 화염룡이라고 해요. 옆에는 웹툰 그림 작가이신 이은지 작가고요.”
“안녕하세요.”
덩달아 본인까지 소개를 하게 된 은지가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여성 스태프가 어디론가 다급하게 연락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와 여자가 허겁지겁 입구 쪽으로 달려 나왔다.
고준서 PD와 횡희진 작가였다.
눈물 비의 원작자가 왔다는 말에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전화상으로는 몇 번 말을 주고받았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영광입니다. 고준서라고 합니다.”
“아! PD님이시군요.”
명함을 건네받은 화염룡이 이제야 그를 아는 척했다.
덩달아 황희진 작가 역시 명함을 건네주면서 화염룡과의 만남에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2차 창작에 있어서 원작자는 정말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원작과는 다른 결과물로 제작된 드라마들은 후에 대중들에게 거센 비난의 손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원작으로 인해 드라마를 보기 된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말도 안 되는 결과물로 도출된 드라마에 큰 실망을 남겼다.
어떻게 따낸 건수인데, 뒷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해 오점을 남기게 되는 건 고준서 PD도 원치 않았다.
최대한 원작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고준서의 모습이 화염룡에게도 빤히 느껴질 정도였다.
한편, 선발대로 도착한 세 사람과는 다르게 비교적 늦게 파티장에 도착한 후발대, 우석과 릴리아나가 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붉은 원피스를 갖춰 입은 릴리아나의 모습은 말 그대로 주연 여배우 그 자체였다.
“고 PD님, 혹시 저분도 섭외하셨어요?”
황희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준서에게 물어왔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는 고준서였다.
“그럴 리가 있냐. 그것보다…… 배우인가? 아니면 오늘 노래 부를 초대 가수? 일단 내가 전혀 모르는 얼굴인데.”
“고 PD님이 모르는 얼굴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우리나라 연예인은 아니라는 뜻이잖아요?”
고준서는 방송업계 내에서도 상당히 발이 넓기로 소문이 난 PD였다. 그런 그가 전혀 감조차 못 잡는다고 한다면, 희진의 말대로 연예인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
“가만…… 어디서 본 얼굴 아니냐?”
“네?”
아까는 모른 척하더니, 이제는 반대로 알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맞네, 맞아! 역시나…….”
“누구기에 그러는 건데요? 혼자만 알고 계시지 말고 저한테도 좀 알려 주세요.”
“저번에 우리가 이 대표님이랑 같이 미팅할 때 오셨던 그 금발 여성분 있잖냐! 이름이 뭐였더라…… 릴리아나! 맞아, 릴리아나 양!”
“네에?”
그때 봤을 때도 물론 ‘예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설마 본격적으로 꾸미고 보니 그것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자랑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고준서와 황희진,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릴리아나의 아름다움에 그대로 넋을 잃은 채 그녀의 행보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또각또각.
마치 장내에 릴리아나의 하이힐 소리만 울리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
그만큼 엄청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릴리아나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에스코트하던 우석이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들 너만 쳐다보는군.”
“그, 그렇진…… 않을 겁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이 정도로 과분한 집중을 받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왜 없나. 여기 파티장에 있는 누구보다도 네가 가장 예쁜데.”
“……네?”
우석의 돌발적인 발언에 너무 놀란 나머지 릴리아나가 새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차 안에서 들었던 칭찬도 그녀에겐 너무나 과분한 말이었는데, 설마 회장 안에서는 이곳에서 네가 가장 예쁘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너무 기쁜 나머지 릴리아나의 심장은 폭발 직전인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석에게 직접 칭찬을 듣게 되니, 이리도 기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순간, 릴리아나의 시야에 지혜가 포착되었다.
그녀 역시 자주색 빛이 감도는 아리따운 원피스 형태의 드레스 차림을 갖추고 있었다.
릴리아나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녀의 눈으로 봤을 때는 자신보다 지혜가 더 예뻐 보였다.
“하지만 저보다도 지혜 씨가 더…….”
“예전부터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지만, 너는 유독 외형 쪽에서는 자신감이 없는 태도를 보이더군.”
“…….”
“괜히 주눅 들 필요 없다. 넌 실제로 아름다워. 좀 더 네 모습에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시선은 앞으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우석의 말은 릴리아나의 주변을 포근하게 감싸 주고 있었다.
그의 말에 용기를 얻은 릴리아나가 천천히, 그리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 * *
고준서 PD를 비롯해 황희진 작가, 그리고 기타 주요 스폰서들과의 인사를 마친 우석이 한창 지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찰나였다.
“안녕하세요. 이우석 대표님이시죠?”
“예, 그렇습니다만.”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우석에게 슬쩍 다가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혹시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AP 엔터테인먼트에 근무하고 있는 서덕우 이사라고 합니다.”
AP 엔터테인먼트.
우석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아니, 들어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게 활동하고 있는 영화, 비디오 제작 및 배급 업체 아니겠는가.
최근 웹툰, 웹소설을 너머 눈물 비를 통해 영상화 쪽까지 발을 들이밀게 된 반드 미디어로서는 AP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소문과 정보를 여러모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드 미디어 대표, 이우석이라고 합니다.”
우석도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서덕우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가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우석도 감이 잡히는 게 있었다.
눈물 비 드라마 제작에 관해서 스폰서를 맡은 몇몇 굵직한 기업 중 하나에 AP 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의 상호명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덕우는 반드 미디어에서 제공한 콘텐츠, 눈물 비의 성공을 미리 점치고 스폰서 기업 중에서도 가장 많은 금액을 투자금으로 내놓았다.
그 덕분에 고준서의 얼굴에서는 하루 종일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저희 작품을 믿어 주시고 큰돈을 내어 주신 점에 대해서는 언젠가 꼭 직접 만나 감사의 말을 들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본의 아니게 만나게 되었으니…… 오늘 저에게 행운이 따르는 모양인가 봅니다.”
우석이 밝은 미소를 머금으면서 서덕우와의 만남에 대한 소감을 들려줬다.
그의 말을 접한 서덕우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역시 이 대표님이시군요.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저도 모르게 막 이 대표님한테 끌려들어 가는 그런 흡입력을 갖추고 계십니다.”
“과도한 칭찬이군요.”
“칭찬이 아니라 느낀 그대로를 이야기한 겁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단기간 내에 웹툰과 웹소설 업계를 평정하신 분다운 면모를 갖추신 거 같습니다.”
우석의 웹툰, 웹소설 사업은 말 그대로 순항을 이어 가고 있었다.
가끔은 역풍을 맞을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재빨리 우석의 유능함을 통해 순풍으로 바꿔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왔다.
그 덕분에 현재 우석의 반드 미디어 호가 다른 출판사들의 배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항해를 이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눈물 비 드라마를 통해서 이제는 영상화에 도전까지 하니…… 반드 미디어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가고 있었다.
“사실 눈물 비는 저희도 탐내고 있는 콘텐츠였는데…… 좀 아쉽긴 하군요.”
서덕우가 대뜸 눈물 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의 한숨은 뭔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 보군요.”
순간, 우석이 서덕우에게서 풍겨 온 낌새를 눈치채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서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레드 와인이 담긴 잔 하나를 들어 올렸다.
“뭔가 이야깃거리가 없는데 이 대표님에게 찾아왔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 대표님께서 더 많이 실망을 하실 거 같은데요.”
“하하, 그렇진 않습니다. 이렇게 직접 말을 걸어주신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크나큰 영광인 걸요.”
“과연…… 듣던 대로 겸손하신 분이군요.”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우석은 무의미한 대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돈의 흐름을 쫓는 사람이다 보니 실속을 챙길 수 있는 대화를 주로 선호했다.
물론 서덕우가 단순히 안부만 묻기 위해 우석에게 말을 걸어 왔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우석이 본 서덕우의 첫인상은 하릴없는 사람에게 먼저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올 정도로 단순히 오지랖만 넓은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명 뭔가 목적이 있을 것이리라.
그렇게 판단한 우석 또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말씀하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면 편안히 말하셔도 됩니다.”
“그렇다면야 직접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변을 슬쩍 둘러본 서덕우가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중요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이번 드라마의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저희 측에서 눈물 비 영화화를 추진해 보고 싶습니다만.”
“영화…….”
영상 매체 내에서도 가장 많은 수익과 작품성을 지니고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면 영화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서덕우가 앞서 말했던 말들 또한 주요했다.
드라마의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그만큼 눈물 비라는 콘텐츠에 많은 욕심을 내고 있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
“이 자리에서 심도 있게 이야기를 나눌 만한 소재는 아니군요.”
냅다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우석은 우선 간을 보기 위해 빙 돌리는 식으로 말머리를 돌려봤다.
서덕우 역시 지금 당장 확답을 듣고자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슬며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줬다.
“제 명함입니다. 연락처를 알려 주신다면, 나중에 사적으로 만나 따로 이야기를 해보지요.”
“알겠습니다.”
우석 또한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면서 훗날을 기약했다.
드라마에 이은 영화화.
눈물 비라는 콘텐츠는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점점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