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신 136화
47. 사랑에 빠졌을 때(1)
우연치 않게 마주친 세 사람.
그 속에서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인물은 다음이 아닌 화염룡이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옷 사러 왔다.”
“옷?”
“그래. 불만 있나?”
“아니, 딱히.”
릴리아나가 옷을 사러 왔든, 아니면 다른 패션 잡화를 사러 왔든 간에 화염룡과는 큰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릴리아나의 이런 행동에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한다면 그건 명백한 거짓말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패션에 관심조차 없던 릴리아나가 이곳에, 그것도 남에게 억지로 끌려온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의류 매장까지 오게 될 줄이야.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화염룡이 슬쩍 떠보기 식으로 말을 걸어 봤다.
“사전 모임 파티 때 입으려는 옷이라도 사려고 온 거야?”
“그…… 런 건 절대로 아니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하는 릴리아나였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자마자 화염룡은 자신의 추측에 강한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답인가 보네.’
하긴. 회사가 아닌 파티장에서 드레스로 우석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인데, 그 기회를 놓친다는 건 말이 안 되기도 했다.
화염룡이 릴리아나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행동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완고한 릴리아나가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옷을 사러 오다니.
‘세상 참 말세라니까.’
속으로 쓴웃음을 지어 보이는 화염룡이었다.
“뭐, 이렇게 만난 것도 우연이니까 너도 코디해 줄게.”
화염룡이 선심을 쓰듯 말을 해 봤지만, 릴리아나의 입장에서는 그리 탐탁지만은 않았다.
“네 패션 취향과 나의 패션 취향은 노골적으로 안 맞는 거 같은데.”
“어머, 내 패션 취향이 어때서?”
“우선 노출도가 너무 심해.”
딱 잘라 지적하는 릴리아나의 견해에 공감을 표하는 한 여성이 있었다.
바로 화염룡과 같이 이곳으로 끌려오다시피 한 은지였다.
“편집자님 말이 맞아요. 작가님은 뭐라고 할까…… 노출도 있는 의상을 너무 강조하시는 거 같아서…….”
실제로 은지는 릴리아나와 이곳에서 딱 마주하기 전에 화염룡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옷들을 시험 삼아 몇 번 입어 보고 있었다.
그중 대다수는 노출도가 어느 정도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화염룡은 오히려 두 여성의 말에 강한 반론을 드러냈다.
“내가 장담하는데, 조만간 다가올 패션의 유행 코드는 바로 노출이라고.”
“……왠지 거짓말하는 거 같은데?”
“하아, 뭘 모르는구나. 은지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아주 직설적으로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건 바로 여성의 살결이라고.”
“…….”
“…….”
“어때?”
그녀의 주장을 가만히 듣고 있던 릴리아나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원초적인 면모에서 보자면 그럴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그건 그래 봤자 육체관계에서나 통용되는 유혹일 뿐, 좋아하는 남자를 정말로 유혹하고 싶다면 몸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연결 관계를 형성시키는 게 가장 좋은 거 아니야?”
“어머, 마치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 듯한 그런 말투네?”
“…….”
김민혁도 아닌데 왜 이리 사람을 배알 꼴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순간 머릿속에 가득 찼던 릴리아나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면 너무 노출도 있는 거 말고 제대로 된 걸로 골라줄 테니까 일단 내 추천부터 받아 봐. 오케이?”
화염룡이 결국 한 수 접고 들어가겠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한동안 은지와 둘이서 번갈아 눈빛 교환을 하던 릴리아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보여도 화염룡은 문화를 담당하고 있는 비서였다.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패션 감각은 있을 터.
물론 당사자가 입고 다니는 옷을 보면 그다지 신뢰도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코디를 맡기는 것보다야 훨씬 좋지 않겠는가.
“……알았어.”
결국 다시 한번 화염룡을 믿기로 결심한 릴리아나였다.
* * *
“하아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방문을 열고 나오는 연주가 힘없는 눈동자로 특정인을 바라봤다.
“……어? 오빠, 언제 왔어?”
“한 15분 전에.”
“왔으면 말을 하지…….”
“집필하고 있는 거 같아서 일부러 말은 안 걸었어. 그보다 밥이나 먹자. 어머니가 닭볶음탕 해 놓으셨다.”
“엄마는?”
“잠깐 바깥에 물건 좀 사러 가셨어.”
“식사는 미리 하셨대?”
“1시간 뒤에 아버지 오시면 같이 드신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연주와 나란히 테이블에 앉은 우석.
부엌도 넓어지니 연주의 입장에선 뭔가 자신의 집에서 밥을 먹는 듯한 느낌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엄청 크네, 이 집.”
“전에 살던 집이 작았던 것뿐이야.”
우석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전에 살던 집은 가족 4명이 살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새롭게 이사 온 집은 달랐다.
지어진 지 채 3년이 안 된 신축 건물에 속했으며, 전망도 9층으로서 나쁜 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남의 집이 아닌, 이들 가족의 집이라는 게 연주의 입장에선 가장 마음에 드는 요소였다.
매매금을 전부 대준 것은 다름이 아닌 눈앞에 있는 자신의 오빠였다.
반드 미디어가 덩치를 불려 가면 불려 갈수록 사업적인 면에 대한 모든 것들을 가족들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우석이었기에 결국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사업 성공을 가족들에게 알리게 되었다.
물론 그의 어머니나 아버지는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반드 미디어라는 회사의 사원으로 들어가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활약하고 있을 줄 알았던 우석이 알고 보니 그 회사의 대표였고, 심지어 사업도 대성공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우석의 돈으로 집을 구매했을 정도니, 우석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요소가 많았다.
그래도 아들이 돈을 잘 벌게 되었다는데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덕분에 가난에서 어느 정도 탈출하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전부 다 우석의 공이리라.
“아무튼 오빠에게 사업적인 자질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아빠는 다 말아먹었잖아.”
“나 같은 경우에는 운이 좋았을 뿐이지.”
사업이라는 건 분명 운적인 요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석의 성공을 단순히 운이 좋았다라는 말로 돌려 버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는 실력이었다.
뛰어난 머리와 돈의 흐름을 볼 줄 아는 혜안(慧眼)이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선적으로 양질의 콘텐츠를 자체 양산해야 했다.
수많은 작가진 중 한 명에 속하는 연주도 작가로서 우석의 성공 가도에 함께하고 있으니…… 결코 남의 일은 아니었다.
“작품은 잘되어 가나.”
“……그냥저냥.”
“그 말은 잘 안 풀리고 있다는 뜻이군.”
“…….”
할 말을 잃은 연주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요즘 원고 진척이 잘되지 않고 있다는 건 이미 우석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연주는 우석과 다르게 속 감정이 그대로 겉에 잘 표출되는 타입이기도 했다.
걱정도, 동요도, 고민도.
모든 감정 표현이 그녀의 표정이라든지 행동거지에서 아우러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오빠로서 연주를 보호해 주고 싶었다. 이런 부류의 타입은 사기당하고 팽당하기 딱 좋은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감히 누가 우석의 여동생인 연주를 건드리겠는가.
그의 가족을 건드리게 되는 그 즉시.
세계의 주인에게 크나큰 분노를 사게 되리라.
“잘 안 풀리는 게 있으면 나중에 또 소봉예화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글을 좀 써 보는 게 어때?”
“하지만 작가님은 차기작 준비 때문에…….”
“괜찮아. 이미 1권은 다 썼으니까.”
“……뭐?”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 헛숨을 삼키는 연주였다.
차기작이 진행되고 있다는 건 얼추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획 단계에 불과했을 터.
“설마…… 그사이에 벌써 1권을 다 쓰신 거야?”
“어.”
“세상에…… 엄청나잖아, 그거!”
소봉예화의 경우에는 스토리적인 면도 그렇지만, 집필 속도 자체도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출판 시장이 아닌 연재 시장의 경우에는 집필 속도가 생명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빠르게, 좀 더 빠르게 글을 업로드해 실시간으로 글을 보는 독자들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런 면으로 따져 봤을 때에도 소봉예화는 유료 연재에도 최적합한 작가라 할 수 있었다.
“작가님은 진짜 만능이네.”
소봉예화는 철저하게 재능이었다.
타고난 천재!
어느 업계를 가든 간에 언제나 존재하는 부류들이기도 했다.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그런 부류를 과연 연주가 따라잡을 수 있을까?
천만에.
연주는 아직까지 그런 자신감이 없었다.
글 하나 쓰는 것도 어찌어찌 해 나가고 있는 느낌인데, 소봉예화를 인생의 목표로 삼기에는 너무나도 큰 산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우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건 말이다. 남들에 비해 잘하는 것 하나 정도는 가지고 태어나는 게 법칙이라고 할 수 있지. 너도 분명 그 특별한 하나가 존재할 거다. 소봉예화가 할 수 없는 것을 무언가를 너는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가능할까?”
“가능해. 오빠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라.”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함일까. 우석의 크고 거친 손이 연주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믿음직한 오빠로 성장한 우석.
그를 본받아 연주도 조금씩 성장을 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게 되었다.
* * *
장장 2시간 동안의 쇼핑을 마치고 난 이후.
의류 매장 입구로 나서게 된 은지와 릴리아나의 표정은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피곤한 기색을 마구 선보이고 있었다.
반면, 화염룡은 상대적으로 두 사람에 비해 생기가 넘쳐흐르긴 했지만, 눈빛에는 불만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어려 있었다.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
“아니, 그건 좀 참아줘.”
아직까지는 쇼핑에 적합한 체질로 거듭나지 않은 릴리아나였기 때문에 화염룡의 추가 시간 제안을 단호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은지는 어때?”
릴리아나로부터 동의를 받는 걸 포기한 모양인지 다음 타깃인 은지를 향해 말머리를 돌리는 화염룡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대답이 은지의 입에서 들려왔다.
“저, 저도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이 이상 걷다가 발에 물집이 잡힐 거 같아요.”
“이대로 끝내긴 뭔가 아쉬운데…….”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는 화염룡의 모습에 릴리아나가 선공을 가하듯 입을 열었다.
“또 술내기 같은 거 하자고 하면, 절대로 안 할 테니까 생각도 하지 마라.”
“쳇, 알고 있어.”
이미 한번 당한 경험이 있던 탓일까.
이번에는 좀처럼 넘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이대로 헤어지기로 결심을 하게 된 여성 3인방.
2시간 동안 화염룡과 옷 하나 가지고 엄청나게 싸워 대긴 했지만, 그래도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다.
우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의류를 손에 넣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석이 정말로 이런 옷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혜의 충고로 인해 구입했던 짧은 치마를 입었을 때도 우석은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는 칭찬의 말을 들려줬던 적이 있었다.
다시 한번 더 그의 관심을 받고 싶었다.
아니, 관심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애정을 원했다.
‘정말 난…… 비서 실격이야.’
그래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싶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있는 힘껏 모든 것을 부딪치고 난 이후에 후회를 하는 것이 그나마 나을 테니까.